애플이 AI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습니다. 자체 모델 개발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고, AI 핵심 인재들이 경쟁사로 이탈하고 있습니다. 음성 비서 시리에 구글의 AI 모델인 제미나이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뇌를 아웃소싱하는 겁니다. ‘혁신의 상징’으로 불리던 애플이 어쩌다 이런 상황에 놓였을까요. 돈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애플의 문화가 AI 시대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완벽주의라는 유산
애플은 모든 것을 비밀리에 완벽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를 때 아름답고 직관적인 제품을 내놓고 새로운 가치를 제안했습니다. 잡스는 아이폰을 만들 때 나사가 단 한 개도 보이지 않게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매킨토시를 만들 때는 내부의 회로 기판까지 우아하게 디자인되기를 바랐죠. 잡스는 속도보다 질을 우선했습니다. 그래서 제품 출시 시기를 미리 발표하지
않았죠. 완벽하게 만들려다 보면 당초 계획보다 늦어지기 일쑤니까요.
잡스가 떠난 뒤에도 애플의 완벽주의 문화는 계속됐습니다. 팀 쿡 체제에서 애플 워치와 비전 프로 역시 같은 철학 아래 만들어졌습니다. 완벽한 제품을 외부에 공개하기 전까지는 철저히 감췄습니다. 이 방식은 한때 애플의 강력한 경쟁력이었습니다. 소비자들에게 왜 필요한지도 모르는 제품을 사게 하려면, 엉터리 제품을 내놔서는 안 되겠죠. 보자마자 갖고 싶게 하려면 완벽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AI 시장은 다르게 작동합니다. 고객이 이미 제품의 쓸모를 잘 알고 있습니다. 챗GPT는 2022년 11월 30일 출시되고 두 달 만에 사용자 수가 1억 명을 넘었습니다. 올해엔 10억 명을 돌파할 전망입니다. 챗GPT의 급성장은 세련된 UX 덕분이 아닙니다. AI의 효용 그 자체입니다. 지금 AI 경쟁은 전에 없던 새로운 가치를 제안하는 싸움이 아니라, 가치를 가속하는 싸움입니다. 애플의 강점이던 완벽주의는 이 전장에서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AI 전문가 앤드류 응은 AI가 실험 주기를 극적으로 단축했다고 말합니다. 아이디어 구상에서부터 프로토타입 제작까지의 시간이 단축되고, 다양한 소규모 시도를 병렬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러니 개발 초기에는 안정성을 뒤로 미루더라도 먼저 실험과 가치 검증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패는 결함이 아니라 데이터가 되는 겁니다.
게다가 AI는 결정론적 시스템이 아닙니다. AI의 세계에는 정답은 없고 확률만 있습니다. 계산기와 달리 같은 입력에도 매번 다른 출력을 내놓고, 때로는 환각이라는 오류를 일으킵니다. 완벽한 제품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빠르게 출시하고, 실사용을 통해 빠르게 개선하는 것이 기본 전략입니다. 이 세계에서 무결점은 무속도를 뜻합니다. 애플이 AI 경쟁에서 밀리는 건 품질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품질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픈AI는 애플의 입장에서 봤을 때 거의 엉터리라고 할 만한 완성도로 새로운 모델을 출시해 왔습니다. 오픈AI는 8월 7일 GPT-5를 공개하면서 박사급 수준이라고 자찬했지만, 미국 주(州) 이름을 틀리는 기초적 오류를
남발했습니다. 이전 모델보다 못하다는 비판이 잇따르자, 이전 모델을 되살리기도 했죠. 그러나 이후 오류를 빠르게 잡아나가면서 GPT-5는 안착하고 있습니다. 출시부터 혹평, 개선, 안착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픈AI를 비롯한 경쟁사들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의 지저분한 제품을 빨리 출시하고, 사용자 피드백을 통해 다듬어 나갑니다. xAI는 아예 내부 실험조차 끝나지 않은 듯한 제품을 출시해 버립니다. 회로 기판이 복잡하고 나사 몇 개가 외관에 드러나도 일단 출시하고 피드백을 받아 개선하는 겁니다. 하지만 애플은 여전히 밀폐된 실험실에서 나사 구멍을 감추는 데 몰두하고 있습니다. 경쟁사가 사용자 데이터로 제품을 개선하며 앞서나갈 때, 애플은 피드백을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폐쇄계의 한계
대신 애플은 사용자 개인 정보 보호를 중심에 두는 AI 전략을 내세웁니다. 소형 온디바이스 AI 모델을 채택해 아이폰 등 기기 내에서 정보 유출 걱정 없이 AI를 작동시키겠다는 겁니다. 프라이버시를 우선하겠다니 소비자로서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대가도 따릅니다. 애플이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는 선택을 하면 할수록, 그만큼 모델의 규모, 학습 속도, 추론 능력이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외부 데이터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학습하는 속도가 경쟁사에 비해 느려집니다. 모델이 가진 자율성도 줄어들고요.
애플은 폐쇄 생태계를 지향합니다. 맥 OS, iOS, 앱스토어는 철저히 통제된 구조입니다. 이 전략은 단일 플랫폼을 선택하고 유지하던 시대에는 통했지만, 필요할 때마다 최적의 모델을 고르는 시대에는 맞지 않습니다. 애플은 자사가 통제할 수 있는 경로로만 AI를 노출하려고 하지만, 사용자는 점점 더 다양한 모델을 상황별로 조합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검색은 퍼플렉시티, 작문은 챗GPT, 요약은 제미나이를 택하는 식입니다.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점점 낯설어지고 있습니다.
애플의 폐쇄성은 제품 개발을 더디게 하는 동시에, 최고의 AI 인재들을 이탈하게 합니다. 오픈AI, 앤트로픽, 구글, 메타 같은 곳들은 내부 연구 결과를 외부와 공유하며 학계와 산업계에서 많은 인재를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오픈 소스 공개를 통해 연구자 커뮤니티 전체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요.
결국 애플의 문화적 경직성 — 비밀주의, 느린 의사 결정, 제한적인 외부 공유 — 은 세계 최고 연구자를 붙잡아 두기 어렵게 만듭니다. AI 핵심 인재들은 완벽한 제품을 천천히 만드는 곳보다, 실험적 아이디어를 빠르게 시험하고 세계와 공유할 수 있는 곳을 택합니다. 게다가 연봉까지 더 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없겠죠.
애플의 반격
블룸버그에 따르면 애플은 2027년 출시를 목표로 테이블톱 로봇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패드 같은 디스플레이와 움직이는 팔을 달고 있는 램프 모양 로봇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2년 뒤는 엄청나게 먼 미래일 수 있습니다. 2027년에 애플의 테이블톱 로봇이 출시됐을 때, 사용자는 이미 다양한 AI 모델을 다양한 기기에서 호출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애플은 여전히 산업의 기준점입니다. 전 세계에서 시가 총액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입니다. 하지만 가치의 중심축이 ‘놀라운 기기’에서 ‘그 기기 안의 지능’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 지능이 애플 외부에서 태어나고 아이폰은 그 지능을 불러오는 아름다운 단말기에 그친다면, 애플은 IBM이나 노키아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애플의 위기가 차라리 자금이나 인재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면 해결하기 쉬울 겁니다. 그러나 회사의 문화 혹은 철학에서 기인하는 문제라 근본적인 해결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완벽해야 비로소 출시하는 문화를 바꿔야 합니다. 폐쇄적 환경도 깨야 합니다. 예컨대 시리를 단일 음성 비서가 아니라 다중 에이전트를 라우팅하는 인터페이스로 바꾸는 것도 방법입니다. 사용자가 던진 요청을 분석해 어떤 AI가 이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지 판단하고, 그 AI 에이전트로 연결해 주는 시리 2.0을 만드는 겁니다.
하지만 애플의 DNA와 배치되는 일이라, 애플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가장 간단하고 현실적인 방법은 퍼플렉시티 같은 AI 스타트업을 천문학적 금액을 주고 인수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