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봉쇄의 날

bkjn review

현재 세대가 현재를 위한 결정을 내립니다. 복지 정책과 포퓰리즘의 경계선이 흐려지는 순간입니다.

프랑스 봉쇄의 날

2025년 9월 1일

지금 프랑스에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2025년 9월 10일로 예정된 ‘국가 봉쇄의 날’ 때문입니다. 파업 같은 것이 아닙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시작된 밈 같은 겁니다. 당일 프랑스 사회 전체를 멈춰 세우자는 것이 골자입니다. 문제는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지침 같은 것이 없다는 겁니다. 즉, 무슨 사달이 날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정체도 없고, 주관자도 없으며, 일관된 행동 지침도 없는 기묘한 저항입니다. 이 현상은 현재 프랑스가 처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경제는 휘청거리는데 이걸 바로잡을 수가 없습니다. 정치가 힘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내부의 목소리와 외부 목소리의 온도 차가 너무 큽니다. 2025년 9월은 프랑스에 중간고사 기간이 될 겁니다. 물론, 우리도 곧 비슷한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결집 없는 봉쇄의 날

2025년 5월, 한 텔레그램 채널에서 ‘9월 10일 프랑스는 멈춘다(Le 10 septembre, la France s’arrête)’라는 문구가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시작은 미미했죠. 이 텔레그램 채널은 8월 초까지만 해도 참여 인원이 17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에서는 좀 달랐습니다. 틱톡 등을 시작으로 해당 내용이 퍼지기 시작한 겁니다.

최초로 영상을 제작한 인물은 웹디자이너인 줄리앙 마리쇼라는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프랑스 북부 모르베크(Morbecque) 지역의 한 협동조합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카페는 아닙니다. ‘보조금도, 정당에도 기대지 않는 독립운동’을 선언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커피를 팔지만, 정치적인 주장도 감돌고 있습니다. 영상에 등장하는 원형 속 나무 로고와 ‘레제성시엘(Les essentiels)’이라는 이름은 마리쇼가 운영하는 카페의 로고와 이름을 따 온 것입니다.

레제성시엘은 기성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는 소규모 집단입니다. 동네 카페에서 모여 새로운 세상을 모의하는 모임 말입니다. 그러니 예산도 없고 사람도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마리쇼의 영상은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습니다. 누가 봐도 AI로 만든, 조잡한 영상이었거든요. 하지만 곧 페이스북, X.com, 틱톡, 유튜브 등에서 유사한 메시지를 전하는 콘텐츠가 만들어졌고, 퍼졌습니다.

납치당한 9월 10일

사실, 레제성시엘의 틱톡 계정 팔로워는 8000명을 조금 넘긴 수준입니다. 이들의 텔레그램 채널 가입자도 500명 수준으로 알려졌습니다. 레제성시엘은 정당과 노조를 해산하자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보수도, 진보도 아닌 독립인데 극단적입니다.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9월 10일의 구호는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수진보 진영의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들이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입니다.

즉, 마리쇼의 카페나 틱톡 채널은 국가 봉쇄의 날을 ‘제안’했을 뿐, 이 아이디어를 널리 퍼뜨린 것은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그룹들’입니다. 정당과 노조가 기능을 잃어버렸다는 레제성시엘의 주장과는 관계없이 한 진보 정당은 9월 10일의 움직임에 힘을 보태겠다고 합니다. 노조가 날짜를 맞춰 파업을 검토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군주제 부활을 외치는 세력도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다양한 집단이 제각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보니 주장에 일관된 논리나 방향이 없습니다. 9월 10일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일종의 봉쇄’ 형태로 프랑스 정부를 완전히 멈춰 세우자고 주장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집회와 파업을 이야기합니다. 그날 하루 소비를 중단하자고 주장도 나옵니다. 신용카드 결제 보이콧을 외치기도 하고, 현청이나 시청과 같은 공공 기관의 건물을 점거하자는 계획도 나돕니다. 그러나 무엇 하나 결집된 것이 없습니다. 채널별로 주장이 다 다릅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9월 10일 봉쇄의 날은 파급력이 거의 없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에너지는 크지만, 분산되어 흩어지고 말 것이라는 얘깁니다. 단결된 메시지가 없는 허상에 가까운 세력이라는 분석이죠.

허깨비를 만든 힘

뒤집어 말하면, 평소에는 한자리에 모이기도 힘든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가 9월 10일이라는 날짜 아래 한데 집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치적 이념을 갖길 거부한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이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이 바로 프랑스의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입니다. 9월 10일이라는 날짜가 부상하게 된 계기는 바로 바이루 총리의 ‘재정 긴축안’이거든요.

국가 봉쇄의 날이 알고리즘을 타고 급속히 확산하기 시작한 것은 7월 말경입니다. 7월 15일 발표된 재정 긴축안이 기폭제가 됐습니다. 바이루 총리는 프랑스 경제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면서 어떻게든 이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공공 재정을 복원하기 위해 ‘모두’가 이 노력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지금이야말로 ‘진실의 순간’이라고 선언했죠.

그런데 그 긴축안은 프랑스의 납세자들,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총 438억 유로 규모의 예산을 삭감하고 공휴일 중 이틀을 폐지하는 방안을 주요 골자로 합니다. 예산 삭감분은 연금, 복지 분야에서 주로 아낍니다. 의료비 본인 부담금도 올립니다. 실업 보험 시스템도 개혁합니다. 한 마디로, 복지는 줄이고 일은 더 하라는 얘깁니다. 당장에 반대 여론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 반대 여론이 9월 10일 국가 봉쇄의 날을 발견한 겁니다.
프랑스의 복지 제도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하지만, 이를 남용하는 행태는 사회적 문제로 지적받고 있습니다. / 출처: KBS
프랑스 국경 안과 밖의 온도 차

언뜻 봐도 반발을 피하기 힘든 내용이긴 합니다. 공휴일을 이틀이나 줄이고 복지도 대폭 줄인다니 세계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는 긴축안이죠. 하지만 바이루 총리는 프랑스가 그리스처럼 출구 없는 저주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많은 해외 언론이 바이루 총리의 견해에 동의하고요.

실제로 프랑스의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114퍼센트로, 그리스와 이탈리아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높습니다. 한때 경제 침체로 EU의 골칫거리가 되었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보다도 높은 수준입니다. 지금까지 진 빚보다 앞으로 지게 될 빚의 크기는 더 큽니다. GDP 대비 재정 적자 비율은 2024년 5.8퍼센트로, 유로존 27개국 중 3위 수준입니다. 한때 경제 위기로 EU에서 탈퇴 이야기까지 나왔던 그리스도 1.3퍼센트의 재정 흑자를 기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프랑스의 경제는 확실히 위험합니다.

문제는 프랑스 내부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우선 정치권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긴축안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념이나 경제관의 문제가 아닙니다. 안 그래도 현재 프랑스의 여당은 인기가 없어 의석수가 적습니다. 긴축안에 분노하고 있는 여론이 잠잠해지기 전에 몰아치면, 현 총리를 끌어 내리고 내각을 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특히 극우 정치인 국민전선의 마린 르 펜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죠. 조사 기관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차기 대통령 지지율 1위를 기록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횡령 혐의로 피선거권을 박탈당했지만, 내년에는 항소할 수 있습니다. 대선은 2027년이고요. 

정치권은 포퓰리즘에 올라탔으니 그렇다 쳐도, 언론 또한 바이루 총리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언론사마다 논조의 차이는 있지만, 프랑스 경제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심지어 《르몽드》는 경제 전문가들의 의견을 빌어 ‘국가는 빚을 갚는 것이 아니라 빚에 대한 비용만 지불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무책임한 사실입니다.

국가의 빚이 늘어날수록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복리의 기적’입니다. 어느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시점이 옵니다. 세금을 올리든 공공서비스를 축소해야 합니다. 이 시기를 늦추면 늦출수록 타격은 커집니다. 미래 세대가 충격을 온전히 다 감내해야 하겠죠. 즉, 지금의 프랑스는 젊은 세대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 집 막내 이름으로 계속 빚을 지면서 현재의 삶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바이루 총리의 발언대로 ‘어떤 가족도 그렇게 하지 않을’일이죠.

복지 국가의 유통기한

9월 10일 프랑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갑자기 대형 해킹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고, 파리 시청이 점거당할 수도 있습니다. 폭력 소요가 발생하거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9월 8일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지는 거의 확실합니다. 바이루 총리가 끌려 내려올 겁니다.

정치권의 반발에 부딪히자, 바이루 총리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습니다. 정부 신임 투표를 하자는 겁니다. 이에 따라 9월 8일 의회에서 투표를 통해 이 긴축안을 밀어붙일지, 아니면 긴축안은 없던 일로 돌리고 총리를 끌어 내릴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불신임으로 결론이 나고, 총리 교체 수순을 밟게 되리라는 것이 지배적인 전망입니다.

바이루 총리는 프랑스에 필요한 정책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왜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하는 걸까요? 정부의 재정 정책을 다수결에 맡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현재 세대가 현재를 위한 결정을 내립니다. 미래에서 돈을 끌어다 쓰는 결정이라도 말입니다. 복지 정책과 포퓰리즘의 경계선이 흐려지는 순간입니다. 

우리나라도 국민연금을 둘러싸고 세대 간 갈등이 불거졌죠. 하지만 연금 재정만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54퍼센트 수준이지만, 노령화로 인해 2050년에는 100퍼센트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됩니다. 기축통화인 유로화를 사용하는 프랑스도 위기를 맞는데, 한국이 맞게 될 역풍은 더 강하고 가혹할 겁니다.

2025년 9월, 프랑스는 결론을 내게 됩니다. 20세기에 시작된 복지 국가라는 개념이 세대를 건너 지속 가능한지 말입니다. 지금 프랑스에 감도는 분노의 기운을 보면, 그 결과는 아쉬울 것 같습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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