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E가 기세 당당한 이유
우리는 트럼프의 이민 정책, 관세 장벽 등을 미국 민주당의 필터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의 대형 언론사들이 대부분 반트럼프 진영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CNN〉은 물론이고《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 등이 그렇죠. 그런데 미국에서 공화당 지지자들이 언론을 받아들이는 시각은 다릅니다. 상황이 꽤 꼬여 있죠. 2024년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 중 ‘매체를 신뢰한다’라고 답한 비율은 12퍼센트에 그쳤습니다. 나머지 88퍼센트는 매체의 보도를 아예 믿지 않거나 별로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트럼프는 투표를 통해 선출된 권력입니다. 최소한 절반에 가까운 미국인의 지지를 받았다는 뜻이죠. ICE의 대대적인 이민자 단속에 대해 성토하는 보도가 끊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미국 대법원이 실질적으로 ICE의 인종차별적인 단속을
용인했다는 것입니다. LA 지방 법원은 사람의 말투나 피부색, 근무 장소만을 근거로 하는 이민 단속을 제한했습니다. 이 단속 금지 명령을 대법원이 다시 일시 정지한 겁니다. 정치적인 결정입니다.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민자의 노동력을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은 양극단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어느 한쪽은 혐오와 증오에 가깝고요.
트럼프는 이 혐오와 증오를 이용해 정치적인 권력을 탐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화합보다 갈라치기의 언어가 더 힘이 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정치인입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동시에 매우 영리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논리가 확고하기도 하고요. 트럼프는 현재 MAGA 집단이 느끼는 갈증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짚어낸 미국의 문제
미국의 제조업 일자리가 빠르게 감소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입니다. 세계화의 물결과 함께 제조업 일자리가 중국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1991년 대비 2007년에는 미국 전체 노동 가능 인구 중 제조업 고용 비중이 12.6퍼센트에서 8.4퍼센트로 주저앉았습니다. 3분의 1토막이 난 겁니다. 하지만 당시 경제학자들은 제조업이 사라진 자리에 다른 일자리가 자연스럽게 생길 것이라 봤습니다. 서비스업이나 IT 등 3차 산업 말입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반만 맞았습니다. 일자리는 생겼습니다. 하지만 제조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새로운 기회를 누린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를 따라가 보면 이민자들이 있습니다. 이민자들이 미국에 남은 제조업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디트로이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주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따라 비교적
쉽게 이동합니다. 저숙련 일자리에 이들이 더 빠르게 진입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게다가 그 결과 노동 시장은 새롭게 재편되었습니다.
저숙련 노동자들의 일자리에는 이민자들이 들어왔고, 임금 수준은 상대적으로 낮아졌습니다. 살아남은 제조업 일자리의 경우, 임금 수준은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숫자는 줄어들었죠. 그 외 새롭게 생긴 일자리는 대학 졸업 이상의
고학력자에게 돌아갔습니다. 이 변화는 세계화로 인한 제조업 이탈로 시작되어 이주 노동자의 유입으로 강화했습니다. ‘레드넥’으로 불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지지층은 이 과정에서 사회 경제적인 계급의 추락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화를 끝내고 이민을 막아섭니다. 지지자들의 일자리, 즉 넉넉한 임금을 챙겨 주는 제조업 일자리를 부흥시키고자 합니다. 추락한 이들의 사회 경제적 계급을 다시 끌어올리는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다시 위대해진 미국입니다.
미국 투자의 리스크
이런 믿음으로 현상을 보면, 조지아주에서 일어난 일은 정의의 구현입니다. 조지아주는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메가 사이트 건설을 위해 감세 등의 혜택을 줬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미국까지 와서 한국인 불법 체류 노동자를 고용해 공장을 건설합니다. 미국 현지에 숙련공이 부족하다거나, 작업 시간이 늦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이들에게 소용없습니다. 그건 우리의 기준입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부심 있는 노동자입니다.
인도 진출은 열악한 기후가 걸림돌입니다. 중국 진출에는 권위주의 정부의 오락가락 정책과 부패한 지방 관료가 걸림돌이죠. 이제 미국 진출에는 이민자에 대한 적대감이 걸림돌입니다. 외국 자본의 투자가 늘 지역 경제의 활성화와 현지 일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불안감이, 이미 미국 사회에는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삼성이나 현대, LG, SK가 아무리 큰돈을 투자한들 현지에서 환대받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얘깁니다.
미국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표현대로 ‘다시 위대해지는’ 중입니다. 이주 노동에 대한 인식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이걸 알고도 이번처럼 일을 벌였다면, 우리 기업들이 오판한 겁니다. 트럼프는 원하는 바를 확실히 했습니다. 세계화-제조업 붕괴와 이민자-블루컬러 몰락이라는 고리를 끊고 싶은 겁니다. 세계화는 관세로 돌리고 이민자는 ICE가 몰아냅니다. 외국 자본을 유치해 공장을 지었으니 이제 블루컬러를 복귀시킬 차례입니다. 한국에 현지 인력 훈련까지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달라진 미국과 연을 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앞으로도 서로의 필요를 충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들의 필요만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도 충족하며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주목받는 비자 발급 관련 문제는 협소한 얘깁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려 합니다. 앞으로 조선업 분야, 반도체 분야에서도 더 요구해 올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정도 크기의 대가는 지불받아야겠죠. 곧 경주에서 열릴 APEC 정상회의, 다시 미궁에 빠진 한미일 관계, 주한 미군 문제 등 이야깃거리는 차고 넘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재의 미국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필터 없이, 어딘가 추한 모습일지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