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참으로 비효율적인 투쟁 방식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순교자를 만들어 낼 뿐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보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폭력이 만들어 낸 순교자, 찰리 커크(Charlie Kirk, 1993~2025)가 전환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름이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다릅니다. 정치적 영향력만 놓고 봤을 땐 최상위권입니다. 특히 보수 성향의 청년층 유권자에게는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커크는 X.com에서 520만 명, 틱톡에서는 730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렸습니다. 직접 진행했던 팟캐스트는 미국 애플 팟캐스트 뉴스 부문 TOP 5를 유지했습니다. 2025년 9월 15일 현재는
1위를 기록하고 있고요.
커크는 현지 시각으로 2025년 9월 10일 습격당했습니다. 유타주의 한 대학 토론회에 참석해 연설한 뒤, 청중과 질의응답을 주고받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지난 10년간 미국에서 트랜스젠더 총기 난사범이 몇 명이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커크는 ‘너무 많다’라는 취지로 답변했습니다. 이에 질문자는 지난 10년간 미국에서 전체 총기 난사범이 몇 명이나 되는지 되물었습니다. 커크가 이에 답하는 도중 총성이 울렸고, 사망했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한없이 무거운 것입니다. 폭력이 정당화되는 경우는 없어야 합니다. 커크의 죽음은 그래서 옳지 않습니다. 용의자는 검거되었고, 미국의 사법 시스템은 정의를 구현해야 할 겁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죽음의 의미와 지금부터의 세계에 관해 생각해야 합니다. 찰리 커크의 사망을 기점으로 미국의 보수 지형도가 완전히 재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보수 세력
언어는 힘이 셉니다. 이름이 붙는 순간 우리는 그 존재에 관해 깨닫게 됩니다. 이를테면 ‘Z세대’ 같은 것입니다. 셀 수 없이 다양한 종류의 사회 경제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다양한 생각을 갖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연령으로 묶어 ‘Z세대’라 이름 짓는 순간, 우리는 모든 Z세대를 ‘한 인물’로 상정하고 담론을 만들어 내기 시작합니다.
‘보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묶여 있지만, 밖에서는 마치 하나의 균질한 집단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치 지형도를 두고 생각해 보죠. 전광훈과 이준석, 홍준표와 같은 인물들은 모두 보수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한 묶음으로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미국의 보수는 트럼프 대통령을 중심으로 결집한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세력과 전통적인 공화당 세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철학과 목적이 무척 다양합니다. 그 지형도를 제대로 파악해야 트럼프 행정부의 앞뒤가 맞지 않는 행보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트럼프 이전의 보수 진영은 전통 공화당파(Traditional Republicans)가
주류였습니다. 친기업, 자유 무역, 감세, 작은 정부 등이 기본 이념입니다. 전통적인 정당 활동을 기반으로 닦아 온 대규모 기부자 네트워크를 갖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전통적인 선거 자금줄을 쥐고 있는 세력입니다.
이들과 결을 같이 하는 듯하지만, 좀 더 강경한 세력이 있습니다. 공화당 내부의 ‘작은 정부파(Small-Government Conservatives)’입니다. 오바마 행정부 초기의 경기부양책에 반발하며 전면에 부각된 ‘티파티’ 세력이 뿌리입니다. 작은 정부와 감세, 적자 축소 등을 주장하기 때문에 ‘재정 보수파(Fiscal Hawks)’로도 불립니다.
각 지역의 풀뿌리 정치 운동으로 시작되었는데, 여기에 미국의 거대 비상장 기업인 코크 인더스트리(Koch Industries)를 비롯한 강력한
자금 지원이 붙으면서 공화당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유권자의 표심과 슈퍼 PAC이나 기부 등의 자금 지원을 통해 공화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공화당의 기조를 좀 더 강경한 오른쪽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트럼프가 상징하는 사람들
하지만 이러한 공화당 세력은 21세기의 미국을 아우를 수 없었습니다. 공화당이 끌어안지 못한 대표적인 세력이 제조업 몰락과 함께 추락한 노동 계층입니다. 또,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실리콘 밸리의
혁신가 중 일부, 그리고 종교적 가치에서 미국의 미래를 보는 사람들도 있죠. 이들에게는 새로운 정치가 필요했습니다. 그걸 약속한 사람이 바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입니다.
트럼프 1기 당시부터 가장 단단한 지지층을 유지해 왔던 것은 MAGA 포퓰리스트(Populists)입니다. MAGA 집회의 구심점이죠. 제조업의 몰락으로 시작된 미국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강한 반감을 품은 세력이 모였기 때문에, 반이민과 관세 장벽을 지지합니다. 자유 무역을 주장하는 전통적인 공화당의 기조와는 근본부터 다릅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은 정당에 대한 소속감이나 돈이 아닙니다. 신념입니다. 미국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신념 말입니다. 이 신념을 키우고 확대하는 것이 소셜 미디어와 우익 팟캐스트입니다.
JD 밴스 부통령과 스티브 배넌, 마조리 테일러 그린 하원 의원 등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얼마 전 조지아주에서 우리 노동자들을 ICE에 신고했다고 자처했던 토리 브래넘도 여기 속합니다.
트럼프 2기로 들어오면서는 테크노 리버럴(The libertarian tech bros) 세력이 급부상했습니다. 피터 틸(Peter Thiel)과 같은 테크 투자의 큰 손은 물론이고, 지금은 이탈했지만 일론 머스크도 트럼프에게 미래를 걸었죠. 마크 앤드리슨, 데이비드 삭스 등의 페이팔 마피아들이 대체로 이 그룹에 속합니다. 이들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암호화폐나 생성형 AI, 자율주행 등의 새로운 기술이 이 세계를 바꿀 것이라고, 바꿔야 한다는 믿음을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민주당은 급격한 변화 앞에 규제라는 장애물을 놓는 정당입니다. 공화당은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하는 경향이 있죠. 이들은 전혀 다른 보수, 트럼프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에게 세계를 바꿀 기술이 누구의 손끝에서 코딩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실리콘 밸리의 인도인, 중국인의 존재가 이들에게는 필수 불가결인 존재죠. 이 지점에서 MAGA 포퓰리스트의
반이민 기조와 충돌합니다.
한편, 종교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보수 유권자(Religious Right)는 트럼프 집권 이전부터 공화당의 주요 지지층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주로
복음주의 개신교(evangelicals)를 중심으로 한 계층이 트럼프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세력으로 꼽힙니다. 히스패닉이나 흑인 등 유색 인종 계층에서도 트럼프 지지 성향이 관찰되는 경우가 있죠.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종교적인 이유도 큽니다. 임신 중단, 성소수자 문제 및 그와 연계된 교육 문제, 종교의 자유 등 문화적인 부분에서 정책적인 보상을 기대하는 집단입니다. 전통적인 공화당의 정책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트럼프를 중심으로 한 MAGA 운동을 통해 그들의 ‘종교적 가치’를 이룰 수 있다고 봅니다.
청년 보수가 반대했던 것
이번에 사망한 찰리 커크는 MAGA 포퓰리스트임과 동시에 종교 보수파였습니다. 시카고에서 나고 자란 커크는 백인이 절대다수인 마을에서 성장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무렵에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유색 인종이 다수가 된 겁니다. 사춘기 시절에 겪은 엄청난 변화 앞에 커크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스스로 세우기로 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선생님을 향해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총이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만들까요, 아니면 포크가 사람들을 뚱뚱하게 만들까요?”
고등학교 재학 당시까지는 그다지 인기 있는 학생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별종’으로 취급받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학교 밖으로 나오자, 커크는 백인 청년을 대변하는 보수주의자로서 크게 주목받았습니다. 일자리와 미래가 모두 불투명한 청년들부터 깊은 신앙심으로 ‘정상적인 미국’을 재건하고자 하는 재력가들까지 커크를 향해 열렬한 지지를 보냈죠.
커크가 설립한 ‘
터닝 포인트 USA(TPUSA)’는 전국의 고등학교와 대학을 기반으로 한 보수 정치 운동 단체입니다. 설립 초기, 급격히 왼쪽으로 기우는 대학들에 불만을 느낀 중장년층 기부자들이 커크와 잠깐 대화를 나눈 뒤 거금의 기부금을
척척 내놓았다고 하죠. ‘PC주의’의 온상으로 낙인찍힌 대학가의 주류 흐름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진짜 청년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인물로 추앙받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인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의 비서진으로 활동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물로도 급부상했고요.
한국 정치와도 인연이 있을지 모릅니다. 지난 2025년 8월 25일 이뤄진 이재명 대통령의 첫 한미 정상회담 직전 나왔던 트럼프 대통령의 소셜 미디어 게시물이 주목받았었죠. ‘숙청’이나 ‘혁명’이라는 단어가 등장해 우리 정부를 긴장시켰는데요, 이 메시지가 나온 까닭이 커크였다는 추측이 나오는 겁니다. 대표적인 아스팔트 우파 세력으로 꼽히는 부산 ‘세계로 교회’의 손현보 목사가 부산 교육감 재보선 관련 선거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고 지난 9월 9일에는 구속됐습니다. 커크의 측근인 롭 매코이 목사가 세계로 교회와 인연이 있으니, 커크를 통해 세계로 교회의 상황을 트럼프에게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순교자의 뒤에는
미국의 보수는, 그리고 MAGA는 이렇게 다양한 계층과 목적, 이해관계로 이루어진 집단입니다. 그래서 트럼프의 말은 갈팡질팡합니다. 한국에서 숙청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하지만, 제조업 부흥을 위해 손잡아야 할 파트너입니다. 강력한 반이민 정책을 이야기하지만, 실리콘 밸리의 개발자나 해외 투자에 따른 고숙련 노동자에 대해서는 은근히 다른 얘기를 꺼냅니다. 각기 다른 이익 집단 사이에서 줄타기를 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커크가 암살당하면서 무게추가 기울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공화당 세력이 주도했던 미국의 보수는, 잠시 MAGA 세력에 자리를 내어준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는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는 MAGA 포퓰리스트들이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트럼프 행정부 이후에도 유효한 정치 세력으로 남아 보수의 주류를 계속 꿰찰 수 있는 겁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극단적인 사회 분열도 함께 불러올 겁니다. 종교 보수파를 중심으로 ‘
순교(martyr)’ 서사가 일찌감치 나왔고, 이 서사는 더욱 힘을 얻고 있습니다. 위험합니다. 순교의 전제는 ‘악의 세력과의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보복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됩니다. 개인이 아닌 권력의 보복이 정당화됩니다. 용의자는 범행 동기에 관해 입을 다물고 있지만, 이미 성전은 시작되었습니다.
일론 머스크,
클레이 히긴스 하원 의원,
조 론스데일 팔란티어 공동 창업자 등이 커크의 죽음에 추모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커크에게 반대해 온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에 커크를 비난하는 게시물을 올렸습니다. 일부는 혐오에 가까운 조롱도 쏟아냈죠. 〈NPR〉의 보도에 따르면 33명이 이런 행동을 한 이후
해고되었습니다.
이러한 싸움은 양측을 모두 과격하게 몰아붙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어 납작한 인격을 창조해 내죠.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사건의 책임을 돌린 ‘급진 좌파’ 같은 것 말입니다. MAGA 세력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화한다는 전제하에 급진 좌파라는 딱지가 붙으면 해산당하고, 일자리를 잃고, 권리를 박탈당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미국의 분위기로 봐서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이미 미국은 도시 한복판에
주 방위군이 투입되는 일상을 경험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