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엘리슨의 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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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오라클은 AI 시대의 또다른 주연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래리 엘리슨의 시간표

2025년 9월 17일

2025년 현재 세계 최고의 부자는 일론 머스크입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혁신가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죠. 그 혁신이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부를 창출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아주 잠깐이지만 머스크를 밀어내고 세계 부자 순위 1위를 기록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 창업자입니다. 머스크보다 좀 더 일찍 태어났지만, 여러 면에서 머스크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인물이죠. 일에 몰두하는 열정과 거침없는 언변, 이해하기 힘든 결정과 행동 같은 것 말입니다.

사실, AI 시대의 주역은 대충 정리가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초반부의 주인공은 오픈AI와 엔비디아입니다. 구글과 메타,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정도가 중반부의 주인공 자리를 두고 경쟁 중입니다. 팔란티어와 브로드컴 등도 비중 있는 배역을 맡았죠. 라인업은 여기까지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오라클이 급부상했습니다. 아주 오래전, 무대 중앙에서 밀려난 줄 알았는데 말이죠. 갑자기 발생한 사건이 아닙니다. 엘리슨은 이 순간을 계획했고 만들었습니다.

잠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사람

현지 시각으로 9월 10일 화요일, 오라클이 엄청난 숫자를 발표했습니다. 3000억 달러 규모의 계약입니다. 발주처는 오픈AI. 오라클은 2027년부터 5년 동안 컴퓨팅 파워를 제공합니다. 즉, 엄청난 규모의 AI 데이터 센터를 건설해 오픈AI에 대여한다는 얘깁니다. 예상 전력 소비량은 4.5기가와트입니다. 미국 기준으로 약 400만 가구가 소비하는 전력량과 맞먹습니다.

새로운 계약 소식에 주가는 급등했습니다.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오라클의 창업자이자 회장인 래리 엘리슨입니다. 재산이 1000억 달러 이상 증가했습니다. 엘리슨이 오라클 지분의 40퍼센트 이상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스크를 잠시 제치고 세계 최고의 부자 타이틀을 달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다만, 완전히 새로운 소식은 아닙니다. 이번 계약은 2025년 1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2기의 출발을 화려하게 알렸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의 일부일 뿐입니다. 오픈AI와 오라클은 물론이고 소프트뱅크와 투자사 MGX 등이 함께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AI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 말입니다. 당시 발표되었던 규모는 5000억 달러입니다. 그중 60퍼센트가 이번 계획으로 구체화한 겁니다.

거품 같았던 AI 버블론

그럼에도 시장의 반응이 뜨거웠던 까닭이 있습니다. 3000억 달러라는 숫자가 ‘AI 거품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증거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길한 이야기를 꺼낸 장본인은 오픈AI의 수장인 샘 올트먼입니다. 지난 8월, 기자들과의 만찬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꺼내 놓다 나온 발언이 화근이었습니다. ‘AI 업계에 거품이 심하다’라는 발언 말입니다.

안 그래도 급등하는 AI 섹터 주가에 불안감이 쌓이던 차였습니다. 샘 올트먼의 한마디에 나스닥 종합지수가 이틀 연속 하락하며 2.2퍼센트포인트 떨어졌습니다. 기록적인 낙폭이었죠. 당시 MIT 보고서를 통해 AI가 투자 대비 수익성이 나오지 않는다는 조사 내용이 공개되어 비관론을 더 키웠고요.

하지만 올트먼의 발언을 앞뒤 맥락과 붙여보면, 시장은 늘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올트먼은 역사 속의 기술 버블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관해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인터넷을 예로 들면서, 큰 변화를 불러온 기술이었지만 이에 지나치게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언급했죠. 그러면서 지금 투자자들도 AI에 지나치게 흥분하는 단계인 것 같다고 덧붙인 겁니다. 기대가 좀 과한 부분이 있다는 취지입니다.

그로부터 약 한 달여가 지났을 뿐입니다. 오픈AI는 엄청난 규모의 계약으로 AI의 미래가 여전히 팽창하고, 폭발할 것임을 암시했습니다. 시장은 망설임 없이 반등했고요. 여전히 우리는 AI가 얼마만큼의 생산성 폭발을 가져올지 모릅니다. 지금의 혁신을 이끄는 주인공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다음 회차를 예상하고, 일희일비할 뿐이죠.

사실,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는 점점 잊히는 중이었습니다. 투자금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만 흘러나오던 차였죠. 그러던 중 지난 7월에 오라클과의 대규모 협력 소식이 나왔습니다. 돈 얘기만 빠졌지, 데이터 센터의 규모 등은 이번 발표와 대동소이합니다. 게다가 소문 같은 것이 아니라 오픈AI가 직접 발표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큰 뉴스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계획은 3000억 달러라는 돈으로 환산된 뒤에야 시장에 중요한 뉴스가 된 겁니다.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의 이유

오픈AI가 오라클과 손을 잡은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먼저, 마이크로소프트에의 의존도를 줄이고자 했다는 분석입니다. 다음으로 오라클과 트럼프 행정부 사이가 꽤 가깝다는 점도 주목받습니다. 엘리슨의 최측근이었으며, 지금은 오라클의 CEO를 맡고 있는 사프라 카츠는 트럼프 대통령과 매우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2016년 트럼프 1기 당시 인수위원회에 참가하기도 했으니까요. 물론, 엘리슨 본인도 현재는 트럼프의 주요 후원자로 꼽힙니다. 한때 빌 클린턴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였지만 말이죠.

하지만 이런 돈과 힘의 관계보다 더 매력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오라클의 기술력입니다. 오라클은 원래 데이터베이스 회사입니다. 고객사가 내부적으로 데이터를 모아 관리하고 활용하기 위한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공급하고, 이를 관리하면서 수익을 창출해 왔죠. 그런데 시대가 점점 클라우드 쪽으로 옮겨갑니다. 기업들이 서버를 회사 내에 두지 않고, 외부 데이터 센터로부터 빌려 사용하는 시대가 도래한 겁니다. 데이터 저장과 관리는 물론이고, 컴퓨팅 파워까지 말이죠.

물론, 여전히 많은 회사와 기관들이 클라우드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습니다. 보안의 문제도 있고, 지금까지 유지해 온 업무 시스템과의 충돌 문제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점차 클라우드 쪽의 시장 점유율이 높아지니 오라클도 이에 맞춰 적응해야 했습니다. 다만, 아마존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의 선발주자에 비해 불리한 위치였죠.

여기서 엘리슨의 혜안이 드러납니다. 엘리슨은 AI라는 새로운 수요처를 발견하고 그에 최적화된 데이터 센터를 구상합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클라우드를 ‘헛소리’라 비난했지만, 일단 새로운 시대를 감지하자 빠르게 적응했습니다.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AI 데이터 센터를 위한 기술 확보에 착수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GPU들이 서로 연계하여 연산하는 AI 관련 작업의 특성에 맞춰, GPU 간의 연결 통로를 확 넓히는 방식으로 효율을 높였습니다. 오라클의 클라우드 시스템인 OCI(Oracle Cloud Infrastructure) 고유의 경쟁력을 확보한 겁니다.

20년을 앞지른 상상

AI 데이터 센터는 진입 장벽이 높습니다. 기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돈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 엔비디아의 GPU라는 핵심을 조달해 올 네트워크가 되느냐의 문제기도 하고요. 빅테크들이 이미 시장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가운데 회사의 명운을 걸고 AI 데이터 센터에 베팅할 수 있었던 까닭은 래리 엘리슨이라는, 회사를 강하게 장악하고 있는 리더의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슨은 1944년생입니다. 어린 시절 입양되었고, 보수적인 아버지와 갈등을 빚었다고 합니다. 혹자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이 엘리슨의 동력이라고 분석하기도 하죠.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했지만, 중퇴하고 바로 일을 시작합니다. 컴퓨터라는 신문물에서 미래를 봤기 때문입니다. 1977년 데이터베이스 스타트업 오라클을 창업했고, 1986년에 상장에 성공했습니다. 90년대 초에는 이미 억만장자 명단에 올랐고요.

주변의 충고가 아니라 자신의 직감대로 움직여 성공을 거머쥔 엘리슨은 스스로의 판단에 강한 확신을 드러내곤 합니다. 회사가 어려워질 때마다 적극적으로 주식을 사들였던 것도, 그런 확신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죠. 엘리슨은 오라클이 곧 자기 자신이라면서, 시장에 믿음을 줬습니다. 회사를 강력하게 장악할 수도 있었고요. 그 결과 이사회나 대주주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리스크가 높은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AI 데이터 센터로의 전환처럼 말이죠. 다만, 공격적인 인수 합병을 진행하고,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 등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악인’의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된 부분도 있습니다.

실리콘 밸리의 전설들이 그러하듯, 엘리슨에게도 실패로 남은 혁신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네트워크 컴퓨터(Network Computer, NC)’입니다. 1990년대 중반에 내놓은 상품으로, 관련하여 국내 업체들과도 협력을 논의했습니다. 당시 컴퓨터는 인터넷 연결이 없는 상태에서의 사용이 기본값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프로그램을 디스크에 저장해 뒀다가 필요할 때마다 디스크를 삽입해 프로그램을 실행시켜야 했죠.

엘리슨은 프로그램을 중앙 서버에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만 내려받아 사용하는 방식을 제안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운영체제가 비개방형에 독점적이라 비판하며 개방형, 분산형 시스템을 도입하고자 한 겁니다. 또, TV 등 각종 기기와 연결하여 다양한 멀티미디어 기능을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아이디어도 포함되었습니다.

지금 봐서는 특별한 것 없는 얘깁니다. 많은 프로그램이 클라우드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으니까요. 모바일 혁명 이후로는 엘리슨의 아이디어가 오히려 기본값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엔 인터넷이 대중화하기 전입니다. 통신 속도가 정말 느려도 너무 느렸습니다. 사용자들은 네트워크 컴퓨터라는 기술이 필요한지 인식조차 없었고요. 엘리슨의 아이디어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겁니다.

의심의 여지

이번에는 엘리슨이 시간표를 잘 맞춘 것 같습니다. 생성형 AI는 현재 진행형이고, 오라클은 출발이 늦었지만 따라잡고 있습니다. 다만, 불안 요소는 있습니다.

이번 계약 형태를 보면, 오라클이 일단 AI 데이터 센터를 다 지은 뒤 오픈AI에 임대하는 형식입니다. 즉, 오라클이 먼저 자금을 끌어와야 합니다. 돈을 제때 마련할 수 있을지, 그리고 수익이 창출되기 전까지 비용에 압도되지 않고 프로젝트를 진행할 체력이 되는지 의문이 제기됩니다.

오픈AI도 현재의 매출 규모나 자금 조달 능력 등을 고려할 때 3000억 달러를 전부 지불할 능력이 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오픈AI의 현재 연 매출은 약 130억 달러 수준입니다. 당연히 적자를 보고 있고요.

게다가 기술이 빠르게 변화한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점차 경량 모델의 가능성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당장 다음 달 딥시크의 등장에 버금가는 혁신적인 AI 모델이 발표된다면, 오라클의 투자는 어리석은 베팅이 되어 버립니다.

다만, 엘리슨은 IT 버블의 붕괴로부터도 살아남은 인물입니다. 80세가 넘는 나이에도 생성형 AI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노련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오라클은 AI 시대의 또 다른 주연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솔솔 피어나는 틱톡 인수설까지 현실화한다면 오라클의 존재감은 앞으로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겠죠.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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