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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수 정치 활동가 찰리 커크가
암살된 이후, 소셜 미디어에서 그를 애도한 유명인이 댓글 공격을 받고 글을 삭제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룹 슈퍼주니어 멤버 최시원은 인스타그램에 추모 게시물을 올렸다가 그룹 탈퇴 운동까지 벌어지자 게시물을 내렸습니다. 원더걸스 출신 선예도 커크를 추모하는 글을 게재했다가 논란이 일자 곧바로
삭제했습니다.
애도조차 정치화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애도 가능성(grievability)’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애도의 대상이 되지만, 어떤 사람의 죽음은 애도는커녕 사회적 관심조차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건설 현장 노동자의 죽음이 그렇습니다. 특정 집단의 죽음이 국가와 사회에 의해 무가치로 취급될 때, 그 생명은 애도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원래 버틀러의 논지는 사회적 약자의 죽음을 가시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팔레스타인 민간인, HIV/AIDS 환자처럼 공적 담론에서 쉽게 지워지는 존재들의 죽음 말입니다. 버틀러가 말한 애도 불가능성은 권력 없는 자가 죽음에서조차 배제되는 상황을 겨냥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 보수 인플루언서였던 찰리 커크는 애도 불가능한 삶의 전형은 아닙니다. 커크는 생전에 이미 거대한 주목을 받았고, 죽음 이후에도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커크의 죽음과 애도 논란은 버틀러의 공적 애도 개념을 확장합니다.
커크는 권력이 있었지만, 죽음 이후 진보 진영에서는 애도 불가능한 사람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애도 불가능성이 약자만이 아니라 혐오 받는 권력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버틀러의 틀로 보자면, 커크를 애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적 압력은 결국 누구의 죽음이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선택하는 권력의 작동입니다.
커크처럼 논란이 많은 인물이라 해도, 그의 죽음을 애도한 이들이 곧바로 ‘극우 동조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애도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권력의 작동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차이는 애도의 대상이 약자냐 권력자냐일 뿐입니다. 애도를 검열하는 메커니즘은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사회가 특정 정치적 입장을 이유로 죽음을 애도할 권리 자체를 박탈하는 순간, 이는 생명의 존엄을 정치적 성향에 따라 차등 배분하는 행위가 됩니다. 버틀러가 경계한 ‘폭력과 배제의 정치’입니다. 커크 애도를 금기시하는 문화는 생명 인정의 범주를 협소하게 만드는 폭력입니다.
따라서 커크의 죽음을 애도할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그의 사상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애도의 자유를 권력으로부터 지켜내는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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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를 대표하는 고전 《자유론》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경우를 타인에게 직접적인 해(harm)를 끼칠 때로 한정합니다. 의견은 최대한 자유롭게 말해질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의견이 타인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 행동으로 이어질 때는 제한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컨대 군중 앞에서 “저 사람을 당장 공격하라!”라고 선동해 실제 폭력이 일어나는 경우, 이 발언은 단순 의견이 아니라 행동으로 전환된 표현이어서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죠.
아돌프 히틀러, 도조 히데키 같은 ‘애도 절대 금기’의 범주는 국제법적·역사적 합의에 근거합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를 단순한 전쟁 패배자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범죄자로 규정했습니다. ‘모든 인류의 적(hostis humani generis)’이 된 겁니다.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과 국제형사재판소(ICC)의 법리 역시 집단 학살을 기획하고 지휘한 자들을 인류 공동체 차원에서 단죄합니다.
따라서 히틀러의 죽음을 공적으로 애도하는 행위는 의견 표현을 넘어, 피해자 전체에 대한 모욕이자 역사 왜곡, 그리고 네오나치 부활의 정당화 수단으로 기능할 위험이 있습니다. 히틀러 애도가 공적으로 금지되는 것은 해석상 오해 소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국제법적·역사적 합의가 확정된 ‘직접적인 해’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커크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다릅니다. 커크의 발언과 행보는 반대 진영에서 비판받을 수 있지만, 전 지구적 합의로 ‘인류의 적’으로 규정된 적은 없습니다. 공적 애도를 제한할 근거가 부족합니다. 최시원이 올린 “REST IN PEACE CHARLIE KIRK”라는 표현은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지만, 저 표현이 직접적인 폭행, 차별, 사기 같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피해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밀의 관점에서 원칙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표현입니다.
이주민과 성 소수자 등 일부 집단은 커크의 생전 발언 때문에 직접적 피해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커크를 애도하는 것은 곧 피해자 모욕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밀의 틀에서는 이 경우 역시 직접적 해라기보다는 상징적 모욕 또는 불쾌감입니다. 밀은 불쾌감이나 도덕적 반감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봤습니다. 사회가 특정 의견을 불쾌하다는 이유로 금지하기 시작하면, 공론장의 다양성이 무너지니까요.
애도를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애도를 금기시하는 것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불편함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감내해야 할 부분입니다. 검열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논란의 인물을 히틀러 같은 절대 악의 범주로 끌어들이는 순간, 사회는 금기의 범위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커크, 내일은 또 다른 인물이 ‘애도 불가능자’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정치적 편향에 따라 죽음을 선별적으로 인정하는 사회가 됩니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나는 애도할 수 없더라도, 다른 사람은 애도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애도조차 정치화된 사회는 곧 인간성의 분배조차 권력이 통제하는 사회라는 뜻입니다. 찰리 커크의 죽음을 애도할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그의 정치적 유산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도 불가능성을 강요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에 저항하는 행위이고,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행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