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읽는 법

bkjn review

가치관을 바꾸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과학을 읽는 법

2025년 9월 24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말 그대로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타이레놀입니다. 임신 중 타이레놀을 복용하면 태아의 자폐증 발생 위험을 높인다며,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사용을 극도로 줄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당장 제조사 ‘켄뷰’의 주가는 곤두박질쳤습니다. 지난 7월에는 22달러 수준이었는데, 9월 24일 현재 17달러 수준입니다.

시장의 출렁임은 사실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현장은 대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발열 증상이 있는 임산부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의료진도 타이레놀을 처방하기 부담스러워졌습니다. ‘MAHA(Make America Healthy Again)’의 연장선상입니다. 대안적 건강을 주장하는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Robert F. Kennedy Jr.) 보건복지부 장관의 새로운 작품이죠. 다만, 이 사태는 단순한 괴짜 장관의 실책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 미국이 다시 소환하고 있는 현상을 상징하고 있죠. 과학이 정치의 하인이 되는 현상 말입니다.

스탈린의 유전학

지구상의 생물은 부모의 유전 형질을 물려받습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마찬가지죠. 그런데 이 상식이 ‘부르주아적 발명품’으로 낙인찍혔던 때도 있었습니다. 중세 유럽 어딘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1930년대 소련의 이야기죠. 1921년 혹독한 대기근 이후 레닌은 시장 경제의 원리를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됩니다. 잉여 생산물을 시장에 공급해 기아를 줄이는 정책입니다. 효과가 있었습니다. 남는 농산물이 시장에 나오니 굶는 사람이 줄어들었죠.

하지만 레닌이 사망한 이후 집권한 스탈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부농 계급을 탄압해 청산했습니다. 개인 농가는 묶어서 집단 농장 체제로 전환했고요. 레닌이 도입했던 시장 경제 요소는 완전히 제거하고 곡물은 국가가 거의 모두 거둬들여 배급했습니다. 농촌에서 생산된 자원을 동원해 중공업을 일으키겠다는 경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죠.

이 과정에서 1930년대 초반 대기근이 다시 찾아옵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1932년에서 1933년 사이 수백만 명이 아사했습니다. 하지만 스탈린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제재는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들판에 떨어진 이삭 몇 개만 주워도 중형에 처하거나 사형까지 선고했으니까요. 이 과정에서 스탈린에게 필요한 것은 농촌의 생산성을 급격하게 끌어올릴 과학이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과학은 필요 없습니다. 작년과 달라질 것이 없을 테니까요. 스탈린은 대신 ‘한 생물이 획득한 형질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새로운 과학을 선택했습니다. 겨울 밀 품종도 농부가 정성 들여 잘 가꾸면 더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봄밀 품종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 말입니다.

밀 뿐만 아니라 인간도 적절한 환경에서 교육받고 개조되면 완전히 새로 태어날 수 있다는 이 새로운 과학의 이름은 ‘리센코주의(Lysenkoism)’입니다. 소련의 농학자 트로핌 리센코는 멘델 유전학을 부정하고 획득 형질이 유전된다는 주장을 내세워 소련의 환경에 맞는 새로운 작물을 단기간에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수많은 과학자가 반발했습니다. 하지만 스탈린의 지지를 등에 업은 리센코는 과학적 연구를 근거로 들며 반발하는 이들을 숙청했습니다. 전 세계를 탐사하며 각종 식물 종자를 수집해 연구했던 당대 최고의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와 같은 인재들이 체포되어 갇혔습니다. 많은 수가 굶어 죽었고 처형되어 사라졌죠. 

과학을 향한 숙청은 맹종을 낳습니다. 믿어야 할 교리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정해지고, 그것을 믿기 위한 근거가 차근차근 쌓입니다. 처음엔 반발이 있습니다. 데이터가 다른 말을 하니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목소리를 내는 겁니다. 하지만 숙청 과정을 통해 ‘아닐 리가 없다’라는 믿음이 굳어집니다. 믿음은 편향이 되어 과학을 뒤틉니다. 우리는 그런 역사를 몇 차례 되풀이해 왔습니다.

논문을 읽는 법

백악관은 과학적인 연구에 근거해 타이레놀이 위험하다고 선언했습니다. 주요 연구 중 하나는 2019년 미국에서 진행되었습니다. 1998년부터 10년간 보스턴 지역의 산모들이 분만한 직후, 탯줄 혈액 샘플을 채취했습니다. 그렇게 확보한 약 1000개의 샘플에서 타이레놀 농도를 측정해 상, 중, 하로 나누고, 자폐아 위험도와의 관계를 살폈습니다. 농도가 ‘상’인 그룹의 위험도가 ‘하’인 그룹에 비해 3.62배 높게 나타났습니다. ADHD 위험도도 2.86배 높았고요.

연구 결과대로라면 타이레놀과 자폐 발병은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논문을 끝까지 읽어 봐야겠죠. 모든 연구자가 그렇듯, 이 논문에서도 연구의 한계에 관해 논합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관찰 연구의 한계’입니다. 특정되지 않은 유전적, 환경적 요인이 결과를 교란하는 변수로 작동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를테면 산모가 겪은 ‘고열’ 같은 것입니다. 산모의 발열에 노출될수록 태아의 자폐 위험이 커집니다. 타이레놀을 많이 복용한 산모는 발열도 많이 경험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원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죠. 추가 연구가 필요합니다.

미국 보건 당국이 직접 언급한 연구는 2025년 8월 발표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발표된 관련 연구 46개를 다시 검토했고, 그중 27개가 타이레놀 복용과 어린이의 신경 발달 장애 발생 사이의 연관성을 확인한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타이레놀이 여전히 산모의 발열과 통증을 치료하는 데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또, 이 연구 또한 관찰 연구의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했고요.

한편, 최근 학계에서 주로 인용되는 대규모 연구도 있습니다. 2024년 스웨덴의 연구는 250만 명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가족을 비교했습니다. 한 어머니가 타이레놀을 복용하고 낳은 아이와 복용하지 않고 낳은 형제자매를 비교했습니다. 자폐증 및 ADHD 발병률에 타이레놀이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고요. 물론 이 연구도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타이레놀을 처방받아 구입하지 않았더라도, 산모가 다른 경로로 타이레놀 성분을 섭취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 논문 모두 과학적인 방법으로 작성된 훌륭한 연구 결과물입니다. 문제는 어떤 논문을 어떻게 읽을 것이냐에 달려 있죠. 결론적으로, 아직 진실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거짓을 덜어낸 진술일 수 있겠습니다. 사실, 타이레놀이 어떤 기전으로 진통 효과를 내는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관련 연구가 속속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설은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나온 관련 연구를 바탕으로 학계에서 내놓은 대체적인 입장은 ‘타이레놀과 자폐 위험성 간의 명확한 인과관계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계 태아 모체 의학회는 백악관의 성명에 바로 반박했고, WHO와 유럽의약품청(EMA)도 마찬가지고요.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산모의 고열이 태아의 자폐 위험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이레놀 성분의 대체재로 꼽히는 엔세이드(NSAIDs) 진통제는 명확한 위험이 있습니다. 임신 초기에는 유산 위험이 증가하고 임신 후기에는 태아의 혈관을 막을 수 있습니다. 결국, 타이레놀을 복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백악관의 과학

백악관이 타이레놀을 정조준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미국에서 자폐 스펙트럼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2000년 기준 아동 150명 중 1명꼴로 발생했지만, 최근에는 31명 중 1명으로 발생률이 3배로 뛰었습니다. 부모들의 불안이 깊어질 만합니다. 이 불안을 거대 제약사를 향한 비난으로 바꾸면 보건 당국이 받아야 할 화살의 방향을 돌릴 수 있겠죠. 물론, 전문가들은 이러한 데이터의 배경에 예전보다 발달한 진단 기술과 인식의 확대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1년 2개월 여 남은 중간 선거를 앞두고 표 결집을 시도하고 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케네디 주니어 장관 취임 이후 미국에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예방접종 축소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플로리다주에서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백신 의무 접종이 실제로 폐지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미국 전역을 놓고 볼 때 케네디 주니어 장관을 지지했던 MAHA의 핵심, 반백신 세력이 만족할 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타이레놀이라는 쉽고 거대한 이슈를 건드려 MAHA를 MAGA로 끌어들이기 위한 포석을 뒀다는 겁니다.

실제로 케네디 주니어 장관의 측근인 토니 라이온스는 트럼프 대통령을 가리켜 ‘자폐 대통령’이라며 강한 지지를 표시했습니다. 보건 의료 문제가 심각한 미국에서는 다국적 제약사와 보건 관료 등에 불신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의 상당수는 MAHA의 지지 세력이고요. 이들의 신념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이들의 지지가 온전히 트럼프 행정부의 것이 됩니다. 즉, 이번 사태는 정치가 유권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유권자의 신념을 과학이라 선포하는 과정이었던 겁니다.

게다가 타이레놀의 제조사인 켄뷰는 존슨앤존슨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회사입니다. 현재 대주주는 존슨앤존슨이고요. 글로벌 대형 제약사죠. 트럼프 행정부는 약값이 너무 비싸다며 제약사들을 상대로 관세 위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미국의 보건 의료 시스템은 고칠 수 없어도, 미국 정부가 제약사에 직접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줌으로써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기회를 노린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 내부에서도 이번 발표가 너무 빨랐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시간표대로라면, 9월 29일 문헌 검토 보고서가 발표된 후 내년부터 초기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순서였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과학의 시간을 기다릴 인내심이 없었습니다. 케네디 주니어 장관은 9월 말까지 자폐증의 원인을 규명하겠다고 약속했고, 트럼프는 그보다 더 성급히 타이레놀을 겨냥했습니다.

이번에는 과학을 오독하는 방법이었지만, 다음은 21세기 자본주의 방식의 ‘숙청’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주장과 상반되는 연구에 대해 ‘돈줄’을 끊어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정부가 직접 지원하던 연구는 예산을 삭감하면 됩니다. 또, 각종 재단 등의 비영리 단체가 어떤 연구, 어떤 시민운동을 지원하는지 검토하고 정부의 기조와 맞지 않을 때는 세금 혜택을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501(c)(3) 자격’이라 하는데, 재단에 대한 세금 혜택은 물론 기부자들이 기부금에 대한 세금 감면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이걸 정부가 취소해 버리면 됩니다.

상식을 뒤집고 가치관을 바꾸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모호한 과학을 명료한 레토릭으로 덮으면 됩니다. 과학을 힘으로 비틀어 원하는 메시지만 남겨 들려주면 됩니다. 한동안 정치는 과학 위에 군림하기를 피해 왔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합니다. 타이레놀은 참으로 명확한 메시지입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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