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가 개봉했습니다. 영화 소개 글의 앞부분을 옮깁니다.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삶에 만족하던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 ‘만수’(이병헌). 아내 ‘미리’(손예진), 두 아이, 반려견들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만수는 회사로부터 돌연 해고 통보를 받는다. ‘미안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목이 잘려 나가는 듯한 충격에 괴로워하던 만수는, 가족을 위해 석 달 안에 반드시 재취업하겠다고 다짐한다.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1년 넘게 마트에서 일하며 면접장을 전전하고, 급기야 어렵게 장만한 집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무작정 ‘문 제지’를 찾아가 필사적으로 이력서를 내밀지만, ‘선출’(박희순) 반장 앞에서 굴욕만 당한다.”
중년 재취업은 청년 취업만큼 어렵습니다. 한 직장에서 20년 넘게 쌓아 온 전문성이 회사 문을 나오는 순간, 이토록 볼품없는 것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나는 다를 줄 알았는데, 면접장을 전전하며 나도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습니다. 여기에다 가장의 무게까지 더해지면 더 서러워집니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옛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서로의 화려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도 이 무렵입니다. 다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가 있다
어쩔 수가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국정을 조율하고 예산을 주무르고 민간을 감독하던 기관과 부서에서 일하던 고위 공무원입니다. 대통령비서실, 검찰청, 경찰청, 국무조정실, 감사원,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같은 곳들입니다. 여기서 일했던 고위 공무원들은 다음 자리를 골라서 갑니다.
당장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그랬습니다. 2007년에 총리를 한 번 지내고 퇴임했다가, 2022년 윤석열 정부에서 총리로 다시 지명되기 전까지 김앤장에서 고문으로 일했습니다. 연봉은 4억 원이 넘었죠. 총리가 앞장서니 장차관도 잘 따라갑니다. 퇴임한 대법관이 대형 로펌에 가는 일도 드물지 않고요. 심지어 대법관 인사 청문회에서 “퇴임한 뒤에는 공익적 활동을 하겠다”고 약속하고는 퇴임 후에 로펌으로 간 대법관도 있습니다.
퇴직 공무원도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다만 기업과의 부정한 유착 고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취업이 제한됩니다. 4급 이상 공무원은 원칙적으로 퇴직일로부터 3년간 ‘취업 심사 대상 기관’에 취업할 수 없습니다. 대기업, 로펌, 회계법인, 세무법인 같은 곳들입니다. 전관예우를 막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조항에는 단서가 달려 있습니다. 공직자윤리위원회로부터 퇴직 공무원이 퇴직 전 5년간 소속했던 부서 또는 기관의 업무와 취업하려는 기관 간에 밀접한 관련성이 없다는 확인을 받거나 취업 승인을 받으면 취업할 수 있습니다. 퇴직 공직자 취업 제한 제도의 취지를 살리면서 직업 선택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그런데 이 심사가 너무 관대합니다. 최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경제 관련 8개 정부 부처의 퇴직 공직자 취업 심사 승인율을 분석했더니, 10명 중 9명은 업무 관련성이 있는 기업에 재취업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 심사가 사실상 형식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은 매년 되풀이됩니다. 국정감사 단골 소재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공직자윤리위원회는 취업 심사 대상자들의 지난 10년간 취업 이력을 매년 6월 30일에 공직윤리시스템 웹사이트에
공시합니다. 2025년 6월 30일에 공개된 자료를 보면, 3391명의 취업 이력이 나옵니다. 대통령비서실에 있다가 로펌으로 가고, 국세청에 있다가 회계 법인으로 가고, 교육부에 있다가 대학교 부총장으로 가고, 금융감독원에 있다가 저축은행 사외 이사로 갑니다.
어쩔 수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해법은 늘 같습니다. “더욱 강력한 취업 심사가 필요하다”입니다. 동의합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밀접한 업무 관련성’이 있는지만 살펴보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컨대 취업 심사 대상자가 공정거래위원회에 재직할 때 담당했던 기업이 아니니, 가도 된다는 식이니까요. 이러니 매번 뒷말이 나옵니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취업 제한 기간에 이전 조직의 목적과 퇴직자의 사후 행위 간의 정합성을 살피는 방향으로 취업 심사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공직 조직은 국민 세금과 권한을 위임받아 공익적 목적을 수행합니다. 퇴직 후 행위가 이 목적과 일관된다면 사회적 신뢰에 문제가 없습니다. 공익적, 학문적, 교육적 전직 통로라면 오히려 적극 지원해야겠죠.
국세청 고위 공무원이 대학의 세무학 교수로 자리를 옮긴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국세청의 목적은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해 공공 재원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세무학은 회계와 세무, 재경 분야의 전문가 양성을 목표로 하는 학과입니다. 전직 후에도 이전 조직의 기본 미션과 개인의 직업적 행위가 충돌하지 않습니다. 이 경우에는 개인의 자유로운 직업 이동이 사회적 신뢰를 해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회계 법인이나 기업의 세무 고문으로 옮기는 경우는 다를 수 있습니다. 회계 법인의 수익 모델 중 하나는 합법적 절세 전략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공격적 세무 설계까지 합니다. 기업의 세무 고문은 탈세 방어 전략을 짤 수 있습니다. 즉 전직자의 전문성이 세수 확보라는 공공 목적에서, 세수 최소화라는 정반대 방향으로 사용됩니다. 이전 조직의 목적에 대한 배신입니다.
다른 사례를 볼까요. 군 장성은 전역하고 민간 방산업체로 많이들 갑니다. 군의 목적 중 하나는 국가 안보를 위해 무기 구매와 운용을 최적화하는 것입니다. 방산업체의 목적은 무기 판매와 이윤 극대화입니다. 군 출신이 방산업체 고문으로 가면, 국방의 공적 목적과 사적 이윤 추구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고위 공무원이 제약사 고문으로 가는 것 역시 식약처의 목적과 제약사의 목적이 충돌하는 경우입니다.
퇴직 공직자가 공직 재임 중에 축적한 전문성과 네트워크가 그 공직의 미션에 반하는 목적을 가진 사기업에 이전되면, 단순한 경력 활용이 아니라 공익적 목적의 전도가 될 수 있습니다. 공무원 출신에게도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공무원은 임용될 때 국가와 국민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는 직업 윤리를 수용하고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퇴직 후에도 공익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직무에는 일정 부분 제한이 합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직업 자유 제한이 아니라 공직 수행의 ‘연장된 책임’으로 봐야 합니다. 군 고위 장교나 정보기관 직원은 퇴직 후에도 일정 기간 국가 안보 관련 기밀 유지 의무를 법적으로 집니다. 의사나 변호사는 면허를 반납해도, 재직 중 취득한 환자 기록이나 고객 정보는 비밀 유지 의무가 영구적으로 남습니다. 직업이 바뀌더라도 과거 역할의 윤리적 책임은 지속되는 전형적 사례입니다.
정리하면, ‘전직하려는 직무가 몸담았던 공직 조직의 목적에 반하는가 아닌가’가 퇴직 공직자 취업 심사의 첫째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규제가 형식적, 행정적 절차가 아니라 철학적, 개념적으로 일관된 기준을 갖게 됩니다. 시민은 납득할 수 있고, 공직자도 본질을 이해하게 되고, 기업계에서도 ‘전관=힘’이라는 등식이 깨집니다.
저는 이 방식이 ‘밀접한 업무 관련성’을 따지는 것보다 철학적 정당성이 뚜렷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익 목적 정합성 원칙은 전관예우 규제를 도덕적 비난이나 단순한 금지 기간 수준에서 끌어올려, 조직의 목적과 퇴직자의 사후 행위의 정합성 여부를 기준으로 삼는 접근입니다. 이 원칙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지 않으면서도 공익에 대한 배신적 이동을 합리적으로 규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