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SA 임시 국장의 업무 지침
기자 회견장에서 달뜬 얼굴로 화성 탐사의 성과를 발표한 인물은 숀 더피 미국 교통부 장관입니다. 2025년 7월부터 공석인 NASA 국장 자리를 임시로 맡고 있습니다. 이례적인 일입니다. 언뜻 생각해도 교통부 장관과 NASA 국장의 일 사이에 어떤 공통 분모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차피 더피는 교통 전문가 출신도 아니거든요. 검사 출신으로 공화당 하원 의원을 지냈고, 폭스 뉴스에서 방송 진행자로 활동했죠. 한마디로, 트럼프가 아끼는
스피커란 얘깁니다.
더피가 NASA의 임시 국장 자리를 맡고 벌인 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달에
원자로를 건설하겠다는 긴급 계획을 발표한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느껴지지만, 이유를 들여다보면 이해가 됩니다. NASA는 아르테미스 프로그램을 통해 우주인을 다시 달에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 당시 일이 진행되었지만, 기틀을 잡은 것은 트럼프 1기 행정부입니다. 트럼프가 다시 사람을 우주에 보내기로 한 이유는 과학의 발전이나 인류의 번영 같은 것이 아닙니다. ‘중국’ 때문입니다.
트럼프 시대 공공의 적은 중국입니다. 지지 기반을 공고히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절대 중국에 밀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겠죠. 1957년 10월 4일은 미국이 구소련에 뒤처진 날이었습니다. 스푸트니크 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2030년까지 달에 기지를 건설할 계획입니다. 러시아 등과 협력하에 미국보다 먼저 달을 정복하고자 하는 겁니다. 기지를 건설하게 되면 깃발을 꽂고 돌아오는 식의 달 탐사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땅을 발견했어도, 그곳에 성을 짓고 사람이 정착해야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겠죠. 달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기지 건설과 함께 달에서 또 다른
영토 분쟁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기지를 건설해 운영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낮과 밤이 각각 14일씩 지속되는 달에서 태양광 발전은 효율이 떨어지고요. 그러니 원자로 건설은 달 정복의 기본 전제입니다. 적어도 현재까지의 기술로는 그렇습니다. 실제로 더피가 내놓은 ‘달 표면 원자로 지침’에는 ‘달에 원자로를 처음으로 갖게 되는 국가가 미국에 출입 금지 구역을 선포할 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출입 금지’ 팻말을 달에서 만나지 않으려면 달 기지 건설을 서둘러야 하고, 이를 위해 원자로 건설이 급선무라는 얘깁니다. 이제 NASA의 임무는 중국보다 앞서 나가는 것입니다.
America First in Space
NASA의 새로운 임무는 지난 8월
공식화했습니다. 국가 안보 기관 목록에 NASA가 추가된 겁니다. 이를 두고 노조와의 갈등을 돌파하려는 방법이라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이 목록에 들어간 기관의 노조와는 적극적으로 협의할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NASA는 일종의 민간 외교 사절의 역할을 해 왔습니다. 우주에 관한 국제 공동 연구를 이끌며 전 세계 우주 과학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도 아르테미스 프로젝트 등에 함께 참여하고 있죠.
하지만 트럼프가 생각하는 미국의 나아갈 길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 일종의 ‘경찰 국가’ 역할을 하면서 남의 나라 전쟁에 돈을 쓰는 것은 빠르게 중단되어야 할 낭비라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니까요. 우크라이나 전쟁도, NATO 방위비 분담도, 심지어는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도 그 기조에 따라 흔들고 뒤틀고자 합니다.
과학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의 미래나 학문의 발전 같은 것은 미국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NASA가 돈을 쓴다면 그 열매는 미국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NASA는 국가 안보 기관으로 기능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달을 중국으로부터 지키고 미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일 같은 것입니다. 또, NASA의 연구 결과도 국가 안보 활동의 결과이니 학계에 널리 공유하는 손해 볼 일은 하지 않아야 할 테고요.
문제는 돈입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이미 과학 연구 관련 예산을 삭감하고 있습니다. 과학을 미워해서는 아닙니다. 진짜로 미국 정부가 쪼들려서 그렇습니다. NASA의 2026년도 예산안도 전년 대비 약 25퍼센트 깎였습니다. 그런데 달에 원자로를 중국보다 빨리 건설하려면 돈이 듭니다. NASA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른 프로젝트는 중단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이미 4000명에 가까운 인력이
해고당했습니다.
트럼프의 높은 성
상황이 이렇다 보니, 화성 표면 여기저기에 놓인 샘플들을 지구로 다시 가져올 수 없게 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의식도 강해졌습니다. 원래는 그 샘플을 지구로 운송하는 데에 50억 달러 정도의 예산을 예정했습니다. 하지만 일정은 늘어지고 비용은 치솟아 이제 110억 달러 수준이 들 것으로 추정됩니다. 4000명을 해고하는 조직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비싼 비용입니다. 엄청난 과학적 발견을 하고도 구체적인 분석을 할 수 없게 된 것이죠.
사실, 트럼프 행정부는 화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화성에 빨리 사람을 보내고 싶어 하죠. 중국이 달이나 태양계 바깥에 집중하고 있으니, 미국은 화성을 먼저 차지하겠다는 겁니다. 일론 머스크와 트럼프의 동맹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입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깎여 나간 2026년도 NASA 예산안에서 유일하게 예산이 증액된 분야가 ‘유인 화성 탐사’입니다. 그리고 이 계획이 실현된다면 사람이 가서 샘플을 가져오면 된다는 것이 트럼프 진영의
발상이고요.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 싼 가격에 샘플을 가져다준다면 NASA가 마다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번 기자 회견이
돈 때문에 엄청난 연구를 우주로 날려버릴 위기에 처한 NASA의 궁여지책이라는 시선도 있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더피가 일종의 시그널을 보낸 겁니다. 이 문제를 누군가 해결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신호 말이죠. 그리고 그 신호를 누군가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동안 스페이스X에 밀려 NASA의 우주 프로젝트에서 지분이 깎이고 있던
록히드 마틴 얘기입니다. 제시한 가격은 30억 달러 수준입니다.
이제 우주는 인류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이 싸움에서 이기는 누군가의 높은 성입니다. 트럼프는 이 새로운 정복 전쟁에서 승리할 생각입니다. 물론, 그 전쟁에서 손해를 볼 생각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