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주크만, 마크롱

bkjn review

프랑스를 세 사람이 흔들고 있습니다.

니콜라, 주크만, 마크롱

2025년 10월 14일

2025년 9월 8일 프랑스의 프랑수아 바이루 전 총리가 축출당했습니다. 프랑스에 ‘진실의 순간’이 도래했다고 선언하며 과감한 재정 긴축안을 밀어붙인 결과입니다. 복지는 줄이고 일은 더 하자는 안이었습니다. 특히 연금 관련 예산 삭감과 공휴일 이틀 축소가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총리가 물러났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안 그래도 예정되어 있던 ‘국가 봉쇄의 날(Bloquons tout, 모든 것을 봉쇄하자)’이 더욱 거세게 불타올랐습니다. 전국적으로 8만 명의 경찰이 배치되었지만, 분노한 시위대는 도로를 봉쇄하고 곳곳에서 방화를 저질렀죠.
시위대의 흥분은 아직도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는 미궁에 빠졌습니다. / 출처: Le Monde
하지만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생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프랑스의 연간 재정 적자는 GDP의 5.8퍼센트를 기록했습니다. 유로존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누적된 국가 부채는 GDP 대비 113.9퍼센트에 달합니다. 우리 돈으로 약 5500조 원 규모인데, 유로화 블록에서 그리스와 이탈리아에 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공 지출 규모가 크기 때문입니다. 복지에 쓰는 돈이 많다는 얘깁니다. 이미 프랑스의 국가 신용도는 강등되었습니다. 쓰는 돈은 줄이고, 버는 돈을 늘려야 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의 이유입니다.

실제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바이루 전 총리가 의회에서 불신임을 당한 직후 측근인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전 국방부 장관을 신임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예산 감축을 밀어붙이겠다는 겁니다. 르코르뉘 총리의 임무는 이 문제를 야당과 협상으로 푸는 것이었습니다. 야당도 새로운 총리와 협상 테이블에 일단 앉겠다는 입장이었고요.

하지만 신임 총리가 구성해 온 내각 구성부터 반발을 샀습니다. 재정 파탄과 정치 붕괴의 책임을 져야 할 현직 장관 대부분이 유임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엄청난 부채 증가의 책임을 져야 할 전 재무 장관이 국방 장관으로 복귀하는 식입니다. 야당 지도자들은 ‘애처롭다’, ‘서커스 같다’라며 어이없어했죠.

상황은 점점 더 막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반발이 거세지자, 신임 총리는 2025년 10월 6일 사직했습니다. 임명 27일 만입니다. 현대 프랑스 역사상 최단기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사표를 던진 총리를 대통령이 나흘 만에 다시 임명합니다. 마크롱 대통령도 더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겁니다.

지금 프랑스는 혼돈 그 자체입니다. 산발적인 시위가 끊이지 않고 정부는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시민들의 불만도 통제 가능한 수준이 아닙니다. 그 중심에는 21세기 프랑스를 대표할 만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니콜라

니콜라를 소개합니다. 40대의 프랑스인입니다.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했죠.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며 성실히 납세의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연금 혜택을 누리고 있는 베이비붐 세대를 위해 세금을 냅니다. 정작 자신은 은퇴 후에 그만한 연금을 받을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알면서 말이죠. 급여 명세서에 적인 각종 세금 항목을 보니, 평생 가볼 일도 없을 것 같은 해외 국가를 지원하는 데에 내 월급이 나갑니다. 이민자를 지원하기 위한 비용도 자신이 내는 세금으로 충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TV를 틀었더니 총리가 선언합니다. 국가 재정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휴일을 줄이겠다고 말이죠.

지금 프랑스 시민들의 최고 유명 인사를 꼽자면 아마도 ‘니콜라(Nicolas)’일 겁니다. 니콜라가 누군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본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2025년 4월 29일, 니콜라는 프랑스 국회에 등장했습니다. 한 우익 정치인이 예산부 장관을 질타하면서, 니콜라가 ‘강탈당하고 있다’라고 주장한 겁니다. 니콜라는 프랑스의 중산층, 정확히는 백인 중산층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니콜라는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덜 놀고 더 일했습니다. 하지만 니콜라는 ‘유리 천장’을 뚫기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프랑스가 ‘실력주의’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하소연합니다. ‘C’est Nicolas qui paie(돈을 내는 건 니콜라야)’라는 구호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리 천장’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이나 소수 인종, 장애인 등이 주로 백인 남성으로 규정되는 주류 집단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현실을 지칭했던 용어입니다. 하지만 니콜라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용어를 백인 중산층에 대한 역차별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합니다. 즉, 이들이 주장하는 ‘세금 불평등’이야 말로 니콜라를 좌절시키는 유리 천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세금 불평등은 사실 고전적인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부의 재분배’죠. 더 버는 사람에게 더 걷어 사회적 격차를 줄입니다. 그리고 이 이상적인 모델을 프랑스 정부는 지금까지 잘 구현해 왔습니다. 프랑스 시민들도 이 사회 계약에 기꺼이 동의했죠. 그런데 이게 너무 잘 구현되다 보니 에러가 발생했습니다. 임금 노동자가 소득의 절반가량을 세금으로 내고 나면 연금 생활자보다 손에 쥐는 돈이 오히려 더 적습니다.
니콜라 프레임은 유권자가 몰입하기 쉬운 인물적 서사를 활용해 피해의식을 확산하는 도구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 출처: Radio France
마크롱

기형적으로 보이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1970년만 해도 프랑스의 실질적인 은퇴 연령은 68세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남성의 평균 사망 연령도 68세였고요. 즉, 당시엔 연금을 받을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프랑스에서는 62세부터 연금을 수령할 수 있습니다. 실질적인 은퇴 연령입니다. 평균적으로 약 25년 정도 연금을 받습니다.

프랑스의 사회보장 제도는 정권을 거듭하면서 더 촘촘해지고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죠. 프랑스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이 부를 적극적으로 재분배하는 사회 계약에 찬성했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수명은 늘어나고 성장률은 줄어듭니다. 고령화, 저성장 시대에는 20세기에 설계된 복지 제도를 정부 재정이 감당하기 힘듭니다.

여기서 ‘니콜라가 돈을 낸다’라는 프레임이 등장합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 좋은 직장에 들어갔는데 정작 월급 실수령액은 적습니다. 세금으로 절반을 ‘뜯기기’ 때문입니다. 타깃은 연금 생활자와 이민자, 해외 원조 등입니다. 우익 정치인을 중심으로 이 프레임이 강조되고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프랑스의 백인 중산층을 ‘호구’ 삼아 프랑스 정부가 ‘평등’과 ‘박애’를 실천하고 있다는 겁니다. 한 극우 언론인은 ‘니콜라가 돈을 낸다’(Nicolas qui paie)는 캐치프레이즈를 상표 등록까지 했습니다.

현재의 경제 상황과 맞지 않는 복지 정책이 재정을 악화시키고, 그 결과 정권을 흔드는 모양새입니다. 그래서 마크롱 대통령은 복지를 축소해 재정 지출을 줄이고자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연금을 64세부터 받자는 정책입니다. 연금 개혁이죠. 쉽지 않은 아젠다입니다. 연금 제도가 잘 돌아가면 개혁할 이유가 없습니다. 보통 삐걱거리니 개혁에 돌입합니다. 더 내거나 덜 받는 식이죠. 프랑스는 후자가 되겠고요.

하지만 시민들은 물론이고 전 총리, 전 경제 관료 등이 나서 연금 개혁을 중단하라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마크롱에 우호적인 인사들도 일단 ‘보류’하고 다시 생각하자고 합니다. 외부에서 보기엔 좀 철없어 보입니다. 재정이 파탄 나게 생겼다는데, 2년 더 일하는 게 그렇게 문제인가 싶죠. 그런데 반발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정부 재정 파탄의 진짜 이유가 늘어난 지출이 아니라 줄어든 수입에 있다고 보는 겁니다. 마크롱 정부가 추진했던 ‘부자 감세’ 때문에 이 사달이 났다는 시각이죠.

마크롱은 프랑스의 대형 투자은행인 로스차일드(Rothschild & Cie)에서 임원으로 근무했던 인물입니다. 2012년 네슬레가 화이자의 유아식 부분을 인수했던 거래를 성사하면서 업계에서 명성을 얻었죠. 이후 경제 관료로 정계에 입문한 뒤 얼마 안 되어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즉, 마크롱은 정치인이기도 하지만, 투자가로서의 수완으로도 꽤 인정받았던 인물입니다. 지금도 프랑스 내에서는 ‘은행가 대통령(président banquier)’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마크롱이 내세운 경제 정책은 많은 부분이 친기업적 노선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부유세를 개혁하면서 금융 자산에 대한 과세를 폐지하고 부동산에만 과세하도록 했습니다. 법인 세율도 33퍼센트대에서 25퍼센트 수준으로 낮췄고요. 배당이나 이자 등 자본 소득에 대해서도 감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부자 감세가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마크롱에게도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정책으로 큰 기업들이 프랑스에서 계속 사업을 하기를 바란 겁니다. 되도록 오픈AI와 같은 새로운 스타트업도 많이 생겨 유니콘으로 성장하기를, 더 많은 부자들이 프랑스에서 여생을 보내며 더 많은 소비를 하기를 바란 것이죠. 마크롱은 부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이 프랑스의 산업을 살릴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주크만

현재 140억 달러의 가치를 인정받는 프랑스의 AI 스타트업 ‘미스트랄’의 공동 창업자인 아르튀르 멘슈는 얼마 전 TV에 출연해 자신의 자산이 일종의 ‘가상 자산’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니콜라와 함께 지금 프랑스를 흔들고 있는 또 다른 이름, ‘주크만 세금(Zucman Taxes)’ 때문입니다.
미스트랄은 프랑스판 오픈AI로 평가 받습니다. / 출처: France Info
가브리엘 주크만은 1986년생의 젊은 경제학자입니다. 《21세기 자본》으로 잘 알려진 토마 피케티의 제자입니다. 2025년 현재, 어쩌면 피케티보다 더 영향력이 막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크만이 주장하고 있는 부유세 때문입니다. 1억 유로(약 1억 1700만 달러) 이상의 재산에 매년 2퍼센트의 세금을 부과하자는 겁니다. 주크만은 이렇게 하면 연감 150억에서 250억 유로의 세수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니콜라가 우파의 이름이라면, 주크만은 좌파의 이름입니다.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정치인 일부는 마크롱 정부의 2026년 예산안 협상에 응하는 조건으로 주크만 세금의 도입을 내걸고 있습니다. 거리로 나선 시민 중 많은 숫자가 주크만 세금을 요구합니다. 마크롱의 경제 정책과는 정반대로 가자는 얘기죠.

그래서 미스트랄의 창업자가 굳이 자신이 세금을 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 겁니다. 주크만의 주장대로라면 멘슈도 세금을 내야 합니다. 미스트랄의 지분을 들고 있으니, 자신도 과세 대상이 되겠지만, 그 지분 가치는 기업의 미래에 투자된 돈일 뿐입니다. 많은 스타트업의 기업 가치가 그러하듯 말입니다. 지금 당장 멘슈의 은행 계좌에는 그만한 돈이 없습니다. 

언론에 모습을 잘 비추지 않는 LVMH의 회장 베르나르 아르노도 주크만 세금은 “프랑스 경제를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크만의 주장은 경제적인 논쟁이 아니라 정치적 공격일 뿐이고, 학술적인 제안이 아니라 이념에 기반한 공격이라고 몰아붙였죠.

르펜

결국 지금 프랑스에서는 물러설 수 없는 마크롱의 좌우에 니콜라와 주크만이 버티고 서 있는 상황입니다. 어느 쪽이든 마크롱에게 반대합니다. 니콜라는 저소득 계층이나 이민자를 지원하는 ‘착한 지출’을 줄이라고 주장합니다. 주크만은 부자에게 세금을 걷으라고 합니다. 양쪽 다 복지를 축소하는 건 답이 아니라고 하죠.

프랑스의 의회 구성도 지금 이와 비슷합니다. 좌파와 극우를 포함한 우파, 그리고 마크롱의 중도 연합의 의석수가 비슷하게 분포되어 있어 어느 한쪽이 주도하기 힘듭니다. 다만 마크롱과 반마크롱의 구도는 명확합니다. 1대 2죠. 마크롱 대통령의 임기는 2027년 3월까지입니다. 이대로라면 정권 교체는 확실합니다. 어쩌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직을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르죠.

마크롱의 다음이 니콜라가 될지, 주크만이 될지는 아직 모릅니다.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이 최근 선전하고 있으니, 니콜라가 될 가능성이 조금 더 높긴 합니다. 다만 어느쪽이든, 유로존과 세계 경제에 무시 못 할 여파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전 세계의 니콜라와 주크만에게 아주 중요한 시그널이 될 겁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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