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생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프랑스의 연간 재정 적자는 GDP의 5.8퍼센트를
기록했습니다. 유로존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누적된 국가 부채는 GDP 대비 113.9퍼센트에 달합니다. 우리 돈으로 약 5500조 원 규모인데, 유로화 블록에서 그리스와 이탈리아에 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공 지출 규모가 크기 때문입니다. 복지에 쓰는 돈이 많다는 얘깁니다. 이미 프랑스의
국가 신용도는 강등되었습니다. 쓰는 돈은 줄이고, 버는 돈을 늘려야 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의 이유입니다.
실제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바이루 전 총리가 의회에서 불신임을 당한 직후 측근인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전 국방부 장관을 신임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예산 감축을 밀어붙이겠다는 겁니다. 르코르뉘 총리의 임무는 이 문제를 야당과 협상으로 푸는 것이었습니다. 야당도 새로운 총리와 협상 테이블에 일단 앉겠다는 입장이었고요.
하지만 신임 총리가 구성해 온 내각 구성부터 반발을 샀습니다. 재정 파탄과 정치 붕괴의 책임을 져야 할 현직 장관 대부분이 유임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엄청난 부채 증가의 책임을 져야 할 전 재무 장관이 국방 장관으로 복귀하는 식입니다. 야당 지도자들은 ‘애처롭다’, ‘서커스 같다’라며 어이없어했죠.
상황은 점점 더 막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반발이 거세지자, 신임 총리는 2025년 10월 6일 사직했습니다. 임명 27일 만입니다. 현대 프랑스 역사상 최단기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사표를 던진 총리를 대통령이 나흘 만에 다시 임명합니다. 마크롱 대통령도 더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겁니다.
지금 프랑스는 혼돈 그 자체입니다. 산발적인 시위가 끊이지 않고 정부는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시민들의 불만도 통제 가능한 수준이 아닙니다. 그 중심에는 21세기 프랑스를 대표할 만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니콜라
니콜라를
소개합니다. 40대의 프랑스인입니다.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했죠.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며 성실히 납세의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연금 혜택을 누리고 있는 베이비붐 세대를 위해 세금을 냅니다. 정작 자신은 은퇴 후에 그만한 연금을 받을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알면서 말이죠. 급여 명세서에 적인 각종 세금 항목을 보니, 평생 가볼 일도 없을 것 같은 해외 국가를 지원하는 데에 내 월급이 나갑니다. 이민자를 지원하기 위한 비용도 자신이 내는 세금으로 충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TV를 틀었더니 총리가 선언합니다. 국가 재정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휴일을 줄이겠다고 말이죠.
지금 프랑스 시민들의 최고 유명 인사를 꼽자면 아마도 ‘니콜라(Nicolas)’일 겁니다. 니콜라가 누군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본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2025년 4월 29일, 니콜라는 프랑스 국회에 등장했습니다. 한 우익 정치인이 예산부 장관을 질타하면서, 니콜라가 ‘강탈당하고 있다’라고 주장한 겁니다. 니콜라는 프랑스의 중산층, 정확히는 백인 중산층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니콜라는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덜 놀고 더 일했습니다. 하지만 니콜라는 ‘
유리 천장’을 뚫기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프랑스가 ‘실력주의’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하소연합니다. ‘C’est Nicolas qui paie(돈을 내는 건 니콜라야)’라는 구호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리 천장’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이나 소수 인종, 장애인 등이 주로 백인 남성으로 규정되는 주류 집단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현실을 지칭했던 용어입니다. 하지만 니콜라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용어를 백인 중산층에 대한 역차별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합니다. 즉, 이들이 주장하는 ‘세금 불평등’이야 말로 니콜라를 좌절시키는 유리 천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세금 불평등은 사실 고전적인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부의 재분배’죠. 더 버는 사람에게 더 걷어 사회적 격차를 줄입니다. 그리고 이 이상적인 모델을 프랑스 정부는 지금까지 잘 구현해 왔습니다. 프랑스 시민들도 이 사회 계약에 기꺼이 동의했죠. 그런데 이게 너무 잘 구현되다 보니 에러가 발생했습니다. 임금 노동자가 소득의 절반가량을 세금으로 내고 나면 연금 생활자보다 손에 쥐는 돈이 오히려 더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