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음악을 아직도 듣는다면

bkjn book review

실패가 없으면 좋은 의미의 놀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음악에 매료되셨나요? 혹은 언제 음악으로부터 멀어지셨나요? 개인차가 있겠습니다만, 스포티파이의 데이터를 토대로 한 분석에 따르면 우리는 보통 10대 시절에 사랑했던 음악을 가장 많이 듣는다고 합니다. 특히 13~16세 당시에 들었던 음악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요. 호르몬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하는 사춘기 시절의 취향이 평생 듣는 음악을 결정한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 맞는 얘기 같습니다. 저도 그즈음 들었던 〈전영혁의 음악 여행〉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일생 듣고 있는 음악의 대부분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렇게 ‘유행가’라고 분류되는 음악은 한 사람의 청춘을 상징하는 동시에 한 세대의 문화적 공감각을 형성합니다.

김현식, 조동진, 들국화, 봄여름가을겨울, 어떤날, 시인과 촌장, 푸른하늘, 박학기, 장필순, 한영애, 김현철, 이소라와 같은 이름들도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청춘이고, 어떤 세대의 공감각입니다. 어딘지 결이 닮은 이들의 음악은 ‘동아기획’이라는 하나의 레이블로 묶입니다. 《동아기획 이야기》는 1980년대부터 시작된 이들의 이야기를 다정한 시선으로 정리했습니다. 옛 음악에 관한 책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음악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도화지 하나에 한 색깔이면 오 그건 너무 너무해

대중 음악 중에 가사가 없는 음악을 한 때 ‘경음악’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로 다방이나 카페 등에서 많이 들을 수 있었죠. 동아기획은 경음악을 통해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던 ‘서울스튜디오’에서 공들여 제작한 앨범으로 회사의 기반을 다졌죠. 이후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가요’ 쪽으로도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언더그라운드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김현식도 동아기획에 영입되죠.

하지만 진정한 동아기획이 시작된 것은 1985년 조동진 3집이 발매되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대부’로 불렸던 조동진이 5년 만에 내놓은 음반입니다. 조동진의 음악을 사랑했던 포크 팬들에게 참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동시에 동아기획이 단순한 기획사가 이상의 존재로 발돋움하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음악에 일생의 한 부분을 덜컥 걸어 버린 사람들이 동아기획으로 모이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조동진이라는 인물 때문이었거든요.
조동진 3집 中 〈제비꽃〉
많은 음악인이 동아기획을 단순한 기획사가 아닌, 하나의 음악 공동체로 기억합니다. 오며 가며, 서로의 음악 작업을 자연스럽게 도와주는 식으로 음반 작업에 참여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장필순은 코러스로, 송홍섭은 베이시스트로 동료들의 음반에 오랫동안 참여해 왔습니다. 그러다 자신의 음반을 제작하게 되면 다른 동료들이 합류해 작사와 작곡, 프로듀싱과 세션을 맡아 주는 식입니다. 이런 문화가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김현식, 전인권, 최성원, 하덕규, 함춘호, 장필순 등이 모두 조동진을 따르던 후배들이었고, 이들 모두가 전성기 동아기획의 주축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느샌가 ‘전문가’의 함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의 영역에서 역량을 키워 인정받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올리고자 하죠. 그 과정에서 선을 긋고 벽을 세우기도 합니다. 나의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계를 정하거나, 전문성이 극대화한 나머지 자연스럽게 진입 장벽이 생겨 버리는 겁니다. 문제는 그런 벽이 여기저기 너무 많이 올라선 상황입니다.

예를 들어 AI 분야에 관해 생각해 보죠. 지금 생성형 AI의 파운데이션 모델을 개발하고 있는 개발자 풀은 정말 한 줌입니다. 마크 저커버그가 리스트업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이들은 서로 교류하고 생각을 쌓아 가지만, 무리 바깥의 사람들은 그들의 논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는커녕 지금 어떤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볼 수조차 없죠. 그래서 모델 자체의 개발 속도는 엄청나지만, 그 AI 모델이 적용될 사회와는 소통이 안 됩니다. 관련 제도나 윤리적 논의, 경제적 영향 등 이야기해야 할 것이 많지만 그런 논의는 현재의 AI 개발과는 분리된 곳에서 상상력을 동원해 이루어질 뿐입니다. 이래서는 진짜 AGI, 혹은 초지능이 등장했을 때 사회가 그 충격을 흡수하기 힘듭니다. 오죽하면 연구자들이 나서 AI 모델의 성능을 일부 희생하고 투명성을 높이자며 ‘투명성 세금(monitorability tax)’ 개념을 제안할 정도니까요.

꼭 실리콘 밸리가 아니더라도 이런 모습은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각자의 전문 영역을 존중하고 그에 따른 직책과 권한, 의무를 나누는 식으로 조직이 짜이다 보니 부처 간 소통이 안 되어 행정에서 비효율이 발생합니다. 일반 기업에서도 부서 간 경쟁이 갈등이 되고, 갈등은 비용이 되곤 하죠.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방식의 조직을 꾸리고 운영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조직의 덩치가 커져도 구석구석 통제할 수 있고, 최소한의 효율도 담보할 수 있는 차악이기 때문입니다.

화지만 음악이란 화음이거나 불협화음입니다. 어느 쪽이든 함께 얽히고 섞여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나의 노래가 아니라 동료의 노래에 조연으로 녹아드는 순간, 세계가 확장하고 규칙이 깨집니다. 나는 이렇게 연주하지만, 동료는 저렇게 연주해 달라 청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공동체의 음악은 영원히 낡지 않을 수 있는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생명력이란 것이 별것 아닙니다. 몸의 낡은 부분을 탈락시키고 새로운 세포가 돋아 나는 과정이 끊임없이 순환할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야말로 생명력입니다. 동아기획은 음악인들에게 그런 곳이 아니었을까요. 스타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음악을 만드는 곳이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힘이 아닐까 합니다.
최성원 1집 中 〈색깔〉
눈을 떠라 코뿔소

음악이 좋다고 음반이 저절로 잘 팔리는 것은 아닙니다. 음악이 좋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하겠죠. 당시에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그 방법이었습니다. 전파보다 더 강력한 플랫폼이 없던 때니까요. 그래서 가수들이 TV 쇼에 나서 ‘연예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선곡되기 위해 방송국에 인사를 다니곤 했고요.

김 대표는 좀 다른 전략을 세웠습니다. 음반을 사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공략하기로 한 겁니다. 전국의 레코드 가게를 다 돌며 음반을 진열해 달라고, 좀 틀어 달라고 부탁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게 먹혔습니다. 좋은 음악들이 팔리기 시작한 겁니다. 《동아기획 이야기》에 김영 대표가 1996년에 당시를 상기했던 인터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함량 미달인 가수가 부른 수준 이하의 곡들이 비즈니스에 의해 방송되고, 홍보되어 ‘히트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심지어는 연말에 10대 가수 뽑을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니 우리들이 보기에는 ‘가짜’가 너무 많았던 겁니다.”

이런 홍보 방식을 일종의 ‘저항’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저자도 TV에 출연하는 것이 70년대 군사 정권이 시작한 검열과 규제에 대한 순응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일부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걸 좀 다른 시각에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주류’ 정체성을 활용한 마케팅 말입니다.

조동진을 비롯한 동아기획의 초반 음악인들은 언더그라운드 출신으로, 비주류의 속성을 이미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TV라는, 당시 대중음악의 주류 플랫폼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마케팅 방식을 택하면서 이 비주류 성의 가치는 더욱 강화합니다. 즉, 방송국이라는 거대 시스템이 선택한 음악이 아니라 ‘내가 직접 선택한’ 음악을 듣는다는 효용이 극대화하게 되는 것이죠.

사회학자 사라 손튼의 ‘서브컬처적 자본(subcultural capital)’이라는 개념이 이와 같은 현상을 꽤 잘 설명합니다. 대중적 가치에서 벗어난, 마이너한 취향을 통해 획득되는 상징 자본입니다. 인간은 남과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과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사회적 본능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지극히 모순적인 존재죠. 그런데 주류가 아닌 소수 문화에 강하게 소속되면, ‘아는 사람만 아는’ 지식과 문화, 네트워크를 향유하게 됩니다. 반 친구 대다수와 나는 ‘다르다’라는 감각과 함께 나의 취향으로 인한 강한 소속감을 동시에 느끼죠. 구별과 소속의 욕망이 동시에 충족되는 겁니다.

구별의 욕망이 독특한 마케팅 방법에서 나왔다면, 소속감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동아기획의 음악을 듣는, 흔치 않은 친구들이 그런 소속감을 자극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동아기획이 그런 소속감을 부추기는 방법을 찾아 내기도 했습니다. ‘레이블 회원제’를 운영한 것인데, 일종의 팬클럽과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다만, 특정 아티스트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동아기획이라는 레이블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저자는 이 제도가 구축한 5만여 명에 달하는 레이블 팬덤이 동아기획에 재정적인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레이블의 팬이라면,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신인가수의 음반도 동아기획의 로고만 보고 선뜻 구입했습니다.
한영애 2집 中 〈코뿔소〉
그것만이 내 세상

음반사나 기획사가 음악을 제작할 때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스타 탄생, 차트 1위 같은 트로피일 겁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음악은 3분에서 5분 사이의 길이로 만들어졌습니다. 방송국에서 틀기에 딱 적당한 길이 말이죠. 음악이 너무 길면 한 곡을 다 틀기 어렵습니다. 공개 방송이라면 짧게 편곡이라고 해 오라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음악을 잘라야 합니다. 그러면 시청자, 청취자에게 아쉬움이 남거나 불만이 생깁니다.

방송국이 음악 산업에서 절대 권력을 잃어 가고 있는 요즘은 또 달라졌습니다. 1990년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음악들의 평균 길이는 4분 22초였습니다. 2024년에는 3분 34초로 약 18퍼센트 감소했죠. 기술 때문입니다. 스포티파이 기준으로, 아티스트는 청취자가 30초 청취하면 수익을 얻습니다. 노래를 몇 곡 들었는지를 기준으로 수익 정산이 되기 때문에 러닝 타임이 짧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방송국에서 틀기에 적당한 길이가 3분에서 5분 사이라는 얘기도 엄밀히 따지자면 선후 관계가 바뀐 것입니다. 음반 산업 초창기에는 바이닐 레코드 한 장 한 면에 3분에서 5분 분량의 음악만 담을 수 있었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은 이런 음악을 계속 틀면서 그에 맞게 구성이나 편성의 틀이 잡혔고요. 대중음악의 길이를 결정한 것은 기술이었습니다.

동아기획은 기술이 정한 표준을 그리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80년대의 대표적인 히트곡들이 대부분 4분 미만의 길이였던 것에 반해, 동아기획에서는 꽤 긴 곡을 많이 내놓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들국화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 시인과 촌장의 〈비둘기 안녕〉, 봄여름가을겨울의 〈못다 한 내 마음을...〉 등 6분을 넘기는 곡이 꽤 있었습니다. 가창 부분을 여러 번 반복해 곡의 주제를 강조하거나 즉흥 연주, 리듬 섹션을 더하는 시도 등 때문이었다는 설명입니다. 곡의 길이를 음악의 목적에 맞춘 겁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시도는 음악을 ‘소유’하는 시대에 맞춰진 것이었습니다. 음반을 구입해 소유하는 시대에는 6분짜리 음악이든, 3분짜리든 관계없었습니다. 청자가 만족하느냐의 문제였을 뿐이죠.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내가 가진 경제적 자원을 쪼개 얼마나 많은 취향을 구입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만족스러운 취향을 찾아낼 것인지를 두고 고민했습니다. 음반 가게에서 몇 개의 앨범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그런 문법이 완전히 해체됩니다. 처음에는 몇몇 음원을 다운로드 받아 파일의 형태로 소유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모바일 혁명과 함께 저렴한 비용으로 거의 모든 음원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죠. 이제 청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 자원입니다. 그리고 그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대개 알고리즘에 선택을 맡기죠.

동아기획은 일종의 알고리즘이자 플레이리스트로 기능했습니다. 장필순을 좋아했으니 박학기도 좋을 것이라는 알고리즘, 빛과 소금을 들었으니 다음에는 김현철을 듣는 식의 플레이리스트입니다. 큐레이션의 권력이 방송국에 과점 되었던 시절, 마이너를 위한 큐레이션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절이 끝났습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기계의 큐레이션은 더 정확합니다. 나를 파악할 다양한 수단이 있으니, 나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만한 음악을 무한히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기계의 성능이 더 좋아진다면, 나의 취향에 상황이라는 변수를 더해 최적의 음악을 실시간으로 만들어 들려줄 수도 있겠습니다. 음악 감상에 실패가 사라지는 겁니다.
빛과 소금 1집 中 〈돌아와 줘〉
다만, 실패가 없으면 좋은 의미의 놀람도 없습니다. 

들국화는 1982년 전인권과 허성욱이 함께 라이브 공연을 하며 결성되었습니다. 차례로 밴드 멤버가 합류하고 ‘들국화’라는 이름도 정해졌습죠. 공연장 위주로 활동하던 들국화는 1985년, 드디어 음반 계약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예정된 음반사는 ‘지구레코드’였는데, 당시 우리나라 음반 시장을 과반 장악하고 있던 곳입니다. 조용필과 이승철, 나훈아와 남진이 지구레코드 소속이었으니 말 다했죠.

당시 지구레코드는 본사가 파주에 있었습니다. 들국화 멤버들은 파주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광화문에 갔다가, 우연히 한 음반 가게에 들릅니다. ‘박지영레코드’라는 곳이었는데, 버스 정류장 바로 근처에 있었죠. 이곳의 주인이 바로 동아기획의 김영 대표였습니다. 들국화의 공연을 인상 깊게 봤던 김 대표는 한 눈에 멤버들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들국화를 동아기획으로 영입합니다. 그렇게 들국화 1집이 나왔습니다. 비싼 돈을 주고 좋은 스튜디오에서 오래 녹음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비효율입니다.

이 즉흥적이고 비효율적인 일련의 사건들을 거쳐 탄생한 들국화 1집은 두고두고 명반으로 꼽힙니다. 들어본 적 없는 음악, 들어본 적 없는 레코딩이었습니다. 이 음반이 나오기 전까지는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지는 물론이고 이런 음악이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람들이 차례로 매혹되었습니다. 공연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때의 음악은 좋았고 지금은 아니라는 이야기는 너무 납작합니다. 실제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음악 산업에 엄청난 자본이 투입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몰려들수록 더 좋은 콘텐츠가 나옵니다.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이 오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만, 동아기획의 이야기와 음악은 다른 방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혹은, 다른 방법이 지금도 유효할지 모른다고 짐작하게 되기도 하고요. 동아기획의 음악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를 다시 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bkjn book review는 단순 서평이 아닙니다. 원전을 해체해 다른 책, 기사, 논문과 연결합니다. 매월 한 권의 책을 리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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