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의 미래

bkjn review

YC의 방식이 낡았다고 주장하는 청년이 뉴욕을 뒤집어 놨습니다.

미완성의 미래

2025년 10월 21일

요즘 뉴욕에서 가장 ‘트렌디’한 아이템은 무엇일까요. 트렌디라는 단어가 적절한지는 좀 망설여집니다만, 디자인이 무척 심플한 펜던트를 하나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바로 ‘프렌드(Friend)’라는 회사가 출시한 AI 디바이스입니다. 생김새는 애플의 ‘에어 드롭’과 비슷하고, 크기는 조금 큽니다. 목걸이 형태로 착용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AI 디바이스가 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구매해 본 적도, 사용해 본 적도 없습니다. 휴메인의 AI 핀이나 래빗의 R1 같은 제품들이 대표적이죠. CES 현장이나 홍보 영상에서 소개될 땐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실제 제품을 받아본 사람들은 혹평 일색입니다. 느리고 멍청하다는 겁니다. 스마트폰보다 못한 AI 디바이스는 쓸모없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후기들을 보면 프렌드의 펜던트도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이 좀 다릅니다. 이 펜던트는 엄청난 기능을 홍보하지 않습니다. 똑똑하거나 빠른 AI가 아닙니다. 그저 우리 곁에 있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뉴욕 시민들은 당황하고 분노하는 중입니다.
프렌드의 펜던트는 관계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AI 디바이스입니다. / 출처: Friend
우리 집 부엌을 더럽히지 않는 친구

프렌드의 펜던트도 예고된 지는 꽤 되었습니다. 공식 유튜브 채널에 트레일러 영상이 올라온 날짜가 2024년 7월이거든요. 다른 AI 디바이스와 비슷하거나 약간 늦은 정도입니다. 정작 제품이 출시된 것은 2025년 여름이었습니다. 반향은 크지 않았습니다. 사용자와 주변의 대화를 줄곧 듣고 있다가 스마트폰 앱을 통해 텍스트 메시지 형태로 반응하는 정도의 앱입니다. ‘힘내!’라거나 ‘바깥 공기 좋다’라는 식으로요. AI 비서나 만능 에이전트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공유하는 ‘친구’라는 콘셉트입니다. 하지만 곧 이 제품은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죠. 공격적인 마케팅 때문입니다.

프렌드의 창업자이자 CEO인 아비 쉬프만은 소비자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에 관해 꽤 과감합니다. 쉬프만이 끌어들인 투자금은 약 700만 달러입니다. 그중 180만 달러를 ‘Friend.com’이라는 인터넷 도메인을 사는 데 사용했고요. 쉬프만은 이 지출에 관해 ‘돈을 절약하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케팅에 들어갈 돈을 아낄 수 있고, 일회성 지출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도메인만으로는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쉬프만은 과감한 작전을 생각해 냈습니다. 뉴욕의 지하철을 프렌드 광고로 덮어버리는 겁니다. 유명한 광고 모델을 기용하거나 화려한 그래픽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순히 제품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답하고, 지지하는 누군가’라는 콘셉트와 펜던트를 보여줄 뿐입니다. 하얀 노트에 생각을 적어 내려가듯 말이죠. 그 하얀 노트는 1만 1000장에 달했고요.

대중교통 이용률이 높은 뉴요커들에게 이 광고를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이번에 들어간 비용은 100만 달러도 안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반응은 엄청납니다. 광고 문구가 뉴욕 시민들을 도발했거든요. 이런 식으로요.
“난 우리의 저녁 약속을 절대 깨지 않아(I’ll never bail on our dinner plans).”
꽤 많은 광고가 파손되었습니다. 찢겨 나간 것도 있지만, AI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낙서가 대부분입니다. ‘나가서 진짜 친구를 만들라’라거나, ‘AI는 네가 죽든 살든 신경 안 써’같은 이야기 말이죠. AI가 우리를 ‘감시(surveillance)’한다는 경고성 문장도 눈에 띄고요.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프렌드의 광고는 이제 일종의 공론장이 되었습니다. 광고에 적힌 문장들을 모아 온라인 박물관처럼 꾸민 사이트가 등장했을 정도입니다.

22살 CEO가 생각하는 창업 101

논란의 중심이 된 회사의 입장은 어떨까요. 적어도 CEO인 쉬프만은 이 현상을 즐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X 계정에 “큰일을 하다 보면 이런 부작용이 생긴다”라면서 광고판에 적힌 낙서 사진을 포스팅하고 있죠. 욕설과 분노와 선언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위치한 낙서들 말입니다.

쉬프만은 22살입니다. 하버드 대학을 중퇴하고 프렌드를 창업했습니다. 하지만 이 회사가 쉬프만의 첫 작품은 아닙니다. 미래를 마케팅하고 있는 이 청년은 지난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초기 전파 경로를 추적하는 웹사이트를 개발했습니다. 4000만 명이 넘는 이용자 수를 기록했죠. 17살의 나이였습니다. 2022년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난민들을 위해 숙소를 찾을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기도 했고요.
쉬프만은 코로나19 전파 경로를 추적하는 웹사이트 개발로 2020년 웨비상(Webby Award)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 출처: Democracy Now!
거듭 성공을 경험한 쉬프만에게 프렌드는 불확실한 모험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방법론을 증명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최근 한 팟캐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세계적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인 와이콤비네이터(Y-Combinator, YC)를 비판했는데요, YC의 방법론인 ‘빨리 움직이고 부숴라’라는 모토가 형편없는 소프트웨어에나 적용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드웨어나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제품에는 재앙 같은 생각이라면서 말이죠. 첫인상이 중요한 분야인데, 완성도를 무시한 속도전은 오히려 해가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쉬프만은 창업을 예술가의 작업에 비유합니다. 그 어떤 예술가도 자신의 작품이 ‘이만하면 충분하다(good enough)’라고 이야기하지 않죠. 마찬가지로 창업가도 완벽을 추구하는 장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혁신’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YC의 방법은 돈이 벌리겠지만, 혁신가에게는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 쉬프만의 생각입니다.
주류 스타트업 문화를 비판하는 쉬프만은 경쟁이 치열한 기존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어리석은 행위라고 이야기합니다. 대신 완전히 새로운 카테고리를 창조할 것을 제안하죠. 출처: Greg Isenberg
다만, 프렌드가 내놓은 AI 펜던트가 장인 정신으로 가득 찬 물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실물을 만져 본 것은 아니지만, 디자인은 조니 아이브 시절의 애플을 연상시킵니다. 사용자의 대화를 듣고 도움을 주거나 공감하도록 설계되었지만, 마이크 성능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The Verge〉의 리뷰는 이 펜던트가 눈에 너무 띄고, 무엇보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심지어 이름을 불러도 못 알아듣는 때가 너무 많다고 하네요. 사용자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는지, 오디오북을 듣고 있는지도 구분하지 못하고요.

《포춘》에는 이 펜던트가 ‘치매에 걸린 불안한 할머니’ 같다는 평가가 실렸습니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너무 늦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조용하면 조용해서, 시끄러우면 시끄러워 사용자가 ‘괜찮은지’ 걱정하고요. 확실히 친구라기보다는 보호자에 가까운 반응입니다. 아마도 초기 버전이 꽤 도발적이고 건방진 캐릭터였던 탓에 불만이 제기됐고, 그 피드백을 수용해 AI 모델의 캐릭터를 수정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음 모델이 등장하면

쉬프만은 이 펜던트를 총 3000개 제작했습니다. 2025년 10월 초 기준으로 1000개가 팔렸고요. 하지만 엄청난 반응 덕분인지 쉬프만은 이 결과를 실패라고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모델을 개선하고 수정하고 있으며, ‘최초’의 제품이 겪는 성장통이라고 설명하죠.

광고 포스터를 뒤덮은 낙서들을 생각하면, 기기의 성능이 아직 불완전해서 다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퓨 리서치가 내놓은 조사 결과는 아직 인류가 AI라는 비인간 존재에 마음을 열지 못했다는 점을 잘 보여 줍니다. 전 세계 25개국 성인 2만 8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AI에 대해 ‘우려’하는 감정이 ‘기대’하는 감정을 앞섰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50세 이상 장년층이 35세 미만 청년층보다 AI에 대한 우려가 더 컸습니다. 즉, 시간이 흐를수록 AI에 대한 경계심은 자연스럽게 낮아질 겁니다. 기술도 발전하겠죠. AI 업계에 뛰어든 영민한 인재는 쉬프만 혼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AGI 모델 개발에도 몰두하고 있지만, AI로 우리의 삶을 바꿔 놓을 실질적인 방법을 궁리하고, 개발하고, 창업하고 있습니다.

쉬프만이 늘 함께할 수 있는 단짝 친구를 목걸이 안에 담아 팔겠다고 구상한 것처럼 말입니다. 프렌드의 AI 펜던트는 사실 인간관계를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주 느슨하고 부담없으면서 무한히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를 제공할 수는 있습니다. 펜던트가 사용자를 배신하고 일의 성과를 가로채거나 다른 친구들에게 험담을 늘어놓지는 않을 테니까요.

마이크 성능 개선과 AI 모델의 튜닝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프렌드가 내놓을 다음 모델은 1000개가 아니라 1000억 개가 팔릴 수도 있습니다. 그 전에 오픈AI가 완전히 새로운 디바이스를 선보일지도 모르고요. 그런 시대에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같은 정부 부처에 관해 생각해 보죠. 앞으로 몇 년 뒤엔 KBS 9시 뉴스나 주말 드라마의 범죄 장면 같은 것보다는 AI 펜던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알고리즘과 정렬에 의해 작동하는지를 더 신경 써야 할 겁니다. 그게 가능할지는 미지수긴 하지만요.

프렌드 광고 포스터에 적힌 분노의 낙서들은 인간이 AI를 향해 외칠 수 있는 마지막 반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혁신의 상징이었던 YC의 방식은 이제 낡았다고, 혁신을 만들 수 없다고 비난받습니다. 22살의 청년이 뉴욕 지하철을 AI와 함께하는 미래에 관한 공론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아직은 기술도 철학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분야는 생각보다 빠르게 완성되고 있죠. 이제 논의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갑니다. 이제 곧 기술과 감정, 미디어와 관계가 뒤섞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됩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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