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쉐린(미슐랭) 가이드가 전 세계 관광청으로부터 거액을 받고 그 지역 미식 안내서를 발간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탐사 보도나 내부 고발로 비밀이 드러난 게 아닙니다. 미쉐린 측이 직접 밝혔습니다.
10월 8일 미쉐린은 프랑스 파리에서 ‘미쉐린 키(key) 셀렉션’을 최초로 공개했습니다. 미쉐린 가이드의 호텔 버전입니다. 좋은 레스토랑에 스타(★) 1~3개를 부여한 것처럼, 좋은 호텔에 키(열쇠) 1~3개를 부여합니다. 올해 시작한 평가인데, 이날 평가 결과를 내놨습니다. 전 세계 7000여 개 호텔을 평가해 143곳에 3키를 부여했습니다. 한국에선 3키를 받은 호텔이 없었고요.
이날 행사가 열리기 몇 시간 전, 미쉐린은 이례적으로 평가 사업의 수익 구조를 공개했습니다. 각국 정부의 관광청으로부터 비용 지원을 받아서 해당 국가와 도시로 평가원을 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업계에선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미쉐린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호텔 평가는 레스토랑 평가보다 돈이 많이 드는 작업입니다. 먹는 것보다는 자는 것이 더 비싸니까요. 파트너의 지원 없이 재정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평가를 지속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결국 미쉐린은 첫 호텔 평가를 발표할 때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를 털고 가려고 한 겁니다.
한국관광공사는 2016년부터 4년간 총 100만 달러를 미쉐린에 지급했습니다. 24개 레스토랑이 별을 받았고, 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이 나왔습니다. 태국관광청도 2017년 440만 달러를 들여 가이드를 냈죠. 미국, 캐나다, 베트남, 말레이시아, 에스토니아, 아랍에미리트, 이스라엘 등도 국가 또는 시 예산을 투입해 미쉐린 가이드를 냈습니다.
평가의 독립성
미쉐린은 자선 단체가 아닙니다. 가이드를 펴내서 수익을 올려야 합니다. 그러나 틱톡의 시대에 가이드북 판매만으로는 충분한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100년이 넘은 역사와 명성은 여전하지만, 종이책 시장의 현실은 냉정하니까요. 미쉐린이 고안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은 세계화 그리고 현지화였습니다.
미쉐린 가이드는 원래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을 위한 맛집 안내서였습니다. 그러다 2005년 처음으로 유럽 외 지역인 뉴욕판이 발행됩니다. 이후 도쿄, 홍콩, 마카오 편이 나왔죠. 미쉐린 가이드는 ― 자국의 외식 산업을 홍보하고 관광 산업을 활성화하려는 각국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 아시아, 중동, 남미로 빠르게 확장했고, 현재 25개국에서 발행되고 있습니다.
평가원들은 익명으로 활동하며 일반 손님처럼 식당을 방문해 식재료의 질, 조리 기술, 맛의 조화, 일관성 등을 평가합니다. 미쉐린의 별은 셰프가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입니다. 단 한 개의 별이 식당의 운명을 바꾸기도 합니다. 별을 얻은 식당은 단숨에 주목을 받고, 예약이 폭주하고, 언론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각국 관광청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는 구조는 매우 영리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동시에 평가의 독립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합니다. 어떤 도시가 가이드 대상이 되는가가 단순히 외식 시장의 수준만이 아니라 비용 지원 여부에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쉐린 가이드 측은 관광청과 협업한다고 해서 반드시 별을 보장하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특정 국가와 도시에서 수백만 달러를 받고 나서 “샅샅이 둘러봤지만, 별을 줄 만한 곳이 없네요”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게다가 평가 기준이나 평가원 정보가 외부에 충분히 공개되어 있지 않아서, 누가 언제 몇 번 방문했고 어떤 기준으로 평가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별이 만드는 불평등
별은 결국 돈이 있는 도시로 몰립니다. 뉴욕, 도쿄, 파리, 서울 같은 대도시 중심의 평가 구조가 형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예산을 적극적으로 투입하기 힘든 지방의 중소 도시는 평가 대상조차 되지 않겠죠. 별의 지도는 결국 세계 경제의 불평등 지도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이를테면, 미식의 중앙 집권화가 강화되는 셈입니다.
또한 미쉐린은 여전히 프랑스식 파인다이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정장 차림의 손님, 값비싼 식기, 완벽히 짜인 코스 구성, 숙련된 서비스 같은 요소가 별을 얻기 위한 공식처럼 작용합니다. 거리 음식, 전통 식당, 소규모 업장은 태생적으로 불리합니다. 결국 미쉐린의 평가는 다양성을 기리는 대신, 상류층 취향을 보편적 기준으로 포장해 세계 곳곳에 이식합니다.
미쉐린의 저주
별은 영광이지만, 동시에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별을 얻으면 인지도와 매출이 급등하지만, 반대로 별을 잃으면 ‘그 식당은 이제 끝났다’라는 낙인이 찍힙니다. 셰프와 레스토랑은 별을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압박에 시달립니다.
뉴욕에서 2005년부터 2014년 사이에 미쉐린 별을 받은 식당 가운데 40퍼센트가 2019년 기준으로 폐업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별을 지키기 위해 값비싼 식재료와 섬세한 서비스, 고급 인테리어를 유지하다 보니 수익성이 악화된 탓입니다. 이른바 ‘미쉐린의 저주’입니다.
이 저주는 정신 건강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별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셰프를 극단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3스타 셰프 베르나르 루아조는 별점이 깎일 수도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뒤 엽총으로 자살했습니다.
미슐랭 별을 받은 많은 셰프들이 요리를 위해 산 것이 아니라, 별을 지키기 위해 살았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가정 파탄 등을 겪었다고 털어놨죠. 별이 셰프를 직업적으로는 올려놓았지만, 인간으로서는 갉아먹은 셈입니다.
별과 인간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별을 스스로 반납하는 셰프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3스타 셰프 세바스티앙 브라는 2017년 더 이상 평가에 시달리며 요리하고 싶지 않다면서 별을 반납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별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를 되찾는 선택이었죠.
미쉐린 가이드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식 안내서입니다. 그러나 그 권위의 이면에는 깊은 불균형이 존재합니다. 별은 더 이상 순수한 영광의 상징이 아닙니다. 별을 좇는 셰프는 때로 자신의 요리 철학을 잃고, 자신의 삶마저 잃습니다.
미쉐린의 저주는 미쉐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별은 요리의 품질을 평가하기 위한 도구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사회적 지위와 상징 자본이 되었습니다. 완벽한 평점을 향한 집착, 타인의 평가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사회 전체의 구조가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별은 빛나야 하지만, 그 빛이 인간을 태워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