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가난해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는 않죠. 누군가는 계층 사다리를 올라가지만, 누군가는 밀려 떨어집니다. 계층의 정의에는 여러 요소가 포함되겠지만, 그 중 소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겁니다. 소득을 기준으로 사다리를 오른 사람과 그 반대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국가데이터처(舊 통계청)가 발표한 〈
2023년 소득 이동 통계 결과〉보고서입니다.
전체 국민을 총 5단계로 나눴습니다. 사다리를 오르는 데 성공한 국민은 5명 중 1명도 되지 않습니다. 특히 상위 20퍼센트로 새로 진입한 비율은 3.5퍼센트에 그쳤고요. 잘 벌수록, 못 벌수록 계층을 유지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봐도 계층 간 이동이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3년째 그 비율이 줄어 34.1퍼센트를 기록했습니다.
열심히 살면 더 나은 삶을 얻게 된다는 명제가 점점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이미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기는 어려운 시스템에 진입했습니다.
한국에서 부자가 되는 길
금융은 수입과 지출 사이의 시간적 불일치를 조정합니다. 지금은 돈을 못 벌어도,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내 가게를 차리면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미래의 소득을 미리 당겨 사용한 대가로 이자 비용을 지불합니다. 이렇게 금융은 생산적 활동을 위한 투자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금융의 이런 순기능이 점점 작아지고 있습니다.
은행이 앉아서 돈을 번다, ‘예대 마진’ 장사에만 골몰한다는 비판이 이런 현상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은행이 돈을 빌려주고, 그 이자를 받아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돈을 빌려주는 대상이 문제입니다. 공장을 짓는 데에,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 창업하는 데에 돈을 빌려주면 투자입니다. 부실한 곳을 피해 미래의 가능성을 숙고해 투자한다면, 돈을 빌린 사람과 은행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 전체가 이득을 봅니다. 고용이 늘어나고 소비도 늘어납니다. 금융이 성장의 동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엔 우리나라 은행들이 이런 투자보다는 자산 거래에 끼어드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중에서도 부동산과 같은 ‘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내어주는 경우가 많죠. 은행의 돈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면 흘러들수록 자산 가격은 상승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출을 더 받아서 또 자산을 구매합니다.
아무리 은행이라도 들고 있는 돈은 한정적입니다. 따라서 자산 담보 대출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생산적 분야에의 투자가 적어집니다. 이런 변화가 가속화되었던 시기가 바로 2014년입니다. 정부가 나서 ‘빚내서 집 사라’라는 기조를 세웠습니다. 당시는 박근혜 정부 때입니다. 보수 정부라서 이런 정책을 내놓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당시 세계적으로 경기가 침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놓은 정책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사람들이 주택담보대출을 더 쉽게 받을 수 있게 했으니 부동산 시장이 살아나고 건설 경기가 부양됐습니다. 수요가 늘어나니 공급도 따라온 겁니다. 정부가 의도했던 효과가 잠시나마 있었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부작용도 따라왔습니다.
부동산이 돈을 빨아들이자, 결과적으로
생산적 부문에 투자할 돈이 말랐습니다. 시중에서도 돈이 귀해졌습니다. 먹고, 입고, 쓸 돈이 없어졌다는 얘깁니다. 고성장 시대는 끝났는데, 가계 부채 증가세는 무섭게 늘어납니다. 소비가 줄고 경기 침체가 길어집니다.
2014년의 단기적인 정책 때문만은 아닙니다. 유권자에게 집을 살 수 있다는 희망, 아파트 평수를 늘릴 수 있다는 희망을 줘야 한다는 강박은 어느 정부에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동원된 것이 정책 금융입니다. 한국주택금융공사(HF)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운영하는 각종 대출 상품 얘깁니다. 전세자금 대출부터 보금자리론, 디딤돌론은 물론이고 각종 ‘특례’ 대출까지 집 살 돈을 빌리기 위해서라면 정부가 보증도 서 주고 이자도 깎아 줍니다.
이게 당장 내 집 살 사람들에게는 고마운 제도입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드는 돈의 양을 무한정 늘리는 정책입니다. 게다가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 대출 끼고 그 집을 산 개인만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보증을 서 주고 이자를 깎아 준 정부가 그 충격을 같이 흡수해야 합니다. 집값이 내려가면 정부가 곤란합니다. ‘서울에 아파트를 사 두면 반드시 오른다’라는 신화는 이렇게 유지됩니다.
코스피 4000, 십만 전자
얼마 전 나왔던 ‘
10.15 부동산 정책’은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드는 돈을 줄여보자는 정책입니다. 빚을 내서 집을 사는 한, 부동산 거품이 점점 커질 뿐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급박하게 시행된 정책으로 다 된 계약에 차질이 생긴 사람들도 있지만, 이 정책이 계층 간 사다리를 걷어찼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빚내서 집 사는 방법 외엔 이 사다리를 올라갈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팽배한 겁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에서 자산 격차가 소득 격차를 추월했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국회 입법조사처의 분석입니다. 여기서 불평등이란 자산뿐만 아니라 교육, 건강 등 다차원적인 분야를 포괄합니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2011년에는 소득이 불평등의 주요 요인이었습니다. 하지만 2023년에는 자산이 소득보다 불평등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되는 방법은 부자 부모를 두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더 이상 우습지 않게 된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자산은 곧 부동산입니다. 가구 자산의 75퍼센트가 부동산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택 가격의 차이에 따라 불평등이 발생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청년층이 불리합니다. 1980년대나 1990년대의 20대에 비해 주거비 부담이 높습니다. 고용은 더 불안정해졌습니다. 저축해서 투자하는 공식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게다가 고용이 불안정한 청년에게 은행은 문을 열지 않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집을 살 때뿐입니다. 그러니 빚내서 집 살 기회를 닫아 버리면 부동산 가격 상승이라는 거의 유일한 재산 형성의 기회를 닫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정부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코스피 5000 시대’입니다. 씁쓸합니다. 자산 증식을 부동산으로 하지 말고, 주식 투자로 하라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자산 증식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부도 인정한 겁니다. 다만, 부동산에 돈을 묶어 두지 않고 주식에 투자하면, 적어도 그 돈이 기업으로 흘러들어 뭐라도 개발하고 고용도 창출될 것이라는 희망에 걸어 보는 전략이죠.
빈손도 기회를 잡으려면
솔직한 대안이긴 합니다. 금융 시장의 돈을 다시 생산적인 분야로 돌리는 구조 전환입니다. 하지만 코스피를 띄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실한 노동만으로 나아진 삶을 담보할 수 없게 되었다면, 적어도 금융과 투자가 불평등을 더 심화하는 현상을 완화할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조선일보》가 재미 있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주식 투자자들의 수익률을 분석해 봤다니 중장년층일수록 수익률이 높았습니다. 특히 60대 이상 여성 투자자들의 수익률이 최고였다고 합니다. 이유는 “우량주에 집중적으로 투자한 뒤 진득하게 들고 있었기 때문”이고요. 청년층이 자꾸만 단타에 집중하며 돈을 잃어가는 동안 말이죠.
세대 간 투자 철학의 차이 때문일까요. 이 보도에서 한 전문가는 “투자 원금이 클수록 투자 기간이 길고 회전율이 낮은 경향이 있고, 반대로 투자금 규모가 작으면 튀겨야겠다는 조급함에 사고팔고를 반복하게 된다”라고 지적합니다. 누군가의 시각에서 보면 이 ‘조급함’이 탐욕으로 보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씨드 머니’를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빠르게 일확천금을 노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이죠. 하지만 노동 소득만으로는 계급 유지는커녕 불평등의 골로 점점 밀려날 뿐이라는 판단이 선다면, 사고팔고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삼성전자에 ‘진득하게’ 묻어둘 돈을 모을 방법이 단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연구에서는 청년층 안에서도 소득이 낮을수록 예적금에, 소득이 높을수록 주식과 채권 등에 투자하는
경향도 보고된 바 있습니다.
OECD는 한국 사회를 하위 소득층이 평균 소득층으로 진입하는 데 최대 150년이 걸리는 곳으로
평가했습니다. 소득 상위 20퍼센트 가정의 상위권 대학 진학률은 꾸준히 높아지고 있고, 부자 동네에 살 수록 건강합니다. 능력주의는 계급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지만, 이제 계급이 능력을 결정합니다.
그런 사회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재명 대통령은 〈블룸버그 TV〉와의
인터뷰에서 부동산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시한폭탄이라고요. 그렇다면 계층 이동의 희망은 이제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도 정부는 함께 제시해 줘야 할 겁니다. 폭탄 돌리기를 마다치 않으며 계층 이동을 꿈꿨던 사람들에게 영끌과 빚투가 아닌 다른 곳에도 기회가 있다는 시그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