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환영입니다.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환영이기도 하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환영이기도 하죠. 그리고 때로는 결코 현실에서 보고 싶지 않은 환영이기도 합니다. 지금 넷플릭스 영화 부문 글로벌 스트리밍 1위를 지키고 있는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이 중 세 번째에 해당합니다. 현실에서는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환영, 핵미사일과 종말의 날에 관한 이야기죠.
이 영화는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복귀작입니다. 권력 구조와 그에 얽힌 기술을 차분히 탐구하는 문제의식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생사가 오가는 전장의 긴박감을 기가 막히게 연출한다는 점이 평단과 관객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았고요. 관객으로 하여금 그 현장에 뚝 떨어진 주인공이 된 듯한 감각을 느끼게 하는 연출이 몰입감을 높입니다. 게다가 비글로우의 대표작인 〈허트 로커〉와 〈제로 다크 서티〉 모두 ‘이라크 전쟁’과 ‘오사마 빈 라덴 체포’라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현실과 환영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체험은 더 깊어집니다.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다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적 없는 허구의 상황을 가정합니다. 발사 지점을 특정할 수 없는 미사일이 미국 본토를 향해 날아듭니다. 핵 공격이라는 상상이 현실로 닥쳐왔을 때 미국은 과연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이 영화는 한없이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미국 국방부가 영화 내용이 현실과 다르다며 ‘
우려’를 표할 정도로 말이죠. (링크의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시 네바다 사막으로
핵전쟁과 그에 따른 지구의 종말은 냉전 시대의 공포였습니다. 냉전과 함께 수명을 다했다는 얘깁니다. 여전히 인도나 이란 등에 의한 핵의 위협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세계를 멸망시킬 정도의 핵전쟁은 영화의 상상력 안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미국이라는 단 하나의 강대국이 핵 주도권을 갖고 전 세계의 핵무기 개발을 억제해 왔기 때문입니다. 미국 스스로도 새로운 세계에 적응했습니다. 공식적으로 1992년 핵무기 실험을 중단했으니까요. 하지만 30년도 넘게 지속된 이 공백이 깨질지도 모릅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국방부에 핵무기 시험을 ‘즉시 시작’하도록
명령했다고 밝힌 겁니다. 내용도 충격적인데 시점도 공교로웠습니다. 지난 10월 30일 김해 공항에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을 만나기 직전이었죠.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핵실험이 아니라 ‘핵탄두를 발사할 수 있는 수단’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옵니다. 미사일 같은 것 말입니다. 러시아나 중국과 동등한 방식으로 핵무기 시험을 재개해야 한다고 했는데, 두 국가 모두 2000년대로 접어든 이후 핵실험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정말 무언가를 착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단, 만약 그렇다면, 그 무언가가 트럼프에겐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핵실험이 재개된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외교 정책을 대폭 수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벨 평화상에 집착하며 ‘The Peace Maker’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니까요. 게다가 미국의 핵실험은 미국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러시아와 중국, 인도와 이란은 물론 유럽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규칙이 깨지는 순간, 다른 핵보유국도 연쇄적으로 핵실험에 돌입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한 전문가는 ‘지난 25년 동안 봉인됐던 연쇄반응이 시작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갑작스러운 발표가 영 맥락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인류의 최종 병기
미국의 핵실험 재개 선언은 위협일 수도,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결심일 수도 있습니다. 미국이 만든 세계의 질서가 이미 붕괴했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으로 벽에 금이 가고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것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입니다.
사실, 우리는 단 한 번도 핵이 없는 시대를 살았던 적이 없습니다. 1940년대 이후에 출생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머리 위에 핵을 이고 태어났죠. 다만, 냉전의 종식과 함께 핵무기는 드러내놓고 자랑할 물건이 아니라 숨기고 모른 척해야 할 물건이 되었습니다. 보여도 안 보이는 척해야 할 물건 말입니다. 핵보다 더한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달러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세계, 팍스 아메리카나입니다.
그런데 어느샌가 그 중앙 집권적인 세계의 권력 균형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달이 미중 갈등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었지만, 진짜 조급한 사람은 푸틴이었습니다.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러시아는 냉전을 끝냈지만, 서방 세계는 냉전을 끝낸 적이 없습니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동진했고, 러시아는 다시 제국을 꿈꾸는 지도자를 선택합니다. 푸틴은 진심으로 우크라이나를 정복할 생각이었을 겁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최근 러시아는 부레베스트니크(Burevestnik) 미사일 실험을 완료했다고 밝혔습니다. 현지 시각 10월 26일의 일입니다. 부레베스트니크는 최소 1만 4000킬로미터를 비행할 수 있는 핵 추진 순항 미사일입니다. 푸틴은 사거리가 무제한이라고 자랑했고요. 핵탄두가 실린 것은 아닙니다. 멀리, 오래 날기 위해 핵을 연료로 사용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핵탄두를 갖고 있습니다. 부레베스트니크에 핵탄두를 달면, 핵미사일이 됩니다.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소식입니다. 트럼프가 제안했던 ‘부다페스트 평화 정상회담’이 일주일 만에 무산된 이후의 일이었으니, 푸틴이 노선을 확실히 했다는 신호입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일을 러시아가 발표합니다. 정말로 넷플릭스의 인기 시리즈인 〈외교관〉에 등장했던 무기, ‘포세이돈’입니다. 최근 공개된 시즌 3에서 극 중 등장인물들은 ‘포세이돈이 실존하는 것이었냐’라는 식의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실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