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이전의 세계로

bkjn review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핵전쟁이라는 상상을 현실로 보여 줍니다.

1992년 이전의 세계로

2025년 11월 3일

영화는 환영입니다.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환영이기도 하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환영이기도 하죠. 그리고 때로는 결코 현실에서 보고 싶지 않은 환영이기도 합니다. 지금 넷플릭스 영화 부문 글로벌 스트리밍 1위를 지키고 있는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이 중 세 번째에 해당합니다. 현실에서는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환영, 핵미사일과 종말의 날에 관한 이야기죠.

이 영화는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복귀작입니다. 권력 구조와 그에 얽힌 기술을 차분히 탐구하는 문제의식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생사가 오가는 전장의 긴박감을 기가 막히게 연출한다는 점이 평단과 관객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았고요. 관객으로 하여금 그 현장에 뚝 떨어진 주인공이 된 듯한 감각을 느끼게 하는 연출이 몰입감을 높입니다. 게다가 비글로우의 대표작인 〈허트 로커〉와 〈제로 다크 서티〉 모두 ‘이라크 전쟁’과 ‘오사마 빈 라덴 체포’라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현실과 환영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체험은 더 깊어집니다.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다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적 없는 허구의 상황을 가정합니다. 발사 지점을 특정할 수 없는 미사일이 미국 본토를 향해 날아듭니다. 핵 공격이라는 상상이 현실로 닥쳐왔을 때 미국은 과연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이 영화는 한없이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미국 국방부가 영화 내용이 현실과 다르다며 ‘우려’를 표할 정도로 말이죠. (링크의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시 네바다 사막으로

핵전쟁과 그에 따른 지구의 종말은 냉전 시대의 공포였습니다. 냉전과 함께 수명을 다했다는 얘깁니다. 여전히 인도나 이란 등에 의한 핵의 위협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세계를 멸망시킬 정도의 핵전쟁은 영화의 상상력 안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미국이라는 단 하나의 강대국이 핵 주도권을 갖고 전 세계의 핵무기 개발을 억제해 왔기 때문입니다. 미국 스스로도 새로운 세계에 적응했습니다. 공식적으로 1992년 핵무기 실험을 중단했으니까요. 하지만 30년도 넘게 지속된 이 공백이 깨질지도 모릅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국방부에 핵무기 시험을 ‘즉시 시작’하도록 명령했다고 밝힌 겁니다. 내용도 충격적인데 시점도 공교로웠습니다. 지난 10월 30일 김해 공항에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을 만나기 직전이었죠.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핵실험이 아니라 ‘핵탄두를 발사할 수 있는 수단’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옵니다. 미사일 같은 것 말입니다. 러시아나 중국과 동등한 방식으로 핵무기 시험을 재개해야 한다고 했는데, 두 국가 모두 2000년대로 접어든 이후 핵실험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정말 무언가를 착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단, 만약 그렇다면, 그 무언가가 트럼프에겐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핵실험이 재개된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외교 정책을 대폭 수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벨 평화상에 집착하며 ‘The Peace Maker’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니까요. 게다가 미국의 핵실험은 미국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러시아와 중국, 인도와 이란은 물론 유럽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규칙이 깨지는 순간, 다른 핵보유국도 연쇄적으로 핵실험에 돌입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한 전문가는 ‘지난 25년 동안 봉인됐던 연쇄반응이 시작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갑작스러운 발표가 영 맥락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인류의 최종 병기

미국의 핵실험 재개 선언은 위협일 수도,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결심일 수도 있습니다. 미국이 만든 세계의 질서가 이미 붕괴했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으로 벽에 금이 가고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것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입니다.

사실, 우리는 단 한 번도 핵이 없는 시대를 살았던 적이 없습니다. 1940년대 이후에 출생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머리 위에 핵을 이고 태어났죠. 다만, 냉전의 종식과 함께 핵무기는 드러내놓고 자랑할 물건이 아니라 숨기고 모른 척해야 할 물건이 되었습니다. 보여도 안 보이는 척해야 할 물건 말입니다. 핵보다 더한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달러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세계, 팍스 아메리카나입니다.

그런데 어느샌가 그 중앙 집권적인 세계의 권력 균형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달이 미중 갈등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었지만, 진짜 조급한 사람은 푸틴이었습니다.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러시아는 냉전을 끝냈지만, 서방 세계는 냉전을 끝낸 적이 없습니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동진했고, 러시아는 다시 제국을 꿈꾸는 지도자를 선택합니다. 푸틴은 진심으로 우크라이나를 정복할 생각이었을 겁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최근 러시아는 부레베스트니크(Burevestnik) 미사일 실험을 완료했다고 밝혔습니다. 현지 시각 10월 26일의 일입니다. 부레베스트니크는 최소 1만 4000킬로미터를 비행할 수 있는 핵 추진 순항 미사일입니다. 푸틴은 사거리가 무제한이라고 자랑했고요. 핵탄두가 실린 것은 아닙니다. 멀리, 오래 날기 위해 핵을 연료로 사용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핵탄두를 갖고 있습니다. 부레베스트니크에 핵탄두를 달면, 핵미사일이 됩니다.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소식입니다. 트럼프가 제안했던 ‘부다페스트 평화 정상회담’이 일주일 만에 무산된 이후의 일이었으니, 푸틴이 노선을 확실히 했다는 신호입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일을 러시아가 발표합니다. 정말로 넷플릭스의 인기 시리즈인 〈외교관〉에 등장했던 무기, ‘포세이돈’입니다. 최근 공개된 시즌 3에서 극 중 등장인물들은 ‘포세이돈이 실존하는 것이었냐’라는 식의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실존 했습니다.
‘포세이돈’은 러시아의 핵 위협을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이제 러시아의 핵 위협을 증명합니다. / 출처: NETFLIX
포세이돈은 베일에 가려진 무기였습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핵 추진 수중 드론으로, 핵무기를 장착할 수 있도록 설계됐습니다. 즉, 핵연료로 러시아가 원하는 곳 어디까지라도 이동이 가능한 드론이며, 물속으로 이동해 감지가 어렵습니다. 감지가 어려우니 요격할 수도 없죠. 핵무기의 끝판왕입니다. 지금까지는 무슨 전설 속 괴물인 것처럼 소문만 무성했습니다.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포세이돈의 존재를 주장했지만, 실체가 없었죠. 하지만 지난 10월 29일 핵잠수함 하바롭스크 진수식에서 포세이돈의 정체가 공개되었습니다. 러시아 정부가 포세이돈 발사 실험을 실시했고, 성공적이었다는 내용을 발표한 겁니다.

‘경주 선언’의 의미

러시아가 핵무기 실험을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핵전쟁에 필요한 기술을 갖춘 것은 사실이죠. 러시아만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도 차근차근 준비 중입니다. 2024년 9월 24일 중국이 시험 발사한 대륙간 탄도 미사일(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ICBM)은 대만을 향한 위협처럼 보였지만, 지금처럼 미중 관계가 악화한 상황에서는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중국은 2030년까지 1000개, 2035년까지는 15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게 될 전망입니다.

핵연료와 핵무기의 경계는 농축 정도로 결정됩니다. 뉴스에서 ‘저농축 우라늄’이란 용어를 듣게 되는데, 핵연료용 우라늄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농축 우라늄’이 핵무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20퍼센트 이상만 되어도 고농축으로 분류하는데, 이론상으로 핵무기를 만들 수준이긴 합니다. 하지만 핵무기의 크기를 줄여서 실전에 투입할 정도로 무기화하려면 90퍼센트 이상으로 농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미국이 이란이나 북한과 핵 협상을 진행하면서 우라늄을 어디까지 농축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핵연료를 사용해 부족한 에너지를 충당하는 것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효율을 높이겠다고 우라늄 농축 기술을 발전시키면, 곧 핵무기 개발 기술로 이어집니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설계했고, 유지해야 하는 미국 입장에서는 반드시 막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21세기의 화약고는 중동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반도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21세기의 전쟁은 유럽의 경계에서 먼저 터졌으니까요.

미국이 핵무기 없는 세상을 원했던 이유는 ‘세계화’입니다. 자유 무역을 통해 모두가 풍요를 누리는 시대를 만들고자 했던 겁니다. 그 중심에는 달러 패권을 쥔 미국이 있고요. 전쟁의 위협을 제거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부품을 실은 배가 반드시 도착할 것이라는 신뢰가 쌓이려면, 어느 한 곳이라도 이 경제적 동맹에 적대적인 국가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끝없는 바다를 항해해 오는 동안 공격당하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트럼프는 자유 무역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미국 대통령입니다. 자유 무역 시스템이 미국을 가난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며 관세의 벽을 세웁니다. 이번 APEC 정상회의가 도출한 ‘경주 선언’에서 ‘자유 무역’이란 말이 아예 빠진 것이 이 시대를 그대로 비춥니다. APEC은 경제 회담입니다. 자유 무역 체제에 함께하는 각 국가의 경제 수장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경제력이 곧 국력을 의미하니 웬만한 국가에서는 정상급이 참석하죠. 그런 APEC에서 나온 선언문에 자유 무역이 빠졌습니다. 어쩌면 이번 APEC은 특이점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 경제는 물론 안보의 시곗바늘을 되돌린 정상회의로 말이죠.

다만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모든 국가가 달라진 시대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영화는 미국이 핵 공격에 대비해 준비해 둔 모든 시스템과 매뉴얼에 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는지 말이죠. 약간의 스포일러입니다만, 이 영화에는 무책임한 사람도, 악인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진 않죠.
영화 속 대통령은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 출처: NETFLIX
한국도 이제 곧 핵 추진 잠수함을 갖게 됩니다. 이번 APEC 개최와 한미 정상회담의 성과로 꼽힙니다. 방어 목적입니다. 달라진 시대에의 적응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주변 좁은 바다에서는 오히려 효율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필요 이상의 비용을 치르게 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옵니다. 모두 일리 있습니다. 하지만 판을 크게 보면, 핵 추진 잠수함을 갖겠다는 결정도 논리적입니다.

저는 궁극적으로 핵분열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 세상을 지지합니다. 연료든 무기든 말이죠. 위험합니다. 인간의 감당 능력을 넘어서는 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세계의 변화를 보고 있자면, 저의 지지란 너무 순진하고 무책임한 것이 아닐지 생각되기도 합니다. 제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세계는 이미 방향을 틀었습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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