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의 서사 경쟁

bkjn review

제품과 서사가 결합하면서 AI 기업의 CEO는 작가·구루형 CEO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빅테크의 서사 경쟁

2025년 11월 18일

글 쓰는 CEO가 늘고 있습니다. 지난해 링크드인에서 전 세계 CEO들이 작성한 게시물이 전년 대비 23퍼센트 증가했습니다. 팟캐스트에 나와서 기술과 시장을 전망하는 CEO도 부쩍 늘었습니다. 체감상 미래 기술 업계 CEO들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AI, 우주, 반도체, 바이오 같은 첨단 산업에서는 기술 경쟁만큼이나 서사(narrative) 싸움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챗GPT가 세상에 나온 지 3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미래 기술 분야에서는 그 기술로 어떤 미래를 만들려 하는지 설명하는 것이 경쟁력이 되고 있습니다. 서사를 먼저 장악한 기업은 단순한 기술 우위를 넘어 시장·인재·정책·자본·생태계 전체를 움직이는 권력을 얻게 됩니다.

샘 올트먼은 개인 블로그에 특이점의 도래를 선언하는 글을 올립니다. 마크 저커버그는 메타 블로그에 게재한 글에서 개인용 초지능을 약속합니다. 젠슨 황은 엔비디아 블로그에서 피지컬 AI가 미래라고 말합니다. 제프 베이조스의 연례 주주 서한은 경영 교과서로 통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지금 이 순간에도 X에 접속해 있고요. 이들 외에도 미국 테크 기업 CEO 다수가 기술과 미래, 사회에 대한 사유를 공개적으로 서술합니다.

작가·구루형 CEO

미래 기술 업계에서 ‘은둔의 경영자’는 이사회와 주주에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서사를 선점하는 기업이 시장 기대치를 주도적으로 설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테슬라는 양산 계획을 번번이 지키지 못했지만 ‘전기차의 미래를 정의한 기업’이라는 서사 덕분에 기업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기술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지만, 서사로 시장 인식을 앞당긴 겁니다.

빅테크의 서사 경쟁은 AI 시대로 접어들며 한층 치열해졌습니다. AI 제품에서는 개발 철학과 비전이 제품의 일부로 간주됩니다. AI 제품은 본질적으로 확률 기계입니다. 다른 제품보다 비결정적이고 불투명하며 예측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사용자가 제품의 가격과 성능뿐만 아니라, 모델의 도덕성과 안정성 같은 개발 철학을 제품의 일부로 평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제품과 서사가 결합하면서 AI 기업의 CEO는 공개적으로 사유하고 시장과 국가를 설득하는 작가·구루형 CEO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작업을 가장 잘하고 있는 사람이 오픈AI의 CEO 샘 올트먼입니다. 올트먼이 세계 투어에서 보여 준 메시지 전략은 사익을 추구하는 한 기업의 대표라기보다 철학자 혹은 예언가에 가까웠습니다.

올트먼은 개인 블로그에 제품 철학과 기술 방향을 고백하는 글을 자주 올립니다. 챗GPT는 아이폰처럼 고정된 완성품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고, 모델이 커지고, 기능이 확장되는 제품입니다. 지금 모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내년에는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올트먼의 비전 제시는 제품의 일부가 됩니다.

올트먼의 글은 투자자, 파트너, 시장에 ‘이 회사는 이 방향으로 간다’는 기대를 형성합니다. 게다가 미래에 구현할 성능을 현재 가치로 당겨오는 레버리지로 작동합니다. 올트먼의 글을 보면 AGI는 벌써 실현된 것만 같습니다. 글 한 편이 대형 투자 몇 건으로 이어집니다. 또 AI 버블에 대한 공포심이 시장에 퍼질 때는 낙관론을 제시해 시장을 안심시키기도 합니다.

올트먼은 2025년 2월 ‘세 가지 관찰(Three Observations)’이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AI 모델의 지능은 투입한 자원에 비례하고, AI 사용 비용은 매년 10배씩 줄어들고, 지능의 선형적 증가가 가져오는 사회·경제적 가치는 초지수적(super-exponential)이다.” 따라서 AI 인프라에 돈을 미친 듯이 퍼부어도 경제적으로 타당하다는 선언입니다.

서사는 국가 정책과 규제 지형을 자사에 유리하게 설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올트먼이 ‘점진적 공개’를 AI 안전의 표준으로 제시하면, 각국 규제 기관은 그 기준을 사실상 업계 표준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서사를 먼저 만든 기업은 규제의 기준값을 선점할 수 있습니다. 경쟁사는 그 프레임 속에서만 움직일 수 있죠.

서사는 인재 영입에도 큰 역할을 합니다. S급 AI 연구원의 연봉은 1억 달러가 넘습니다. 이 정도 연봉을 받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타사보다 100만 달러 더 줄게”가 아니라 비전입니다. 이들이 회사를 선택할 때 중요하게 보는 요소는 세 가지입니다. 기술적 도전의 난이도, 회사의 개발 철학과 미션, 그리고 기술을 이해하는 리더가 있는지입니다. 올트먼의 글에는 세 가지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이재용과 정의선

삼성전자, 현대차그룹, SK하이닉스를 포함한 한국 기업은 세계적 기술력을 갖고 있지만, 그 기술이 어떤 미래를 향해 가는지에 대한 사유의 언어를 거의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갖고 있는 건 제품 사양서뿐입니다.

지난 10월 30일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서울 삼성역 인근의 깐부 치킨 매장에서 공개적으로 만났죠. 일명 ‘깐부(친한 친구를 뜻하는 속어) 회동’을 갖고 AI 동맹을 맺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삼성전자 주가는 전날보다 3.27퍼센트 올랐습니다. 현대차 주가는 9.43퍼센트 올랐습니다.

주가 상승은 엔비디아가 최신 GPU를 삼성전자와 현대차그룹 등에 우선 공급하기로 한 발표 덕분이었는데요,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듭니다. ‘GPU 우선 공급 소식을 현대차가 기자실에서 발표했다면 주가가 이만큼 올랐을까?’ 깐부 회동을 기획한 사람은 젠슨 황의 딸 메디슨 황이었습니다. ‘AI 깐부’ 결성이라는 콘셉트에 맞는 회동 장소를 직접 골랐다고 합니다. 홍보의 성공이긴 하지만, 더 크게는 독과점 논란을 피하고 피지컬 AI에 드라이브를 거는 서사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 테크 기업의 리더들은 말과 글, 때로는 행동을 통해 서사를 만들고 각국 정부와 담론 경쟁을 벌이는데, 한국 테크 기업의 리더들은 실적 발표 외에는 되도록 말과 글을 삼갑니다. 메시지를 내어 얻을 수 있는 득보다 실이 크다고 판단해서, 메시지를 내지 않거나 내더라도 과도하게 필터링해서 보도 자료 수준으로 냅니다. 서사를 위험 자산으로 취급해서 그렇습니다. 한국에 ‘은둔의 경영자’가 그렇게나 많은 이유입니다. 치킨집에선 농담도 곧잘 하는 사람들인데 말이죠.

AI, 로봇, 전기차, 반도체, 바이오, 우주 산업에서 경쟁은 더 이상 기술력과 자본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미래 기술의 방향을 누가 먼저 설명하고, 어떤 언어로 세상을 설득하느냐가 경쟁력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 테크 기업이 다음 시대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기술만 만들어선 안 됩니다. 자기 서사도 생산해야 합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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