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스타’와의 악연이 결국 끝났습니다.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서 최종적으로 한국 정부가 론스타에 돈을 물어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 마침표를 찍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분쟁은 2012년 11월에 시작되어 156개월간 진행됐습니다. 분쟁의 씨앗이 된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는 2003년 9월에 이루어졌고요. 무려 22년이 흐른 겁니다.
론스타는 사모펀드입니다. PEF(Private Equity Fund)라고도 하죠. 20세기까지만 해도 한국은 사모펀드라는 존재에 관해 잘 몰랐습니다. 1997년 IMF 외환 위기가 발생하면서 건실했던 기업들이 하나둘 휘청이자, 해외 사모펀드들이 한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죠. 무지했던 한국은 ‘나쁜 자본’의 힘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됩니다.
악연의 시작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나라는 은행도 문을 닫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조흥은행이나 한미은행 등의 간판이 사라졌죠. 하지만 외환은행은 좀 달랐습니다. 한국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 등이 40퍼센트 이상의 지분을 들고 있었으니, 실질적으로 정부 소유였습니다. 즉, 외환은행은 세금을 들여 살아난 은행이었던 겁니다. 지금과는 달리 외환 거래가 외환은행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니, 정부로서도 외환은행은 반드시 살려야 할 은행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계점이 찾아왔습니다. 버티고 버티다 현대그룹 등 대형 부실채권 문제가 결국 터져 버린 2003년 본격적으로 재무 건전성이 악화합니다. 여기에 자회사인 외환카드도 당시 ‘신용카드 대란’ 사태로 심각한 적자를 기록하죠. 이런 상황을 ‘잠재적 부실’이라고 합니다. 아직 부실은 아니지만, 자금을 추가로 수혈하지 못하면 부실로 떨어질 수 있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이 시점에서 정부는 외환은행의 상황이 매우 위험하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외환은행을 인수할 기업을 물색합니다.
정부는 먼저 국내 금융 기관이 인수하는 방식을 추진했습니다. KB국민은행이나 우리금융 등이 물망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금융권에서 외환은행을 감당하기 힘든 부실 덩어리로 봤기 때문입니다. 당시 KB국민은행의 김정태 행장이 직접 ‘정부가 부실을 떠안기려 한다’라고 이야기했을 정도니까요. 은행이 정부를 향해 직접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은행의 경영 전반은 정부의 정책과 떼어 놓을 수 없고, 따라서 금융감독원을 비롯한 정부가 일종의 ‘갑’이기 때문입니다. 사활을 걸고 외환은행 인수를 거부하려 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금융 당국은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결국 해외 사모펀드에라도 팔아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2003년 8월 론스타가 공식 인수 제안을 제출했습니다. 약 2조 원에 외환은행은 론스타에 넘어갑니다.
모두가 행복한 시나리오를 써 보죠. 론스타는 외환은행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훌륭한 경영자를 CEO로 영입할 수도 있고, 고객 유치를 위해 새로운 금융 상품을 개발할 수도 있습니다. 필요 없는 지점을 폐쇄하는 대신, 당시 성장하던 온라인 금융 쪽에 투자할 수도 있었겠죠. 그렇게 가치를 높인 외환은행을 팔아 이익을 내고 론스타는 한국을 떠납니다. 하지만 이런 시나리오는 현실이 되지 못했습니다. 론스타는 탐욕의 시나리오대로 행동했습니다.
외환은행이 갖고 있던 부동산 등 팔 수 있는 자산을 팔았습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고 있는데, 엄청난 배당금을 챙기기도 했죠. 우리나라 은행권이 경험한 적 없던
혹독한 구조조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론스타는 2012년 하나은행에 최종적으로 외환은행을 매각하고 떠납니다. 9년 만에 약 4조 6천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시세 차익을 챙기고서 말입니다. 배당 등 미리 챙긴 돈까지 합하면 5조 원 이상 벌어서 나갔습니다.
무능과 탐욕과 음모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론스타는 하던 대로 장사를 했을 뿐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시작부터 스텝이 꼬였습니다. 너무 급하게, 싸게 팔았습니다. 당시 외환은행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두고 오판했다는 겁니다. 이 위험을 따지는 기준은 ‘BIS 비율(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인데, 보통 8퍼센트 미만이면 부실 은행으로 봅니다. 당시 외환은행 내부 자료에서는 10퍼센트 정도로 전망한 반면, 금감원 보고자료에는 6퍼센트대로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위험이 과장된 겁니다. 이 과정에 어떤 ‘
음모’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희한한 일입니다.
게다가 론스타는 명백한 ‘산업 자본’입니다. 우리나라는 금융 자본을 산업 자본이 소유할 수 없게끔 하고 있습니다. 만약 SK 그룹이 은행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 보죠. 갑자기 반도체 생산 설비를 늘려야 할 때 SK 그룹 소유의 은행에서 자금을 확 빼서 쓸 수 있습니다. 엄정한 심사 없이 말이죠. 만약 이게 잘못되면, 그 은행에 예금을 넣어둔 우리 모두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산업 자본이 은행의 대주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론스타는 이런 기준을 피해 갔습니다. 알고도 묵인했다면 잘못이고, 몰라서 넘어갔다면 무능입니다. 당시의 금융 당국 관료들과 정치인들이 그러했습니다.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비싸게 팔고 나가지 못하게 막을 기회도 놓쳤습니다. 2011년, 론스타가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외환은행 자회사인 외환카드를 인수합병 하는 과정에서 주가 조작으로 회사 가치를 떨어트렸다는 혐의가 인정된 겁니다. 이로써 론스타는 은행의 대주주 자격을 잃게 됩니다. ‘최근 5년간 금융관련법령 위반으로 처벌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항목을 충족하지 못하게 된 것이죠. 이때 ‘징벌적 매각’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강제로 헐값에 지분을 매각하고 나가도록 하는 겁니다. 하지만 소액 주주 피해 등을 이유로 무산됩니다. 론스타는 하나금융에 제값을 받고 외환은행을 넘겼습니다.
우리 정부는 외환은행을 해외 사모펀드에 헐값에 팔았습니다. 산업 자본인 론스타에 은행을 팔아넘겨 법도 어겼습니다. 론스타가 주가 조작을 저질러 외환은행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이득을 다 챙기고 나갈 수 있게 방조했습니다. 이쯤 되면 론스타가 먹튀를 했다기보다는, 우리 금융 당국이 먹튀를 도와준 것에 가깝습니다.
축하할 수 없는 승리
다만, 론스타는 좀 아쉬웠던 것 같습니다. 외환은행을 비싸게 팔아넘기려고 할 때마다 우리 정부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발목을 잡을 만했습니다. 인수 자격이 되지 않는 산업 자본인 론스타에 외환은행을 헐값에 매각했던 고위 공무원들이 기소되어 법정 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금융 당국은 법원 판결을 하기 전까지는 론스타가 대주주 자격이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매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HSBC에 매각하려 했을 때, 그리고 하나금융에 매각하려 했을 때 제동을 걸었습니다. 이걸 문제 삼아 론스타가 우리 정부를 상대로 약 6조 원 규모의 손해 배상을 요구한 겁니다. 이때 잘 팔았으면 돈을 더 벌 수 있었다면서 말이죠. 2022년에는 우리 정부가 졌습니다. 전부는 아니고, 약 4000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었습니다. 선방했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당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항소를 결정했습니다. 일종의 모험이었습니다. 4000억 원으로 막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일을 키워 더 큰 배상금을 물게 될 수도 있는 주장도 나왔죠. 결과적으로 항소하겠다는 판단이 맞았습니다. 우리 정부가 완승했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이긴 적이 없습니다. 시장도, 정부도 무능해서 5조 원을 먹튀 당했습니다. 누가 뭘 잘못했는지 제대로 가리지도 못했습니다. 론스타 관련 기소에서 처벌받은 고위 공무원은 없습니다. 그래서 론스타에 외환은행을 팔아넘겼던 당시의 일은 이제 공식적으로 합법입니다. 론스타가 가져간 5조 원은 그 누구의 돈도 아니고 한국의 돈이었습니다. 모든 납세자가 그 부담을 나누어서 졌습니다.
당시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팔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경제가 또다시 크게 흔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은행이 무너지면 경제가 흔들리죠.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성급하게, 론스타에 너무 유리한 조건으로 팔지 않을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다못해 다른 사모펀드라도 경쟁에 뛰어들게 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겁니다.
하지만, 이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에 관해 당시 우리 사회는 너무 무지했습니다. 금융 당국과 금융권의 판단에 문제를 제기하고 의심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한국은 5조 원짜리 과외를 받은 셈입니다. 나쁜 자본이 있다는 것, 나쁜 자본의 작동 원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 이익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감시할 지성이 부재한 사회는 결국 먹잇감이 되어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죠.
당시 의사 결정에 관여한 고위 공무원들을 두고 ‘모피아’란 비난이 있었습니다. 재무부(MOF, Ministry of Finance)와 마피아(Mafia)의 합성어입니다. 재무부가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고 있으니 마피아 게임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모두 금융 자본의 투기에 뛰어들 생각이 없어도 그 판을 잘 알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바닥의 게임은 더욱 독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