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대만 유사시 일본 자위대의 개입 가능성을 언급하자 베이징이 날뛰고 있습니다. 중국 주오사카 총영사는 “더러운 목을 주저 없이 베겠다”고 했습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 인민의 한계선을 도발하면 강철의 만리장성에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릴 것”이라고 X에 일본어로
썼습니다.
험악한 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중국 당국은 일본 영화의 개봉을 막았고, 자국민에게 일본 여행과 유학 자제령을 내렸습니다. 일본산 수산물 수입도 중지했습니다. 소고기 수입 재개 협의도 중단했습니다. 중국은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 철회를 요구하고 있는데, 일본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사태가 길어지면 중국은 희토류 수출 봉쇄까지 고려할 수 있습니다.
국내외 언론은 중국의 전방위적 압박을 두고 “전랑외교(戰狼外交)의 귀환”이라고
평합니다. 몇 년간 뜸했던 중국의 전랑외교가 돌아왔다는 거죠. 〈전랑〉은 10년 전에 중국에서 인기를 끈 영화의 제목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늑대 전사’입니다. 중국 특수부대원이 미국 악당을 물리치는 소위 ‘국뽕’ 영화인데, 영화 제목에다 ‘외교’를 불여 상대국 심기를 건드리는 막말도 서슴치 않는 중국의 거친 외교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입니다.
그런데 전랑외교의 ‘귀환’이라고 말하려면 그동안 전랑외교가 다른 곳으로 떠나 있었던 상태여야 할 텐데, 사실 중국 외교사에서 중국이 전랑외교를 지향하지 않았던 적은 없습니다. 외교 정책의 시작도 전랑이었고, 도광양회를 하던 1980년대에도 기저에는 전랑이 깔려 있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건국 때부터 박혀 있던 전랑이라는 유전 형질이 적당한 조건을 만나 재발현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민간복을 입은 군인
전랑외교의 기원은 중국 건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49년 외세 침략과 내전을 딛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됩니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에게 총리직과 함께 외교부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쓸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국민당 시절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던 외교관들은 대부분 대만으로 떠나 있었습니다. 새로 들어선 공산 정권에는 정통 외교 엘리트가 거의 없었습니다.
저우언라이는 농민, 대학생, 인민해방군 출신을 외교관으로 뽑았습니다. 외교 경험은 없지만, 혁명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우언라이는 이들에게 외교가 무엇인지 규정해 주는 말을
남깁니다.
“외교관은 민간복을 입은 인민해방군이다.”
이 문장은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저우언라이는 외교를 투쟁의 일종으로 봤습니다. 전선만 바뀌었을 뿐이지, 싸움의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죠. 저우언라이의 선언은 훗날 ‘전랑외교’로 불리게 되는 공격적 외교의 최초 모델이 되었습니다.
1950~1970년대 중국 외교관은 마오 사상으로 무장한 외교 병사처럼 행동했습니다. 외교 성과를 올린 외교관을 “붉은 외교 전사(紅色外交戰士)”로 칭송하기도 했죠.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외교부와 해외 공관이 혁명의 연장선으로 간주되어, 대사와 영사들까지 혁명 대오에 동원되었습니다. 이들은 마오 주석 어록을 들고 혁명 구호를 외치며 선전 활동을 벌였습니다.
도광양회
1970년대 후반 마오쩌둥 사망 후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 중국은 개혁·개방을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중국 외교의 어조는 눈에 띄게 부드러워집니다. 덩샤오핑 시대는 ‘도광양회(韬光养晦)’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힘을 키우라는 뜻입니다. 점잖아 보이지만, 달리 말해 전랑이 될 수 있을 때까지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얘기죠. 이 시대에 중국 외교는 이념 우선에서 국가 이익 우선으로 전환됩니다. 국익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많은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전방위 외교를 펼칩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은 시장 개방의 속도를 높입니다. 미국의 도움을 받아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같은 해 ‘2008 베이징 올림픽’ 유치를 확정합니다. 이 시기에 중국은 국제 사회에 호감을 얻기 위해 외교적으로 온건 전략을 택했습니다. 전랑외교의 상징으로 꼽히는 자오리젠이나 화춘잉 같은 외교부 대변인이 당시 외교부에 근무했다면, 지금처럼 승진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저우언라이가 말한 ‘민간복을 입은 인민해방군’이라는 외교관의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WTO에 가입하려고 저자세로 나왔을 때, 외교관들에게 칼슘 알약이 우편으로 배달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외국에 굽신거리는 걸 보니 “허리가 약하다”고 조롱한 것이죠. 며칠 전 보도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굳은 표정으로 일본 간부를 내려다보는 중국 간부의
모습은 역사가 깊은 셈입니다.
중국의 한 외교관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군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저우언라이의 원칙을 업무 지침으로 삼아 왔다.” 외교관이 군사적 정체성을 명예와 위신으로 여기는 문화는 깊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조용히 동면하고 있는 유전자처럼 말입니다. 이 형질은 적당한 조건이 갖춰지면 언제든 다시 발현될 수 있었죠.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그 조건이 갖춰진 계기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였습니다. 중국은 서구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지켜보며 서구의 시대가 끝나고 마침내 중국의 시대가 온다는 확신을 얻습니다. 중국 경제는 갈수록 커지는데, 미국은 경제 회복이 더디고 중동에 발이 묶여 있어 예전처럼 막강하지 않았습니다. 이즈음부터 중국 내부에서 민족주의적 자신감이 급격히 고조됩니다.
2012년에 집권한 시진핑은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中國夢)’의 실현을 시대적 과제로 제시합니다. ‘아메리카 드림’에 비되는 중국몽이라는 표현을 통해 중국이 미국에 버금가는 대국으로 올라섰다는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시진핑은 당과 외교 당국에 국가의 ‘핵심 이익’과 관련한 사안에는 양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천명했습니다.
그 결과로 등장한 것이 전랑외교입니다. 중국 외교관은 전보다 훨씬 단호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개인 소셜 미디어에 상대국을 직설적으로 공격하는 글을 올리거나, 회견장에서 맞받아치거나, 상대국 내정에 간섭하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강경할수록 유능하고, 유연할수록 무능하게 여겨졌습니다. 발언 수위가 높은 외교관은 중국 내부에서 ‘애국 영웅’으로 소비되었고요.
그러나 전랑외교를 통해 중국이 실제로 얻은 건 별로 없었습니다. 중국 인민이 당장 통쾌해했을진 몰라도, 서방 주요국에서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높아졌습니다. 급기야 2021년 시진핑은 중국 관리들에게 “신뢰받고, 사랑스럽고, 존경받는” 중국 이미지를 구축하라고
주문했지만, 외교적 언사의 어조가 조금 달라졌을 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진 못했습니다.
전랑외교는 일부 외교관의 돌출 행동이 아니라, 중국 외교부의 역사적 정체성과 정치적 보상 체계에 깊이 박혀 있는 형질이기 때문입니다. 시진핑이 말로는 아무리 겸손을 강조해도, 결국 승진은 늑대처럼 상대국을 물어뜯은 사람에게 돌아갔거든요. 왕이, 친강, 화춘잉 같은 사람이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승진 속도도 엄청났죠. 발언 수위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인센티브 구조입니다.
거칠어지는 외교
역사적으로 힘이 재배치되는 시기마다 외교는 협상보다 힘 과시를 택했습니다. 패권을 지키려는 국가와 패권을 빼앗으려는 국가는 불안을 감추기 위해 힘을 보여 주며 과잉 반응합니다. 그래서 외교가 거칠어집니다. 메시지는 직설적이고 감정적이 됩니다. 외교가 부드러운 물밑 조율에서 최후통첩 같은 압박으로 이동합니다.
조용한 외교가 되살아나려면 힘의 구조가 안정적이어야 합니다. 한 국가가 압도적으로 강하거나, 세력 균형이 장기간 유지되고 있어야 합니다. 즉,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관리 가능한 경쟁으로 전환되고, 중재와 조율 기능을 가진 국제 기구가 복원되어야 합니다. 또한 외교를 국내 정치가 이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은 모든 조건이 충족되지 않습니다. 재발현된 중국의 전랑외교는 한동안 중국 외교의 얼굴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