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과잉의 시대입니다. 검색창에 질문 한 번 입력하면, 로마 공화정의 통치 구조에서 양자 역학의 수학적 공식까지 방대한 정보에 즉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생성형 AI는 그 정보를 요약하고 재조립해 줍니다. 정보가 너무 흔해져서 정보 자체의 가치는 제로(0)에 수렴하고 있습니다. 이제 경쟁력의 원천은 누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누구에게,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연결하는가입니다.
맥락의 경제
과거 디지털 경제는 누가 더 많은 데이터를 보유했는지에 따라 승패가 갈렸습니다. 플랫폼 기업은 데이터를 독점해 시장을 지배했고, 추천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과거 행동을 정교하게 분석해 소비를 자극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모델은 한계에 직면했습니다. 같은 관심사와 검색 기록을 가진 사람이라도, 상황이 다르면 필요가 달라집니다.
맥락의 경제는 이러한 변화 위에서 등장합니다. 맥락은 더 이상 주변 정보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용자의 위치, 시간, 관계, 감정, 의도 같은 복합적 신호는 기업이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 콘텐츠의 가치 함수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됩니다.
예를 들어 광고 산업이라면, ‘무엇을 봤는가’보다 ‘언제, 어디서, 왜 봤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음악 추천 알고리즘도 더 이상 ‘좋아요’ 수를 중심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용자가 비 오는 월요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어떤 곡이 필요한지를 읽어내는 것이 경쟁력이 되었죠. 기업 경영에서도 AI가 팀원들의 피로도와 분위기 같은 맥락을 파악해 업무를 조율하는 실험이 이뤄지고 있고요. 맥락을 읽어야 시장을 지배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프롬프트 없는 세계
맥락의 경제를 작동시키는 엔진은 AI입니다. 특히 최근 등장한 ‘노 프롬프트(No-prompt) AI’는 사용자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맥락을 추론해 먼저 말을 겁니다. “오늘 아침 뉴스 브리핑해 줘”라는 요청조차 필요 없습니다. AI는 위치 데이터, 시간, 일정, 전날 검색 기록, 채팅 이력, 감정 변화까지 파악해, 사용자가 ‘알아야’ 하는 뉴스를 ‘알아서’ 제공합니다.
아직은 월 200달러를 내는 챗GPT 프로 사용자에게만 제공되는 서비스인데, 초기 배포를 통해 단점을 개선한 뒤 모든 사용자에게 공개될
전망입니다. 챗GPT 펄스(Pulse) 같은 서비스는 사용자 경험을 완전히 바꿉니다. 단지 편리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시하는(소비하는) 존재에서 지시받는(소비당하는) 존재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기술이 앞서가고 인간이 따라가는 시대가 시작되는 겁니다.
콘텐츠의 액체화
프롬프트 없는 AI가 보편화되면 콘텐츠의 형식 자체가 변할 겁니다. 과거에 ‘개인 맞춤형 콘텐츠’라고 하면, 사용자의 시청 이력을 분석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추천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내로 ― 이르면 GPT-6가 나올 쯤이면 ― 뉴스와 영상 플랫폼에서 사용자별로 콘텐츠의 내용이 달라지는 진짜 개인 맞춤형 콘텐츠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기사, 하나의 사진, 하나의 영상이 단일 형태로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는 게 아니라, 사용자마다 맥락에 따라 다르게 변형되어 제공되는 겁니다. 어디에 담기는지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액체처럼, 콘텐츠가 그때그때 모습을 바꾸며 흘러다니는 액체 콘텐츠(liquid content)의 시대가 오는 것이죠.
교육 영역에서는 단일 매체인 교과서에 도전하는 실험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구글은 지난 9월
‘런 유어 웨이(Learn Your Way)’라는 프로젝트를 공개했는데, 학습자의 수준과 이해도에 따라 자동 변형되는 디지털 교재입니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알려 줄 때, 스포츠를 좋아하는 학생에게는 농구의 드리블을, 미술을 좋아하는 학생에게는 캔버스와 붓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식입니다.
뉴스 산업의 변형
뉴스 산업 역시 급격하게 변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독자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을 팔로우업 해왔다면, 새로운 관련 뉴스가 나올 때 불필요한 배경 설명은 덜어내고 심도 있는 분석을 덧붙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 주제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역사적 배경, 핵심 용어 정리, 타임라인, 인포그래픽 등을 결합한 학습형 피처 기사를 제공할 수 있겠죠.
언론사 웹사이트에 실린 텍스트 기사는 검색 결과 요약, AI 챗봇 형태의 대화형 응답, 팟캐스트 스타일 음성 내레이션, 30초 슬라이드 요약, 3분 영상 해설, AR 안경 속 텍스트 등 다양한 컨테이너에 최적화된 형태로 변환될 수
있습니다. 같은 뉴스라도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45초 요약 텍스트로, 퇴근 후 거실에서는 8분짜리 오디오로 소비하는 방식으로 전환될 수 있겠죠.
이때 뉴스 기사는 더 이상 신문 지면이라는 직사각형 틀에 갇힌 고체가 아니라, 플랫폼, 장치, 맥락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는 액체가 됩니다. 뉴스 산업은 정보 콘텐츠 생산 산업에서 정보 배포와 조립 산업으로 재편될 수 있습니다.
영상의 유동화
콘텐츠 액체화의 흐름에서 영상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먼저 변화의 압력을 받을 영역입니다. 유튜브와 틱톡 같은 영상 플랫폼은 이미 숏폼 편집 자동화 기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크리에이터가 직접 영상을 잘라내던 작업을 플랫폼이 대신 수행하는 거죠.
이 기능과 유사한 방식으로, 머지않아 원본 영상 하나가 30초, 60초, 90초, 3분, 10분 등 다양한 길이의 버전으로 존재하는 구조가 표준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같은 영상을 보더라도, 사용자의 상황, 관심, 체류 시간에 따라 누군가는 30초 요약본을, 누군가는 90초 편집본을, 누군가는 10분짜리 디렉터스컷을 보게 되는 식입니다.
길이는 시작입니다. 언어, 자막 스타일, 음성 톤, 색감, 내용 난이도, 서사 구조, 편집 방식까지 자동으로 개인화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다큐멘터리가 영어 화자의 차분한 해설 버전과 빠른 호흡의 강의 버전, 청각 장애인을 위한 고대비 자막 버전,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요약본 등으로 분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원본에서 무수한 상태로 분화된 생성본이 탄생하는 겁니다. 원본 콘텐츠는 더 이상 단일 상태가 아니게 됩니다. 콘텐츠는 고정된 형태의 제품에서, 상황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하는 서비스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액체화의 그늘
물론 콘텐츠의 액체화에는 그늘도 있습니다. 원본 콘텐츠가 지나치게 분해되고 재조립되는 과정에서, 창작자의 의도와 메시지가 왜곡될 위험이 있습니다. 윤리적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요. 또한 사람마다 서로 다른 버전의 콘텐츠를 소비하게 되면, 공유 가능한 공통의 이야기가 사라지고 공론장이 더 분절될 수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다룬 뉴스라도 사람마다 다른 버전으로 받아들인다면, 사실이 아니라 개인화된 진실이 더 강력해지는 시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역사의 긴 시간을 펼쳐 보면, 기술 발전의 역사는 과거 소수의 권력자만 누리던 것들을 일반 대중이 누리게 해온 역사입니다.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는 피할 수 없는 진보의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 변화가 인간 경험의 밀도와 이해의 폭을 넓히는 도구가 될지, 아니면 각자의 세계에 갇히는 단절의 가속기가 될지입니다. 선택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에게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