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순재(1935-2025)의 죽음을 애도하는 부고 기사가 워낙 많았으니, 여기서 굳이 재론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려는 건 뜨거운 추모 열기입니다. 이순재는 후배들에게 배우의 프로 의식과 책임감을 강조하며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공치사만 남은 시대에 직설을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배우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스승으로 여기는 이유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이어지는 추모 행렬을 보며, 한국 사회에서 ‘어른’의 위치와 역할을 다시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어른이 없는 사회를 살고 있어서, 몇 안 남은 어른의 퇴장을 이토록 애석해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들마저 떠나고 나면 앞으로 “신세 많이 질” 사람이 없으니까요.
큰 인물이 세상을 떠날 때마다 한국 사회에선 “어른이 없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어른이 없는 것은 어른이 될 만한 인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른이 행사하던 특정한 행위가 사회적으로 금지된 행위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개입, 다그침, 불편한 지적 같은 것들 말입니다. 즉, 어른의 부재는 관계의 붕괴에서 시작됩니다.
K어른
‘어른’이라는 말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구의 어른이 공적 윤리를 지키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원칙을 지키는 지도자상에 가깝다면, 한국의 어른은 유교적 전통에 따라 나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지닌 사람입니다. 즉, K어른은 내가 어긋난 길로 갈 때 ‘나를 다그치며 바로잡는 사람’입니다.
K어른은 개입할 권한이 있습니다. 상대가 들으면 불편할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죠. 동시에 K어른은 연대 책임이 있습니다. 쓴소리의 후폭풍을 함께 감당할 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쉽게 끊지 않겠다는 암묵적 약속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충족될 때 K어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그치든 욕을 하든 “네 삶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쓴소리를 들어줄, 199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신자유주의 키드’는 관계 맺기에 다르게 접근합니다. 태어나자마자 시작되는 무한 경쟁 속에서 “너의 삶은 너의 것이니, 나는 개입하지 않겠다”가 관계의 기본값입니다. 내 사다리 올라가기도 벅찬데, 남의 사다리에 훈수하고 책임까지 짊어질 여유가 없습니다. 반대로, 남이 내 사다리를 두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행위는 간섭과 폭력과 가스라이팅이 될 수 있습니다.
어른 금지 사회
근대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우선 가치로 삼습니다. 타인의 삶에 대한 비간섭을 미덕으로 여겼죠. 국가는 시민의 사생활에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원칙을 따랐고, 이 기조는 시민 상호 간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 사회는 이 원칙을 서구보다 늦게, 그러나 훨씬 급진적이고 압축적인 방식으로 수용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확산은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했습니다. 사회 전반이 경제적 합리성으로 재편되며 개인은 ‘자기 삶의 기업가’가 되어야 했습니다. 타인의 도움이나 간섭 없이 자기 이익을 스스로 추구하도록 독려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돌봄과 훈육, 개입과 관계의 윤리는 시장 관점에서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치부되었죠. 그 자리는 법, 규범, 서비스 체계가 대신하게 되었고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옆집 사는 사람과 모른 척하는 것이 예의처럼 여겨지고, 상사나 선배도 사적인 조언을 꺼리는 분위기는 이러한 배경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물론 폭력적 개입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비대칭 관계를 잠재적 폭력으로 간주하는 사회는 책임을 감수하는 어른의 행위까지 함께 위축시킵니다.
결국 한국 사회는 지난 30여 년간 어른의 기능을 의도했든 아니든 구조적으로 제거해 왔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어른이 사라진 사회가 아니라, 어른이 금지된 사회입니다. 서로의 삶에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어른 대신 코치, 멘토, 전문가만 필요하게 됩니다.
전문가와 알고리즘의 시대
이 모순은 자기 계발, 코칭, 상담, 멘토링 시장의 팽창 속에서 독특하게 표출됩니다. 사람들은 이제 안전하게 포장된 개입을 구매합니다. 과거라면 마을 어른이나 선배가 나서서 해결하던 청소년 문제는 사법 제도나 전문 상담가의 영역이 되었고, 가정 내 갈등조차 가족 회의나 친지의 중재 대신 법률 조언이나 유료 상담 서비스로 처리됩니다.
이 모든 것은 관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서비스’입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줄 만큼의 깊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코치·멘토·전문가는 기술과 정보를 제공할 뿐 관계의 후과를 감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를 혼내지 않고, 깊게 개입하지 않으며, 나의 삶에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최근 들어 인간관계의 알고리즘화마저 진행되고 있습니다. AI는 내가 누구와 연결될지, 어떤 정보를 접할지 결정합니다. 인간적 만남의 우연성과 친밀감은 계산된 매개로 대체됩니다. 요즘 10대는 삶의 고민을 부모나 선배가 아니라 온라인 커뮤니티나 AI 챗봇에 털어놓기도 합니다.
물론 알고리즘은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해서, 성가신 K어른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이용 약관에 따라 제공되는 서비스일 뿐입니다. 지속적 책임이나 따뜻한 관심과는 거리가 멉니다.
관계의 서비스화와 알고리즘화가 진행될수록, 인간 대 인간의 돌봄과 충고는 미덕이 아니라 구시대적 간섭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비간섭이 새로운 예절이자 미덕처럼 인식되면서, 누구도 타인의 삶에 충고하거나 관여하지 않는 문화가 더욱 공고해집니다.
그 결과 ‘남에게 민폐만 끼치지 않으면 괜찮은 사람’이라는 통념이 자리 잡습니다. 이러한 소극적 윤리관은 공동체적 선(善)을 추구하거나, 서로를 이끌어 주는 관계의 미덕을 배제합니다. 잘못을 봐도 지적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해 보여도 선뜻 나서지 않는 사회에서 공동체의 도덕적 면역력은 점차 약화됩니다.
개입할 용기
이런 구조 속에서 어른이 할 수 있는 행위 — 다그침, 불편한 진실 전달 같은 개입 — 는 리스크가 높은 감정 노동입니다. 그래서 어른은 자연스럽게 퇴장합니다. 그 자리를 이제 알고리즘과 매뉴얼, 가이드북, 온라인 강의, AI 모델이 채웁니다. 이들은 절대 욕하지 않고, 다그치지 않고,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문득 이런 질문에 다다릅니다. “이렇게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데, 왜 나는 별로 변하지 않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관계에는 반드시 어느 정도의 개입과 불편이 따릅니다. 이제는 누구도 나를 심하게 혼내지 않지만, 누구도 내 인생에 멱살 잡고 뛰어들지도 않습니다. 몇 안 남은 주위의 어른이 떠나갈 때마다, 정서적 고아가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