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적 평가와 장기적 시간관념

bkjn review

한 인간을 제대로 평가하는 데 필요한 정보와 시간은 언제나 ‘그때의 나’보다 늦게 도착합니다.

회고적 평가와 장기적 시간관념

2025년 12월 1일

역대 대통령의 공과(功過)를 물은 여론 조사에서 ‘잘한 일이 많다’는 긍정적 평가 1위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돌아갔습니다. 한국갤럽이 11월 25일부터 27일까지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8퍼센트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잘한 일이 많다’고 답했습니다. ‘잘못한 일이 많다’고 답한 사람은 15퍼센트였습니다.

조사 결과를 요약하면, 긍정 평가는 노무현,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순이었고, 부정 평가는 윤석열, 전두환, 박근혜, 노태우 순이었습니다. 한국갤럽은 2012년부터 이 조사를 해왔는데, 10년 사이에 김영삼,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긍정 평가가 늘고 부정 평가는 줄었다고 밝혔습니다. “모종의 재평가가 이루어진 듯하다”는 분석입니다.

그런데 사실 ‘모종의 재평가’의 끝판왕은 노무현 전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 전반기부터 국정 운영 지지율이 30퍼센트를 밑돌았습니다. 노무현은 논쟁적 발언으로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과도 갈등했고, 한미 FTA와 이라크 파병처럼 지지층이 반대하는 정책을 밀어붙였습니다. 여당과 야당과 언론과 시민 사회가 모두 등을 돌리며, 집권 4년 차에 지지율이 역대 최저인 5.7퍼센트까지 떨어졌습니다.

당시 온라인에서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이 유행이었습니다. 연예인 커플의 결별 기사에도 난데없이 노무현을 탓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회사에 지각해도, 버스를 놓쳐도, 식당 밥이 맛없어도 노무현을 탓했습니다. ‘놈현스럽다’는 신조어까지 나왔죠. ‘기대를 저버리고 실망을 주는 데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긍정 평가 1위입니다.

단기 평가와 장기 평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극적인 평가 반전을 지켜보며 좋은 정치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대통령 재임 중 지지율은 단기 평가이고, 퇴임 후 지지율은 장기 평가입니다. 둘은 평가 기준이 다릅니다. 재임 중 지지율은 실업률, 물가, 집값, 환율처럼 즉각 체감되는 경제 지표와 대형 참사, 재난, 측근 비리 같은 단기 충격에 바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퇴임 후에는 ‘회고적’ 평가가 이루어집니다. 미국 국민의 전직 대통령 평가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지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재임 중 평가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은 경제였지만, 퇴임 후 평가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은 전쟁이었습니다. 사후 평가에서 전쟁 변수의 영향력은 경제 변수보다 거의 두 배 높았습니다. 잘못된 전쟁을 벌이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용서받지 못하는 겁니다.

한국은 미국과 달리 해외에서 전쟁을 벌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연구를 한국적 맥락으로 해석하자면, 대통령 평가는 처음에는 물가·실업 같은 경기 지표에서 출발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장기적·구조적 변화, 다시 말해 국가 운영의 방식 자체를 바꾸는 일로 관점이 이동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대의 사람들에게 절박했던 경기의 등락은 결국 잊히고, 현재 세대에 지속적 영향을 미치는 민주주의 확대와 권력 구조 개편 같은 것들이 더 큰 무게를 갖게 됩니다.

이러한 구조 개혁은 이해관계가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어, 단기 성과에 연연하거나, 정치적·개인적 유불리를 먼저 따지거나, 인기 영합 정책을 통해서는 만들어 내기 어렵습니다. 김영삼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군사 정권 이래 역대 모든 정부가 검찰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구조 개혁은 원칙을 붙잡고 긴 시간 쏟아지는 비판 혹은 무관심을 견뎌야 겨우 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대통령 평가는 절대 평가가 아닙니다. 비교 정치 속에서 재구성되는 상대 평가입니다. 후임 대통령이 권위주의와 지역주의 타파, 참여 민주주의 확대 같은 영역에서 어떤 성과를 냈는지가 전임자의 평가를 끌어올리거나 깎아내립니다. 그때는 당연하게 여겼던 전임자의 미덕이나 흠결이 뒤늦게 부각될 수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헌정 질서를 파괴해 탄핵된 대통령이 두 명이나 되니,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긍정 평가 1위를 유지할 것 같습니다.

결국,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기억은 현재의 국민 정서와 정치 지형과 맞물리며 평판을 재구성합니다. 20년 전 노무현은 실패한 개혁 정치인이었지만, 지금 노무현은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내려놓고 탈권위주의에 앞장선 정치인으로 재해석됩니다. 여기에 퇴임 이후의 비극적 결말은 정서적 가중치를 더합니다. 그렇게 노무현은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맞게 됩니다.

장기적 시간관념

이제 지도자 말고 지지자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리 국민 두 명 중 한 명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뒤집었습니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를 입에 달고 살던 그때의 우리가 당시 알지 못했던 뭔가를 뒤늦게 깨달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지자의 변덕을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 인간을 제대로 평가하는 데 필요한 정보와 시간은 언제나 ‘그때의 나’보다 늦게 도착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타인에게 성급한 최종 판결을 내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지금 나에게 쏟아지는 칭찬이나 비난 역시 확정된 판결이 아니라 잠정적 진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역할이 역사 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지는 상당 부분 나중에 결정될 일이라는 묘한 겸허함마저 생깁니다.

지금의 평가는 대개 단기 지표에 의존합니다. 무시할 수 없는 피드백이지만, 그 평가는 인생의 최종 결산표가 아닙니다. 장기적으로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지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입니다. 방향이 옳다면,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 시간이 지나 최고로 기억되듯, 우리 역시 언젠가 근사한 뭔가를 이루어 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2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방대한 로마 역사를 20여 년에 걸쳐 정리해 《로마 제국 쇠망사》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이 작업이 최소 20년은 걸릴 장기 프로젝트가 될 것을 알고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인류사에 남는 대작이 탄생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유효할 선택인지 끊임없이 되묻고, 당장의 유혹과 장기적 방향이 충돌할 때 후자의 편에 서는 횟수를 늘린다면, 결국 인생은 걸작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서사를 너무 일찍 확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진짜 평가는 언제나 나중에 도착합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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