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가치가 무섭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현상인데, 한국의 원화 가치 하락은 좀 더 무섭습니다. 2020년 12월로 시간을 돌려보죠. 1달러는 1080원대였습니다. 5년 만에 1470원대 후반까지 왔습니다. 원화의 가치가 달러 대비 대략 30퍼센트 증발한 겁니다. 원화를 중심으로 경제생활을 하는 개개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얘깁니다.
통화 당국이 나섰습니다.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있죠. 그런데 그 과정이 참 소란스럽습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환율 폭등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로 ‘서학 개미’를 지목하면서, 금융 당국의 실패를 일반 투자자 탓으로 돌리려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겁니다.
이 불화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이 총재의 ‘거침없는’ 발언입니다. 하지만 잘못이 오롯이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국가와 개인이 서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와 개인, 그리고 기업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으니, 통화 정책 수장의 발언에서 적대적인 분위기가 감지되는 것이죠. 정부와 국민은 이제 한 팀이 아닙니다.
저금리 시대의 오징어 게임
언젠가부터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낮은 금리’에 대한 열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정부가 돈을 풀어 경제를 띄우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정책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극화가 심화하면, 각종 세금 제도나 시스템을 정비하기보다는 빈곤층에 복지 혜택을 늘리는 방법을 택하는 식입니다. 둘 다 중요하지만, 후자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시스템을 고치려면 절차가 복잡하고, 반대 의견도 나옵니다. 반면, 정부가 국민을 위해 돈을 쓰면 당장 손해 볼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산업을 진흥하기 위해, 이익 집단 간의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정부는 각종 지원금과 보조금을 지급합니다. 재정 지출은 정치적으로 매우 안전한 정책입니다.
돈을 쓸 곳은 넘칩니다. 세금만 걷어서는 지출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정부가 채권을 발행하는 이유입니다. 빚을 지는 겁니다. 문제는 정부의 지출이란 것이 늘어나긴 쉬워도 줄어들긴 어렵다는 겁니다. 세금을 올리기는 더 어렵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원금과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낮은 금리에 목을 맬 수밖에 없습니다. 금리가 오르면 갚아야 할 이자 부담도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만든 저금리 상황이 국민에게는 불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열심히 일해서 모은 월급을 꼬박꼬박 저금하는 성실한 사람들에게 그렇습니다. ‘
금융 억압(financial repression)’입니다. 예를 들어 금리가 2퍼센트인데 물가상승률이 3퍼센트라고 가정해 보죠. 이 경우 실질 금리는 -1퍼센트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돈이 사라지는 겁니다.
내가 직접 국채를 사서 들고 있지 않아도 같은 효과입니다. 저축을 한 사람들은 은행이나 연금 상품, 보험 상품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정부채를 들고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즉, 정부가 억지로 낮은 금리를 유지하면서 국채를 계속 발행하면, 열심히 저축한 사람들의 실질적인 부는 줄어듭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세금을 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대신 정부를 포함한 채무자들의 이자 부담이 가벼워지겠죠.
표집의 기본
이런 환경은 바닥부터 자산을 축적해 올려야 할 청년층에게 함정으로 작동합니다. 윗 세대에게 배운 대로 성실하게 일하며 절약하고, 꼬박꼬박 적금을 붓는 방식으로는 점점 더 가난해질 뿐이죠. 단, 이 함정을 피할 방법이 있습니다. 가진 돈을 예금 등의 안전 자산에 묶어두지 않고 투자하는 겁니다. 물가상승률을 상회하는 수익률을 거두면 이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임금을 상승시키는 방향으로 전략을 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고 있는 가운데 연봉을 매년 파격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단순히 성실해서는 안 됩니다. 특출나야 하고, 뛰어나야 합니다. 바이오 해킹을 통해 능력치를 최대로 끌어올리고 미라클 모닝을 하며 자기 계발에 몰두하는 사람 중 많은 숫자는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탈락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중입니다.
언론에서 지적하는 ‘빚투’나 ‘영끌’도 이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입니다. 임금 소득을 모아 만든 종잣돈으로는 필요한 만큼의 생존 포인트를 딸 수 없을 것이란 계산 때문입니다. 언제 오를지 기약도 없이 박스권에만 갇혀 있는 국내 주식 시장을 떠나 될 만한 기업의 가치가 빠르게 인정받는 미국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투자도 같은 맥락입니다.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코스피 성장률은 약 9퍼센트 수준이었습니다. 같은 기간 S&P 500은 97퍼센트, 나스닥은 115퍼센트 성장했고요. 돈을 벌 수 있는 곳을 적극적으로 찾아가지 않으면 가난의 수렁으로 빠지는데, 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이 게임의 법칙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다만, 누군가 삶의 문제가 아니라 거시 경제를 나타내는 숫자들로 알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그러니 한 청년에게 왜 해외 시장에 투자하는지 물었을 때 ‘쿨하기 때문’이라는 답을 듣고도 별 의심을 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 이야기를 기자들 앞에서
인용할 만큼 말이죠. 다만, 그 청년이 대표성을 가지는 표본인지에 관해서 얼마나 숙고했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히는 이 총재가 통계학의 기본을 모르지는 않겠지요.
문제의 핵심
부동산에 목메지 말고 주식 시장에 투자해서 나라도, 기업도, 투자자도 같이 부자 되자는 것이 이번 정부의 기조입니다. 처음 경험하는 ‘투자 권하는 정부’입니다. 그런데 통화 정책의 수장은 그 ‘투자’를 해외에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이 아닌 미국에 개미들의 돈이 흘러들면, 그건 투자가 아니라 달러 유출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해외 투자의 근거가 청년들의 ‘겉멋’이라면, 더욱 경계해야 하겠죠.
그렇다면 우리 주식 시장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시스템은 정비하고 있습니다. 상법 개정안을 추진하면서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 확대’, ‘집중 투표제 도입’ 등 우리 주식에 투자한 사람도 적절한 수익을 얻어갈 수 있도록 기반을 닦고 있습니다. ‘자사주 소각 의무’를 담은 3차 상법 개정안도 올해 안으로 통과될
전망입니다. 국가와 투자자가 한 팀인 것 같은 분위기죠. 하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금리 인하는 주식 시장에 좋은 시그널입니다. 더 많은 투자금이 시장으로 유입되면 주가는 상승 그래프를 그릴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상황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미국과의 금리차가 너무 심하게 납니다. 2025년 11월 기준으로 미국의 기준금리는 3.75∼4.00퍼센트로 우리나라의 2.5퍼센트보다 1.25∼1.5퍼센트 포인트 높습니다. 꽤 큰 차입니다.
금리가 차이 나면 환율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글로벌 투자자로서는 금리가 높은 나라에 투자해야 기대 수익률도 높아집니다. 원화 투자 상품보다는 달러 투자 상품의 매력도가 올라가는 겁니다. 우리 주식 시장에는 악재로 작용합니다. 더불어 원화는 팔고 달러를 사서 나가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원·달러 환율 상승 요인으로 작동합니다. 결국, 주가 부양도 환율 안정도 미국 연준이 금리를 내리거나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려야 제대로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한국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행은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고공행진 하는 환율에 비상이 걸렸으면서도 금리를 올리지 못합니다.
進退兩難
미국이나 일본, 유럽 국가들과 우리나라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50퍼센트대입니다. 일본은 250퍼센트, 미국은 120퍼센트 수준이니 양호한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이자에 쫓겨 금리를 눌러야만 하는 상황은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가계 부채와 기업 부채입니다.
우리나라
가계 부채 비율은 GDP 대비 100퍼센트에 육박합니다. 단연 세계 최상위권입니다. 한국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 빚더미에 앉아 있는 겁니다. 금리를 올리면 당장 이자 부담이 늘어나고 생계에 지장이 생기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그래서 정부도 통화 당국도 금리를 올리기에 부담스럽습니다. 유권자의 표심이 돌아섭니다. 정부가 곤란합니다. 소비가 위축되면서 경기는 더욱 가라앉습니다. 통화 당국이 곤란합니다.
뇌관은 또 있습니다. 가계 부채가 개인의 문제라면,
부동산 PF를 필두로 한 기업 부채도 만만치 않습니다. 저금리 때 돈을 빌려 공사판을 벌여 놨는데, 금리가 올라 버리면 건물을 올려도 팔리지 않습니다. 갚아야 할 이자 부담도 불어납니다. 이 문제는 태영건설 워크아웃 사태로 이미 한 차례 환부가 드러난 적 있습니다. 잘못 터지면 지방 은행과 제2 금융권에서부터 도미노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역대 최대를 경신하고 있는
자영업자 대출 및 연체액도 같은 딜레마에 묶여 있죠.
금리를 올리면 함께 따라올 경제적 충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죠. 한국은행의 역할은 그 충격의 정도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금리 인상 시기와 정도를 잘 결정하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가난해지는 세상인데, 해외 주식에 투자했다고 투자자 탓을 할 일은 아닙니다. 지정학적 리스크로 언제 달러 투자를 요구받을지 모르는데, 기업이 외환을 들고 있다고 목을 죌 일도 아니고요. 애당초 국민과 기업이 국가 경제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발상이 틀렸습니다. 지금 경제 상황에서 국가와 국민은 한 팀일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