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30일, 부산 APEC 회의장에서 열린 미·중 정상 회담이 남긴 것을 복기합니다. 양국 정상이 6년 만에 만난 정치 이벤트 정도가 아니라, 중국이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게 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회담은 표면적으로는 양국이 벌이던 무역 전쟁의 휴전 선언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상호 양보안을 내놨죠.
미국은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인하하고, 9월 말에 발표했던 대중 기술 수출 규제 확대를 1년간 유예하기로
했습니다. 중국도 희토류 수출 통제 조치를 1년간 연기하고, 미국산 대두 수입을 재개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양국은 입항 수수료 부과 등 상대국의 조선·해운 산업을 겨냥해 시행한 조치를 1년간 유예하기로 했습니다.
트럼프는 회담 직후 “10점 만점에 12점짜리 회담”이었다고 자평했습니다. 미국이 원하는 걸 다 얻었다는 얘기인데, 전문가들의 평가는 다릅니다. 미국은 원래 미국이 갖고 있던 걸 겨우 다시 얻게 되었고, 중국은 새 판 짜기를 완성할 시간을 벌었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트럼프 말만 들으면 미국이 외교적 승리를 거둔 것 같지만, 사실 시진핑의 계산된 전략이었다는 거죠.
중국은 양보를 한 것이 아닙니다. 레버리지는 유지한 채 취약점을 관리하기 위해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을 뿐입니다. 전략적 인내로 일관한 시진핑과 달리, 트럼프는 즉흥적 거래를 선호해 왔습니다. 이번 휴전을 중국의 후퇴로 오인해서는 안 됩니다. 중국은 이번 회담을 통해 게임의 규칙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재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진핑의 레버리지 전략
시진핑이 트럼프를 상대로 단기 거래에 구속되지 않고 새 판 짜기 전략을 펼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공급망, 지정학, 심리전, 제도적 프레임을 포괄하는 거시적 구상이 있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공급망 지형의 변화였습니다. 미국이 주도해 온 세계화 덕분에, 복잡하게 얽힌 글로벌 가치 사슬(GVC)에서 중국은 핵심 고리를 장악했습니다. 미국이 첨단 칩 수출을 차단하자, 중국은 전 세계 채굴량의 70퍼센트, 정제량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희토류 공급을 죄며
맞받아쳤습니다. 디스프로슘, 이트륨 같은 희귀 광물은 미국 전투기와 첨단 기기에 필수적입니다.
중국은 자신이 배제된 공급망을 역으로 이용해 “미국이 첨단 칩을 끊으면, 우리는 그 칩의 원재료를 끊겠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희토류는 미국 방위 산업과 트럼프의 제조업 회귀 구상을 동시에 흔들 수 있는,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중국만의 강점입니다. 앞으로 최소 십수 년간 중국은 이 유리한 패를 쥐고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시진핑은 트럼프의 불확실성을 역이용했습니다. 트럼프가 거침없는 언행과 동맹을 무시하는 행태로 서구 체제를 균열시키는 사이, 시진핑은 스스로를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파트너’로 포지셔닝했습니다. 트럼프가 서구 동맹을 깨고 다니는 동안, 중국은 다자 무대에서 영향력을 키우며 미국의 공백을 메우고 다녔습니다.
이번 회담을 앞두고 중국은 트럼프의 변덕을 일정 관리로 묶어 두는 전략을 폈습니다. 내년 4월 트럼프의 방중, 12월 시진핑의 방미 같은 굵직한 이벤트를 약속해서, 트럼프를 완벽히 예측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의 계획성은
확보했습니다. 언제 판을 깰지 모르는 트럼프를 관리하며 시간을 번 겁니다. 트럼프 정부는 적어도 내년 말까지는 두 번의 정상 회담을 무사히 치러내는 데 집중하게 될 겁니다.
현재의 미·중 경쟁은 무역, 기술, 이념, 외교, 군사가 복잡하게 뒤엉킨 양상입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반도체 패권 다툼, 공급망 디컬플링, AI 기술 경쟁 등 여러 이슈가 얽혀 있어, 한쪽 분야에서 양보한다고 해서 전체 관계를 안정시킬 수 없습니다. 과거 냉전과 달리 모든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는 향후 수십 년에 걸친 경쟁입니다.
이런 다층적 환경은 시진핑에게 기회 공간이 되었습니다. 일대일 담판을 즐기는 트럼프가 다자 관계에서 발을 빼는 사이, 중국은 GDI(글로벌 발전 이니셔티브), GSI(글로벌 안보 이니셔티브), GCI(글로벌 문명 이니셔티브) 같은 다자 구상과 유엔 무대를 활용해 자국에게 유리한 국제 규범을 주도적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이전의 미국이 보편적 가치로 질서를 유지했다면, 시진핑은 실리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며 신흥국과 개발 도상국을 포섭하고
있습니다.
경제와 기술 면에서도 중국은 태양광, 배터리, 철강, 전기차, 통신 인프라 등에서 공급망 주도권을 장악해 세계 각국의 미국 의존도를 낮추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이 ‘뒷마당’으로 여기는 중남미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중국은 동시다발적으로 얽혀 있는 이슈를 다면 전략으로 돌파하며, 단기 성과보다 구조적 우위를 쌓는 데 주력해 왔습니다.
임기가 정해진 트럼프와 달리, 종신 집권을 향해 가고 있는 시진핑은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새 판을 짜고 새 규칙을 세우며 미국의 전통적 강점을 무력화해 왔습니다. 10월 말 부산에서 시진핑은 트럼프에게 즉각적 양보 카드를 몇 개 쥐여주는 대신, 판 전체의 흐름을 중국 쪽으로 옮기는 장기전을 택했습니다. 트럼프는 그 미끼를 물었고요.
시간의 비대칭성
트럼프는 ‘성공적인 회담’이었다며 승리를 선언했지만, 외교가의 평가는 냉랭합니다. 《가디언》은 “트럼프의 몽둥이는 베이징이 맞대응하자 힘을 잃었다”며 “트럼프는 먼저 눈을 깜빡이고는 시시한 결과를 대단한 승리인 양 포장했다”고
꼬집었습니다. 실제로 미국은 ‘50퍼센트 룰’ 유예 등 핵심 기술 통제에서 비가역적 양보를 했지만, 중국의 양보는 가역적입니다.
중국의 희토류 수출 재개나 대두 구매 약속은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철회 가능한 양보입니다. 중국이 희토류 수출을 다시 잠그면 미국은 회토류를 확보할 방법이 없습니다. 반면 미국은 수출 통제 강화를 1년 유예하기로 했습니다. 미국은 9월 29일 중국 기업이 절반 이상 지분을 보유한 자회사까지 수출 규제 대상에 올렸는데, 이걸 풀어준 겁니다. 첨단 기술이 한번 중국 기업에 들어가면, 그 기술은 중국의 것이 됩니다. 미국이 1년 뒤에 규제를 재개해도 이미 넘어간 기술과 노하우는 회수할 수 없습니다.
중국은 미국에 현상 유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구조적으로 미국을 따라잡을 시간을 챙겼습니다. 미국은 중국이 미국을 넘어설 시간을 제공하는 대가로 희토류 수입과 콩 수출을 챙겼습니다. 게다가 이번 회담에서 중국의 밀어내기 수출이나 대만 문제 같은 근본적인 쟁점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국내 정치용 ‘거래 실적’ 만들기에 치중했습니다.
실제로 트럼프는 이번 아시아 순방에서 각국과 연달아 무역 합의를 발표하며 자신의 협상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동맹국들은 트럼프가 협상 타결을 발표한 이후에도 회담 결과를 담은 합동 설명 자료를 쉽게 내놓지 못했습니다. 트럼프가 회담 전에 했던 말, 회담에서 한 말, 회담 후에 하는 말이 다르니, 양국 실무진들이 세부 내용에서 합의에 이르기 어려웠던 겁니다.
그 틈을 파고드는 건 중국입니다. 미국과 무역 마찰을 겪고 있는 인도는 앙숙 중국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인도 총리는 인도와 중국이 “경쟁자가 아닌 파트너”라고
단언했죠. 트럼프가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라고 조롱했던 캐나다 역시 대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눈앞의 이익만 보고 달려드는 트럼프의 거래적 접근이 중국에 장기적 이익을 안겨준 셈입니다.
시진핑은 트럼프의 조급함을 읽었습니다. 트럼프의 관세와 제재 공세는 오히려 중국이 미국 경제와 트럼프를 얼마나 흔들 수 있는지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국의 희토류 통제는 미국 제조업의 취약성을 드러냈고, 중국의 미국산 농산물 구매 중단은 트럼프의 지지 기반인 농민을 타격했습니다. 결국 트럼프는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고요.
결과적으로 중국은 희토류 카드를 한 번 꺼내들어 미국 관세 10퍼센트포인트 인하와 자국 기업 제재 유예를 얻어냈습니다. 그러고도 잃은 건 거의 없습니다. 중국은 첨단 기술이라는 미국의 급소는 쉽게 공략되지만, 원자재 생산이라는 중국의 급소는 쉽게 공략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첨단 칩은 금방 구식이 됩니다. 그러나 희토류 공급망 구축에는 최소 10~15년은
걸립니다. 트럼프가 단기전은 가져갔을지 몰라도, 시진핑은 장기전의 승기를 잡았습니다.
글로벌 질서 재편
미·중 부산 정상 회담은 글로벌 질서 재구성의 서막이었습니다. 한때 두 나라는 관세에 관세로 맞서며 핑퐁 게임을 벌였지만, 이제 중국은 방향을 틀어 규칙과 체제 경쟁을 택한 것 같습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만든 국제기구와 규범에서 미국의 이탈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그 공백을 파고들어 중국의 규범과 이익을 반영한 새로운 다극적 질서를 심고 있습니다. 시진핑은 보편 가치 대신 이익 공동체에 기반한 파트너십을 제안하며 유엔 같은 무대에서 ‘문명’과 ‘발전’ 담론을 국제 표준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미국도 손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트럼프 정부는 첨단 기술에서 중국을 견제하며 나름의 레버리지를 유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중국은 더 이상 그 옛날 납작 엎드려 힘을 키우던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이 아닙니다. 중국의 기술 추격 속도가 빨라 미국의 우위가 예전만큼 뚜렷하지 않습니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도 “중국 칩이 미국에 불과 나노 초 차이로 뒤처져 있다”고 했죠.
게다가 에너지에서 전기차까지 친환경 기술 공급망에서는 중국의 역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트럼프 정부가 국제 기후 협력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중국이 국제 사회의 리더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녹색 전환에 중국산 기술과 제품이 더 보급되면, 결국 중국 표준이 세계 표준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중국의 희토류 통제 완화는 미국에만 국한되어 있어, 유럽 등 동맹국은 여전히 중국발 공급망 리스크에 노출된 상태입니다. 중국은 서방을 갈라치기 위해 언제든 공급망 무기를 다시 꺼낼 수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에서, 아시아와 글로벌 사우스가 주역으로 부상하는 다극화 체제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미국 편만 들어도 중간은 가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세계 각국은 강대국들의 경쟁에서 맹목적으로 동맹국을 추종하지 않고 ‘헤지’ 전략을 취할 겁니다. 시점에 따라, 쟁점에 따라 입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미국과 새로운 유형의 안정을 자처하는 중국의 대조는 많은 국가를 새로운 셈법으로 이끕니다. 미국과 중국 어느 나라도 단독으로 세계를 주도할 수 없는 복잡한 시대에는 한국 같은 중견국의 역할이 커질 수 있습니다. 미국이 떠난 자리를 보며 한탄하기보다, 우리가 먼저 나서서 중견국끼리 연대하는 새로운 다극 질서를 형성해야 합니다. 외교의 레이어를 여러 겹으로 쌓아, 비는 곳이 없게 하고 두꺼운 곳은 더 두껍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시점에 따라, 쟁점에 따라 달라질 상대국의 지지를 최대한 확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