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께 셋째를 출산한 엄마가 있습니다. 이름은 춘삼이, 제주 앞바다에 살고 있는 남방큰돌고래입니다. 바다의 수많은 생명 중에서도 춘삼이의 출산 소식이 유독 인간종 사이에 회자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춘삼이의 삶은 한때 몹시 불행했는데, 그 이유가 인간의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2009년 동료들과 함께 납치된
춘삼이는 돌고래 쇼 시설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구조된 것은 2013년이었고, 세 달간의 적응 훈련을 마친 후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삶을 쌓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에 우리는 마음이 움직입니다. 춘삼이도 그런 존재입니다. 범죄 생존자 말입니다. 셋째를 낳았다는 소식은 바다에 잘 적응해 미래를 향해 계속 헤엄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인간은 그렇게 짐작합니다. 좋은 소식이지요.
다만, 춘삼이가 구조되어 바다로 돌아가는 과정은 몹시 길고 험난했습니다. 인간의 눈에 춘삼이는 ‘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법정에서는 춘삼이가 납치되고 강제 노역했던 사실이 다뤄진 것이 아니라 불법으로 포획되고 매매되었다는 점이 다뤄졌습니다. 바다로 돌아가는 길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춘삼이는 ‘해방’된 것이 아니라 법원에 의해 ‘몰수’되었습니다. 그리고 검찰이 ‘
방류’라는 특별처분을 선택하는 형식으로 자유를 되돌려 받았습니다. 인간종으로서는 전례 없는 선택이었고요.
춘삼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것은 인간이 정한 ‘법률’이라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법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종전과 다른 시각으로 판결하고 집행해도 될지를 놓고 인간은 치열하게 토론했습니다. 당시 시민위원장을 맡았던 최재천 교수는 ‘우리 인간이 일방적인 갑이고 자연을 을로 보는 오만함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기회’라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시스템이 좀 더 현명했다면, 인간이 아닌 종과 공생하는 방법을 담고 있었다면 춘삼이의 불행은 좀 더 빨리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 불행이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좀 더 현명한 시스템, 생태주의에 기반한 세계란 뭔가 멀고 손에 잡히지 않는 이데아처럼 느껴집니다. 실현되기에는 너무 순진하고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그럼에도 그 순진하고 이상적인 목적을 위해 무언가를 하라고 부추기는 책이 있습니다. “거대한 전복은 침대에서 돌아눕는 움직임만큼이나 간단하다”라면서 말이죠.
생산과 생존 사이의 선택
춘삼이의 이야기는 미담이 아닙니다. 싸우고 울고 드러눕는 일이었습니다. 소리 지르고 화내는 일이었죠. 돌고래들의 해방까지 함께 헤엄쳤던 지역 주민, 법률가, 과학자, 연구자, 시민단체 모두 그저 선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상식을 의심해 뒤집고자 한 유별난 사람들이었죠. 프랑스의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한국에 있었다면, 이들에게 아마 ‘녹색 계급’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라투르는 《가디언》이
부고 기사에서 ‘지구 자원을 더 잘 돌봐야 한다고 믿은 철학자’로 평가한 인물입니다. 1947년생 라투르가 1990년생 니콜라이 슐츠와 함께 쓴 책이《녹색 계급의 출현》입니다. 라투르가 세상을 떠나기 9개월 전이었던 2022년 1월 출간됐죠. 아주 짧은 76개의 메모를 엮었습니다. 형식만 봐서는 쉽게 읽힐 것 같지만, 막상 펼쳐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운 용어나 개념이 가득한 책은 아니지만, 독자를 설득하려 드는 책입니다. 한 페이지씩 읽을 때마다 저자의 주장이 맞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 책의 시작점에는 탄식 같은 질문이 있습니다. 왜 생태주의는 수많은 사회운동 중 하나에 머무를 뿐,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신자유주의처럼 정치 지형을 조직하는 중심 이념으로 올라서지 못했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러면서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는 이와 보존하려는 이를 분류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중의 후자는 새로운 계급, 즉 ‘녹색 계급’입니다. 녹색 계급은 대전환을 통해 21세기 생태 위기를 해결하는 역할을 부여받습니다.
고전적인 의미의 ‘계급’은 생산 수단이나 소득을 기준으로 나뉩니다. 계급이 달라도 생산량을 늘리는 데에는 동의했죠. 더 많이 생산하면 더 잘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신기루 같은 현상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생산하다가는 여기, 이 지구에서 계속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녹색 계급이 등장합니다. 생산이 곧 파괴로 이어진다는 점을 깨닫고, 생성과 존재의 조건을 지키려는 사람들입니다. 기존의 성장 문법, 발전 이데올로기로는 포섭되지 않죠. 돌고래를 잡아 쇼를 열면 돈이 벌립니다. 지구의 화석 연료, 토지, 해양을 끝없이 쥐어짜는 힘입니다. 하지만 녹색 계급은 이 힘에 반대합니다. 돌고래를 동료 지구 생활자로 인식합니다. 땅과 바다, 도시를 포함한 이 지구의 거주 가능성을 되살리고자 합니다.
새로운 상식과 정의
라투르와 슐츠는 녹색 계급이 이미 여기저기에 존재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계급을 깨닫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농부에 관해 생각해 보죠. 기후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계급은 이제 녹색 계급입니다. 지금 이대로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을 몸으로 경험하는 계급 말이죠. 다만, 이런 경험들은 각자의 이슈에 따라 흩어져 있습니다. 이 흩어진 조각들이 하나의 계급이라는 이름으로 모이면 정치력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 그 정치력으로 우리가 딛고 선 땅과 물, 공기를 지킨다는 상상이 바로 《녹색 계급의 출현》에 담긴 76개의 메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