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식 귀결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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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라는 우산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여전히 막강합니다. 다만 그 우산을 쓰기 위한 구독료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습니다.

트럼프식 귀결 조치

2025년 12월 8일

12월 5일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국가 안보 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NSS) 보고서를 공개했을 때,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들은 이 보고서가 이전 행정부의 정책 기조를 얼마나 철저히 뒤엎었는지에 주목했습니다. NSS 보고서는 미국 외교, 경제, 군사 전략의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향후 3년간 트럼프 정부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행동할지에 대한 청사진입니다.

NSS는 외교적 수사에 그치지 않습니다. 미국의 의도를 행동으로 옮기는 로드맵입니다. 9.11 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는 2002년 9월 NSS에 ‘선제 공격 독트린’을 담았습니다. 잠재적 위협이라도 미국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으면 선제적으로, 예방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죠. 그리고 6개월 뒤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합니다. 후세인이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며 침공을 정당화했죠.

트럼프 2기의 NSS는 바이든 행정부의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라는 이념적 세계관을 폐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노골적이고 거래적인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리얼리즘을 심었습니다. 바이든의 NSS가 동맹을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이자 미국의 최대 자산’으로 치켜세웠다면, 트럼프의 NSS는 동맹을 ‘공정한 몫을 지불해야 하는 채무자’로 재정의합니다.

트럼프식 귀결 조치

이번 NSS에서 트럼프 정부는 ‘철저한 국익 중심주의’로의 회귀를 천명했습니다. NSS는 이전 정부의 전략들이 “모든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무것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것”이었다고 비판하며, 미국이 영원한 세계의 부담(forever global burdens)을 내려놓고 불개입주의적 선호를 반영할 것이라고 명시했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조치는 ‘트럼프식 귀결 조치(Trump Corollary)’를 통해 202년 전 고립주의 외교 정책의 결정판인 먼로 독트린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미국의 앞마당인 아메리카 지역에서의 패권 회복을 최우선순위로 선포한 것인데요, 미국의 안보 관심사를 서반구로 제한하고 나머지 세계에 대한 개입은 “우리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경우에만” 하겠다는 거래적 접근을 분명히 했습니다.

NSS는 미국 외교, 안보, 정보 정책의 원칙으로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와 ‘유연한 현실주의(Flexible Realism)’를 강조했습니다. 두 원칙은 서로를 보완하고 뒷받침하며 ‘미국 우선주의’를 실현하게 됩니다.

힘을 통한 평화는 유연한 현실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미국의 군사력, 경제력, 기술력이 압도적일 때, 미국은 모든 외교적 거래에서 우월한 협상 위치에 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할 때 미국의 군사적 보호 역량이 클수록, 동맹국이 협상 테이블에서 미국의 제안을 거부하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유연한 현실주의는 이런 힘의 낭비를 막습니다. 과거 미국은 이상주의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며 국익이 걸려 있지 않은 분쟁에도 개입했지만, 이제 람보 같은 미국은 없습니다. 미국의 핵심 국익, 즉 안보와 경제적 번영을 달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는 것이 트럼프 외교의 핵심 원칙입니다. 국방력을 낭비하지 않으니, 힘을 통한 평화도 유지할 수 있게 되고요.

미국은 외교 관계에서 “가능한 것과 바람직한 것”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요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합니다. NSS는 미국이 다른 나라의 체제를 바꾸려다가 미국의 자원만 낭비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미국과 가치와 통치 체제가 다른 국가라도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 베트남, 이집트 등 권위주의적이거나 비민주적인 국가라 해도, 그들이 대중국 견제에 도움이 되거나, 미국 기업에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거나, 지역 안정에 협력한다면 ― 그리하여 미국이 투입해야 하는 자원을 아낄 수 있게 한다면 ― 전략적 파트너로 삼겠다는 뜻입니다. 트럼프가 지난 11월 중동에선 이스라엘만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F-35 전투기를 사우디에 판매하겠다고 밝힌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에 닥칠 세 가지 변화

동맹국 한국에 이번 NSS는 곧 들이닥칠 안보와 경제 청구서의 예고편입니다. NSS에서 천명한 트럼프 정부의 대외 정책 기조는 세 가지 측면에서 한국에 뼈아플 수 있습니다.

먼저, 동맹 비용의 5퍼센트 룰입니다. NSS는 동맹국들이 “미국의 관용에 무임승차(free-riding)해 왔다”고 비판하며, “미국이 아틀라스처럼 전 세계 질서를 떠받들던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합니다. 한국에도 곧 인상된 청구서가 날아올 겁니다. 트럼프 정부는 올해 6월 나토를 압박해, 나토 회원국의 국방비 지출 목표를 기존 GDP 대비 2퍼센트에서 5퍼센트로 상향시킨 바 있습니다. 이 5퍼센트가 새로운 글로벌 기준이 되었습니다. 지난 11월 한미 정상은 한국의 국방 예산 지출을 현재 GDP 대비 2.3퍼센트에서 향후 10년 내 3.5퍼센트로 늘리기로 합의했습니다. 큰 변화이지만, 여전히 미국의 목표치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한국은 방위비 분담금을 지속적으로 늘려 왔지만, 트럼프 2기의 거래적 접근은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요구할 겁니다. 주한 미군의 주둔 비용뿐만 아니라, NSS가 강조하는 ‘부담 전환 네트워크(burden-sharing network)’의 일환으로 미국의 전략 자산 전개 비용, 합동 훈련 비용, 심지어 안보 프리미엄까지 요구받을 수 있습니다. 동맹을 유지하고 원하는 수준만큼의 안보 약속을 얻어내기 위해 한국이 지불해야 할 비용은 전례 없이 폭증할 수 있습니다.

둘째 위기는 황금 돔의 역설입니다. NSS는 미국 본토를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황금 돔(Golden Dome)’을 포함한 차세대 미사일 방어 체계 구축을 천명합니다. 보고서는 표면적으로는 동맹국도 보호한다고 밝히지만, 본질은 ‘미국 우선 방어(America First defense)’에 있습니다. NSS는 “어떤 적이나 위험도 미국을 위협에 빠트릴 수 없어야 한다”는 목표를 명확히 했습니다.

북핵 위협에 직면한 한국에는 불편한 질문이 돌아옵니다. 워싱턴이 본토 방어에 집중할수록, ‘미국이 LA를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서울을 지킬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이 본토에서의 핵 억지력과 미사일 방어에 집중하는 상황은 한국 내에서 독자 핵무장론이나 전술핵 재배치 같은 목소리가 힘을 얻는 핵 도미노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관세 장벽과 추가 청구서입니다. ‘미국 노동자 우선’ 정책과 ‘재산업화’는 이번 전략의 또 다른 핵심 축입니다. NSS는 무역 불균형 해소와 미국 내 산업 기반 부활을 위해 관세를 ‘강력한 도구’로 명시했습니다. 보고서는 미국이 “다시는 현재 또는 잠재적인 어떤 적에게도 핵심 제품이나 부품을 의존하지 않도록” 제조업과 핵심 공급망을 리쇼어링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결국 한국 기업에 추가 청구서가 날아올 수 있습니다. 한국의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기업은 이미 미국 내 천문학적 투자를 약속했지만, 트럼프 정부는 더 많은 공장, 더 많은 일자리를 요구하며 압박을 강화할 겁니다. 관세를 인질 삼아 기존 투자에 대한 추가 제조 및 고용 요구 사항을 내밀 가능성이 큽니다.

각자도생의 시대

이번 NSS는 한국에 냉혹한 현실을 일깨웁니다. 워싱턴은 이제 혈맹이라는 감상적 수사를 거두고, 동맹을 자산이 아닌 비용으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NSS는 “세계의 근본적인 정치 단위는 국민 국가이며, 모든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럽고 정당하다”라고 못 박았습니다.

미국이라는 우산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여전히 막강합니다. 그러나 그 우산을 쓰기 위한 구독료는 가파르게 오르고 있습니다. 비가 들이칠 때 우산의 주인이 누구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겠죠. 우리도 달라진 현실에 맞게 안보와 경제의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가치는 가격으로, 동맹은 비용으로 바뀐 냉혹한 계산서가 방금 전 세계로 발송되었습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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