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의 국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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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의 국적을 지나치게 문제 삼으면 손해를 보는 쪽은 한국이 될 수 있습니다.

쿠팡의 국적성

2025년 12월 15일

쿠팡의 국적성이 논란입니다. 쿠팡은 한국에서 돈을 버는 미국 기업입니다. 국내 최대 이커머스 플랫폼 쿠팡은 ‘쿠팡 주식회사’라는 한국 법인이 운영합니다. 쿠팡 주식회사는 미국 델라웨어주에 등록되어 있고 뉴욕 증시에 상장된 ‘쿠팡 Inc.’의 자회사입니다. 쿠팡 Inc. 이사회 의장인 창업자 김범석은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미국 시민권자입니다. 흔히 말하는 ‘검은 머리 외국인’입니다.

고객 계정 3370만 개가 관리 부실로 털렸는데, 회사 지배 구조의 정점에는 ‘검머외’ 김범석 의장이 있습니다. 김 의장은 한국에서 돈을 벌고 미국에 기부합니다. 국회에서 불러도 “글로벌 기업 CEO로서 업무가 바쁘다”며 응하지 않습니다. 대신 욕을 먹는 건 한국 법인 대표입니다. 국회 과방위 긴급 현안 질의에서 여야는 모처럼 합심해 쿠팡을 때렸습니다.

“쿠팡이 미국 법인이라는 이유로 한국 이용자를 가볍게 보는 것 아니냐?”
“같은 사고가 미국에서 발생했어도 이렇게 대응했겠나?”
“지금 이 시점에 김범석 의장은 어디 있느냐?”
“한국에서 매출 40조 원을 올리는데, 한국 사회에 기여한 게 뭐냐? 사고가 나면 대표 이사만 나와 총알받이 하는 것 아니냐?”

이번 개인 정보 유출 사태의 본질은 기본적인 보안 관리의 실패입니다. 퇴직자 계정을 말소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죠. 금고가 외부에서 뚫린 게 아니라 금고를 열어 둔 겁니다. 정확히는, 열어 둔 줄도 몰랐고요. 그런데 지금 정치권에선 쿠팡의 국적성을 문제 삼는 발언이 늘고 있습니다. 언론 역시 ‘검머외 오너’와 중국인 범인설에 집중합니다. 대중에게 가장 잘 ‘먹히는’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프레이밍

그런데 본질이 흐려지면 손해를 보는 쪽은 한국일 수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이 여론을 의식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정보 보안 이슈가 한미 통상 마찰로 비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물론 쿠팡이 미국 회사라는 사실만으로 통상 문제가 자동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형식적으로 보면 이번 사태의 구조는 명확합니다. 쿠팡 Inc.는 미국 기업이지만, 개인 정보 유출의 현장은 한국이고 조사와 제재의 대상은 한국 법인인 쿠팡 주식회사입니다. 미국 정부가 개입할 명분은 자국 기업이 해외에서 자의적·차별적 대우를 받을 때 생깁니다. 현지 법을 위반해 정당한 제재를 받는 경우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권의 잘못된 프레이밍이 누적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법 집행이 ‘검머외 오너’의 체리피킹에 대한 정치적 처벌처럼 비치는 순간, 쿠팡 Inc.는 미국에서 “한국 정부가 미국 기업을 타깃으로 삼았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주장이 디지털 규제를 둘러싼 미국의 기존 문제 제기와 결합하면 사안의 초점이 바뀔 수 있습니다. 논점이 개인 정보 유출의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 수립에서 벗어나, 절차적 정당성과 형평의 문제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SKT 같은 국내 기업이 자연스럽게 비교 대상으로 소환되겠죠.

한미 통상 마찰이 불거지는 패턴은 거의 일정합니다. 동종의 한국 기업과 비교해 미국 기업만 유독 강하게 다룬다는 인상이 생길 때입니다. 또한 ‘외국 자본 플랫폼 추방’ 같은 정치적 구호가 앞설 때입니다. 그리고 정당한 법 집행이 아니라 국회와 정부가 여론을 대리해 기업을 처벌하는 모양새가 만들어질 때입니다.

이런 프레임은 국내 여론에는 먹히지만, 대외적으로는 한국 정부의 규제 목적을 소비자 보호에서 국적성으로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이 여건이 조성된 상태에서 쿠팡이 막대한 과징금을 맞게 되면, 쿠팡 Inc.는 워싱턴의 로비 채널을 활용해 한국 정부의 제재를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내국민 대우 및 비차별 의무 위반으로 프레이밍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할 일

지난해 쿠팡은 미국 내 로비 활동에 331만 달러를 지출했습니다. 삼성, SK, 한화, 현대차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은 금액을 투입했습니다. LG보다 세 배 가까이 많이 썼죠. 쿠팡이 워싱턴 네트워크 구축에 공을 들인 건 비상시에 대비한 일종의 보험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미국이라 해도 개인 정보 유출에 대한 제재 자체를 문제 삼기에는 정치적 비용이 큽니다.

그러나 사안이 ‘미국 기업 차별’로 재프레이밍되면 그 보험을 쓸 수 있게 됩니다. 미국은 이미 한국의 디지털·플랫폼 규제를 비관세 장벽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연례 국별 무역 장벽 보고서(NTE)를 통해 자국 기업에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각국의 규제를 체계적으로 관리해 왔습니다. 이 목록에서 디지털 무역과 플랫폼 규제는 해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해 왔습니다.

정리하자면, 쿠팡 사태가 한미 통상 이슈로 비화하려면 개인 정보 유출 자체가 아니라, 사건 이후 한국의 정치적 대응이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적·과잉 제재로 포장되어야 합니다. 그 출발점은 정치권의 메시지입니다. 국회와 대통령실이 소비자 피해 보상과 보안 대책 강화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선을 넘어 ‘외국 기업 응징’으로 읽히는 순간, 쿠팡은 USTR과 암참(주한 미국상공회의소)을 통해 반격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됩니다.

지금 한국 정치권에 필요한 전략은 ‘세게’ 때리는 것이 아니라 ‘정합하게’ 때리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쿠팡의 국적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사건이라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해야 합니다. 정치권과 언론의 과도한 외국 기업 때리기 프레임을 경계하고, 정부는 외국 자본이 아니라 위법 행위를 단죄한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통상 압력의 빌미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동종 사고에 관한 일관된 기준을 제시해야 합니다. ‘검머외 기업인 쿠팡이라서’가 아니라 ‘이 정도 규모의 유출이었기 때문’이라는 쪽으로 논점을 옮겨야 합니다. 제재의 크기만큼 중요한 것은 조사 범위, 소명 기회 제공, 과징금 산정 근거의 투명성입니다. 이 절차적 정당성이 흔들리는 순간, 쿠팡의 로비스트가 겨냥할 목표물이 생깁니다.

국회 청문회

오는 12월 17일 국회에서 열릴 쿠팡 청문회는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한국에서 벌어 미국에 기부하는 오너의 국적을 문제 삼으면, 쇼츠 조회 수를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정치가 규제를 대리하는 장면으로 소비될 위험이 있습니다. 청문회에서 다뤄야 할 쟁점은 오너의 국적과 회사의 국적성이 아닙니다. 보안 투자의 규모, 침해 탐지 체계, 내부 통제와 거버넌스 같은 기술적, 제도적 문제여야 합니다.

요악하면, 쿠팡을 압박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초적인 보안 규정조차 지키지 않아 3370만 개의 계정이 유출된 사안은 충분히 비판받아야 합니다. 다만 압박의 목표는 응징이 아니라 사고 경위 파악과 피해 보상, 재발 방지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미국 정부가 개입할 명분이 줄어듭니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국내 소비자 구제 시스템을 대폭 강화해야 합니다. 한국 소비자들이 미국 법원 소송을 선택하는 이유는 국내 법원에서 기대할 수 있는 손해 배상 규모가 미국보다 작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국내 구제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은 소비자 보호를 넘어, 통상 마찰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낮추는 전략이기도 합니다. 국내에서 실효성 있는 구제가 이뤄질수록 미국 법원 소송의 유인이 줄어들고, 이는 쿠팡 Inc.에 대한 법적 압력을 감소시켜 결과적으로 대미 로비의 동력 역시 약화하게 됩니다.

국회 청문회 개최를 일주일 앞두고 쿠팡 한국 법인은 대표를 교체했습니다. 박대준 대표가 물러나고, 임시 대표로 해럴드 로저스 쿠팡 Inc. 최고관리책임자 겸 법무 총괄이 선임되었습니다. ‘검머외’ 논란이 거세지는 판국에 아예 미국인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을 경우, 쿠팡이 어떤 대응을 할지 짐작하게 하는 인사입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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