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플러스에서 일하는 1만 명 넘는 직원들이 12월 월급을 제때 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월급날인 19일에는 급여의 일부만 지급되고, 나머지는 24일에 받게 된다고 합니다. 사실, 임금 체불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는 꽤 되었습니다. 11월부터 월급이 안 나올 수 있다는 얘기가 돌았죠. 돈이 마르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홈플러스는 각종 세금과 전기료 등을 포함한 공과금 700억 원이 밀렸습니다. 임대료도 몇 달째 못 내는 상황이고요.
시간이 갈수록 빚은 불어나고 자금은 바닥납니다. 기업 가치도 함께 떨어지죠. 홈플러스가 기업 회생 절차를 신청한 것이 지난 3월입니다. 한 해가 다 끝나가는데 해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29일까지 인수자를 찾지 못하면 홈플러스는 꽤 많은 점포의 문을 닫아야 합니다. 그래도 사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결국 청산 절차를 밟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농협이 홈플러스를 인수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공적 개입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제대로 풀려면 객관적인 현실 인식이 우선 필요합니다. 우리에겐 더 이상 홈플러스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손님은 왕이다.
우리나라에서 장보기 패러다임에 본격적인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93년입니다. 국내 1호 대형 마트인 이마트 창동점이 문을 연 해입니다. 지금과는 분위기가 매우 달랐습니다. 대형 마트의 등장을 모두 신기해했고, 긍정적인 변화로 받아들였습니다. 소비자에게 더 좋은 선택지를 주는 동시에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한다고 봤던 겁니다.
경기가 아직 좋던 시절이었습니다. 어제보다 내일 더 잘살게 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한국은 돈을 쓰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서비스’와 같은 무형의 재화에 관해서는 아직 인식이 부족했죠. 지금은 어디 가서 ‘손님은 왕이다’라고 하면, 갑질을 일삼는 블랙 컨슈머 아니냐는 의심을 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1990년대엔 손님을 왕처럼 모시는 마음을 갖자고 일부러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등장한 대형 마트는 소비자를 위해 만들어진 천국 같았고요. 환경이 쾌적했고, 저렴한 가격이 보장되었습니다. 쇼핑 경험도 긍정적이었죠. 시대 정신에 잘 들어맞는 등장이었습니다. 오픈 첫날 이마트 창동점에는 약 2만 6800여 명의 손님이 몰려들었습니다.
첫날 매출은 1억 800만 원이었고요.
이마트가 사업성을 증명하자 경쟁자들이 줄줄이 등장합니다. 킴스클럽 같은 국내 업체는 물론이고 미국의 월마트, 프랑스의 까르푸 등 외국계 대형 마트도 한국 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출했죠. 정책도 경쟁을 부추겼습니다. 1997년 대형 마트 설립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꾼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이 제정됩니다. 누구든 원하면 얼마든지 점포를 낼 수 있게 된 겁니다. 국내 업체에
유리한 변화였습니다. 목 좋은 자리를 알아볼 안목도, 그 자리를 빠르게 사들일 속도도 한국 기업 쪽이 월등했으니까요.
우여곡절 끝에 홈플러스를 소유한 테스코를 제외하고는 해외 업체가 모두 철수했습니다. 국내 대형 마트 업계는 이마트와 홈플러스, 롯데마트의 3파전으로 정리됩니다. 전통 시장이나 동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고, 편의점에서 급한 물건을 사는 식의 소비 행태가 완전히 자리 잡게 됩니다. 하지만 경제는 생물입니다. 시장 환경은 변화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새로운 시대정신이었습니다. 2010년대의 화두는 ‘
상생’이었죠.
상생과 연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양극화가 심화하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기업이 구조 조정을 거쳤고, 평생직장이라는 단어는 사라졌습니다. 계약직, 파견직 등 비정규직은 물론 하도급, 외주화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세계화와 함께 국내 중소기업은 중국 업체에 밀려 경쟁력을 잃어버렸죠. 대기업이 사상 최대 실적을 내도 협력사들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낙수 효과가 단절되다시피 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어떤 회사에 어떤 일자리를 잡느냐에 따라 인생의 층위가 고정됩니다.
부동산으로 대표되는 자산 가격은 치솟았습니다. 2000년대 이후 저금리 정책이 지속되었고,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렸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금융 위기 등 예외적인 변수가 작동했던 기간을 제외하면 이러한 기조는 지금까지도 지속하고 있습니다. 증권 방송에서 금리를 낮춰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금리일 때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려 투자 시장에는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환경이 지속하면 재산을 가진 사람의 재산은 늘어나고, 재산이 없는 사람은 가난해지는 구조가 고착합니다. 결국,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만 살아남게 됩니다.
아무도 이런 변화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상단과 하단의 격차가 벌어지면 사회의 갈등은 깊어지고, 그에 따른 비용이 상승합니다. 다 같이 암울한 세계로 빠져드는 겁니다. 그래서 이 격차를 어떻게든 좁혀야 한다는 사명 같은 것이 정권을 막론하고 부여됩니다. 그 결과로 찾아낸 시대정신이 상생과 연대입니다. 대형 마트를 둘러싼 정치와
규제의 언어도 상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죠. 전통 시장, 골목 상권과의 상생 말입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이마트와 홈플러스 등을 중심으로 확장했던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첫 타깃이 되었습니다. 2010년 유통법 개정을 통해 대형 마트와 SSM이 전통 시장 주변에서 점포를 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각 업체가 신사업으로 추진하던 SSM 확장이 막힌 겁니다. 개정 이유로 균형 발전이 언급되었습니다. 2012년에는 대형 마트의 영업 시간을 제한하고, 월 1~2회의 의무 휴업을 강제하게 됩니다. ‘
상생 발전’이 명분이었습니다.
시장 교란
대형 마트에 대한 규제는 쇠락하는 전통 시장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업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정책을 발판 삼아 성장한 대기업이 골목 상권을 침해하는 것에 대한 ‘괘씸죄’에 모두가 공감하던 때였기 때문에 가능했고요. 또, 정치공학적으로도 말이 됩니다. 이마트에 불리한 정책 때문에 표가 떨어지진 않지만, 전통 시장에 유리한 정책을 내놓으면 해당 지역의 ‘상인회’라는 든든한 유권자 집단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또, 진흥 사업에는 돈이 드는데 규제에는 예산이 거의 들지 않습니다.
전통 시장과 골목 상권은 자영업자들의 생계와 직결된 곳입니다. 경쟁력을 갖추도록 정책이 밀어줄 필요는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전통 시장의 변화를 돕는 ‘진흥’ 정책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마트나 홈플러스 때문에 전통 시장을 찾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대파 한 단을 사도 대형 마트가 더 싱싱하고 저렴하다고 느끼는 고객이 많습니다. 물건을 대량으로 떼어오고 철저하게 검수해서 그렇습니다. 전통 시장에서는 때로 퉁명스러운 점포 주인과 기싸움도 해야 하지만, 대형 마트에서는 기분 상할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전통 시장이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에 고객이 떠난 겁니다.
꽤 많은 언론이 당시 도입된 대형 마트 규제가 일종의 시장 교란이었다고 지적합니다. 안그래도 부상하는 이커머스에 밀려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는데, 경쟁력이 더 약화하면서 온라인 유통업체만 더 키워준 꼴이 되었다는 겁니다. 특히 대체재 없는 플랫폼으로 성장한 쿠팡이 이득을 봤다는
분석입니다. 하지만 이건 좀 안이한 결론이죠.
자연 도태
원래 쿠팡은 스타트업이었고 이마트와 홈플러스, 롯데마트는 대기업이었습니다. 이마트는 신세계그룹, 홈플러스는 글로벌 유통 기업 테스코 산하였죠. 미래를 바라보는 정확한 눈이 있었다면, 준비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는 얘깁니다. 대형 마트 업체들은 소비자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우유와 달걀을 이른 아침 문 앞에서 받고 싶은 욕구를 더 일찍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2014년 쿠팡이 엄청난 적자를 감당할 각오로 로켓배송을 시작하자 이마트는 추격에 나섰습니다. 용인을 시작으로 이커머스 전용 자동화 물류센터 ‘네오(NE.O)’를 구축하기 시작한 겁니다. 전국적으로 11곳까지 확대할 예정이었죠. 하지만 너무 빠르게 치고 나가는 쿠팡을 따라잡는 것에 관해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네오는 계획과 달리 세 번째 센터가 마지막이 되었고, 그마저도 2024년 네오 센터 두 곳은 CJ 대한통운에 넘겼습니다. 업계에서는 신세계그룹이 이커머스에서 힘을 빼겠다는
신호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이마트는 시도라도 했습니다. 홈플러스는 시도조차 제대로 못 했습니다. 그럴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2015년 테스코 본사에서 대형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홈플러스는 사모펀드인 MBK 파트너스로 넘어갑니다. 당시 무리한 인수라는 평가가 많았는데, 한마디로 비싸게 샀다는 겁니다. 인수가는 약 7조 2000억 원이었습니다.
MBK가 그만한 돈을 들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홈플러스 점포를 담보로 잡히고 인수 자금을 빌렸습니다. 아파트 담보 대출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걸 갚을 만큼 장사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MBK는 ‘세일즈 앤드 리스백(sale-and-leaseback)’이라는 방법으로 자금을 마련합니다. 몇몇 매장을 매각하고, 다시 그 자리에 세를 들어가 영업을 계속하는 겁니다.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매장을 팔았다면 경영의 효율화였겠지만, 주로 알짜 매장을 팔았습니다. 단기적으로는 큰돈을 확보할 좋은 방법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임대료 부담을 늘리고 홈플러스의 경쟁력을 깎아 먹는 악수가 되었죠. 그러니까 홈플러스는 그동안 빚을 갚는 데에 급급했던 겁니다. 유통 산업의 변화에 휩쓸리면서 말이죠.
규칙과 책임
홈플러스는 회생계획안 제출 기한인 오는 12월 29일까지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파산할 수도 있습니다. 회사를 청산해 갚을 수 있는 만큼 빚을 갚고 문을 닫는 겁니다. 직원을 포함해 협력 업체까지 더하면 10만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이건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구해야 하는 것은 10만 명의 생계지 홈플러스가 아닙니다. 홈플러스는 시장에서 사겠다는 사람이 없는, 상품 가치를 다한 기업입니다. 시장의 원리에 의해 도태된 겁니다. 이걸 국민의 세금으로 살려내는 건 또 다른 시장 개입입니다. 대마불사의 사례를 하나 더 늘릴 뿐이죠.
망원 시장에서 야채 가게를 하다 망한대도 나라가 살려 주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홈플러스는 정부가, 공공이 역할을 해서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죠.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생계가 홈플러스에 묶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불똥이
농협으로 튀었습니다. 하나로마트를 운영하고 있으니, 홈플러스를 인수해 시너지를 내면 어떻겠냐고 말이죠. 정치가 또 너무 쉬운 길로 갑니다. 농협은 딱 잘라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안 그래도 하나로마트는 적자입니다. 또 다른 적자 덩어리를 떠안아봤자 도움이 안 됩니다. 게다가 우리 농산물을 유통하기 위해 만든 것이 하나로마트인데, 홈플러스에선 수입 소고기도, 수입 과일도 팔아야 이마트나 쿠팡과 경쟁이 됩니다. 같은 마트라고 너무 대충 보고 쉽게 제안한 겁니다.
홈플러스는 기업으로서 시장의 변화를 읽지 못했습니다. 불행히도 경영의 주체들에게 장기적인 안목으로 회사를 키울 의지도 없었습니다. 당장 돈을 벌어갈 생각에만 급급했죠. 그래서 회사가 어려워졌습니다. 마치 전통 시장이 그랬던 것처럼 경쟁력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 결과 고객을 잃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홈플러스가 필요한가요?
10만 명의 다음 일자리는 필요합니다. 홈플러스 주변 외에는 상권이 죽어버린 지역 경제를 활성화할 대책도 필요합니다. 쿠팡이나 홈플러스 사태처럼, 경영의 주체가 권리와 이윤만 가져가고 책임은 회피할 수 있는 현재의 시스템도 고쳐야 합니다. 지금 정치가 정책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입니다. 모두 풀기 어려운 매듭입니다. 고려해야 할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문제를 풀라고 정부와 정치가 존재합니다. 시장 원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 말입니다.
2020년대의 시대 정신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플랫폼이 경제의 큰 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지금, 저는 규칙과 책임의 가치를 다시 의식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MBK 같은 사모펀드는 금융 기술로 돈을 버는 조직입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회사의 지위를 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법인으로서 규칙을 잘 지켰는지,
책임을 다했는지 잘 따져야 할 겁니다. 정부와 정치도 그렇습니다. 규칙에 예외를 만들어 문제를 쉽게 넘어가면 안 됩니다.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