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8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라라고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만났습니다. 회담을 마치고 트럼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평화 협정에 “매우 가까워졌다”고 말했습니다. 트럼프는 이날 회담 전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도 1시간 넘게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이번 회담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역제안한 20개 조항의 평화안이 논의되었습니다. 미국은 당초 러시아에 유리한 28개 조항의 종전안을 제시했는데, 우크라이나가 이걸 수정해 별도 안을 내놓은 것입니다. 미국이 만든 28개 조항에는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 포기, 나토 가입 포기, 병력 축소 등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최대 쟁점은 영토 문제입니다. 러시아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돈바스 지역의 90퍼센트를 장악했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돈바스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땅을 넘기라고 주장하고, 우크라이나는 현재 전선에서 전쟁을 멈추자고 주장합니다. 양측이 물러서지 않자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돈바스에서 철군하는 지역을 비무장 자유 경제 구역으로 전환하자는 절충안을 내놨고요.
트럼프는 종전 협상이 “잘하면 아마 몇 주 안에 타결”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트럼프 말만 들으면, 평화가 머지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역사와 정황을 살펴보면 트럼프발(發) 낙관론에 회의가 듭니다. 정작 휴전 합의의 당사자인 러시아는 미-우 정상 회담 전날인 27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대규모 공습을
가했으니까요.
더 근본적으로는, 푸틴이 진짜로 원하는 ‘평화’란 무엇인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트럼프가 억지로 꿰맞춘 평화 협정이 체결되더라도, 그 평화는 ‘가짜 평화’일 가능성이 큽니다.
푸틴의 역사관
트럼프의 플로리다 팜비치 마라라고 별장의 황금빛 홀에서 두 정상이 만나 평화를 논의했지만, 트럼프가 원하는 평화와 젤렌스키가 원하는 평화와 푸틴이 원하는 평화가 다릅니다. 지금 미-우 사이에서 논의되는 평화는 우크라이나에 영구적 안보가 아닌, 서서히 죽어가는 독배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평화를 논하기 전에, 먼저 전쟁의 기원을 살펴봐야 합니다. 푸틴은 이 전쟁이 나토의 동진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진짜 원인은 푸틴 그 자체입니다. 푸틴 없이는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을 겁니다. 푸틴이 마음만 먹는다면 전쟁은 지금 당장 끝날 수도 있습니다.
푸틴은 2021년 7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일체성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설을
발표했습니다. 이 글은 푸틴의 역사관과 이듬해 일어나게 될 우크라이나 침공의 사상적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푸틴은 우크라이나라는 국가의 독자성을 부정합니다. 1991년 우크라이나의 탄생을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인 소련 붕괴가 낳은 역사적 실수로 규정했습니다.
푸틴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이 고대 루스의 후예로서, 뿌리가 같은 하나의 민족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같은 언어, 경제적 유대, 정교회 신앙을 공유하며 역사적, 정신적 공간을 함께해 왔다고 강조합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분리된 것은 서구 세력이 러시아를 약화시키기 위해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쓴 결과라고 봅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서방의 조종을 받아 우크라이나를 ‘반러시아’의 거점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사용 금지, 러시아계 주민에 대한 강제 동화 정책, 정교회 분열 등을 언급하며 이를 ‘대량 살상 무기 사용과 맞먹는 공격’이라고 묘사합니다. 소련 해체를 20세기 최대 비극으로 여기는 독재자에게, 우크라이나 정복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닙니다. 역사적 소명입니다. 푸틴이 원하는 것은 미국이 조율해 준 휴전선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굴복 그리고 소멸입니다.
나토의 무기력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명분은 ‘나토 동진에 따른 안보 위협’으로 알려졌지만, 인과 관계가 잘못되었습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기 전까지 우크라이나 내 나토 가입 찬성 여론은 15~25퍼센트 수준이었습니다. 대다수 우크라이나인은 비동맹 중립 노선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다 푸틴의 침략이 시작되자, 비동맹이 주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침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나토라는 구명조끼를 찾기 시작합니다. 나토 가입 찬성 여론이 40퍼센트를 넘어서게 되죠. 즉,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추진해서 푸틴이 침략한 게 아니라, 푸틴이 침략해서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추진하게 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냉전 이후 유럽은 미국이라는 큰 형님이 버티고 있는 집단 안보라는 환상 속에서 국방비를 지속적으로 삭감해 왔습니다. 푸틴이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30개 나토 회원국 중에서 국방비 2퍼센트 가이드라인을 지킨 나라는 9개국뿐이었습니다. 여기서 미국을 제외하면 8개국이 남습니다. 그마저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같은 소국 위주였습니다.
냉전 말기였던 1980년대 후반 영국과 독일은 전차를 수천 대씩 갖고 있었는데, 2022년에는 수백 대로 줄어 있었습니다. 그마저도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독일은 2011년에 징병제를 폐지해 군 규모를 줄였습니다. 네덜란드는 보유하고 있던 전차를 전량 매각했다가, 나중에 독일에서 리스해서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죠.
결국 푸틴이 본 것은 나토의 위협이 아니라 공백이었습니다. 푸틴은 서방이 너무 부유해졌고, 너무 안일해졌고, 무엇보다 싸울 의지를 잃었다고 판단했습니다. 나토는 싸울 의지도, 싸울 능력도 없는 껍데기만 남은 군사 동맹이 된 겁니다. 게다가 미국은 20년간 공들인 아프가니스탄에서 2021년 철수하며 인도-태평양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같은 시기, 유럽은 값싼 러시아 에너지에 중독되어 있었고요.
가짜 평화
트럼프가 밀어붙이는 평화안은 푸틴의 입맛에 맞습니다. 트럼프는 계속해서 푸틴이 동의할 만한 평화안만 제시하고 있습니다. 푸틴이 동의할 평화란, 우크라이나를 국가로서 지속 불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평화입니다. 영토의 20퍼센트를 상실하고, 군사적 자위권을 뺏기고, 확실한 안보 보장 없이 중립화된 우크라이나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맞게 될 겁니다.
푸틴의 전략은 단순합니다. 불평등한 평화 협정이 우크라이나 내부에 분노와 분열의 씨앗을 뿌리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경제적 파탄과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해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면, 푸틴은 다시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탱크를 밀어 넣을 준비를 하겠죠. 푸틴에게 평화 협정은 종전 선언이 아니라, 다음 공격을 위한 전열 재정비 기간입니다.
트럼프의 거래
트럼프에게 우크라이나는 거래의 소모품에 가깝습니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를 서서히 질식시켜 러시아에게 내어주는 대가로 푸틴을 중국으로부터 떼어놓거나, 그린란드 등 서반구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구상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트럼프에게 이번 평화안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노벨 평화상으로 다가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 평화가 5년 뒤, 10년 뒤에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안보를 보장할지 여부는 트럼프의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트럼프에게 유럽의 평화는 유럽의 문제입니다. 트럼프의 거래적 고립주의는 푸틴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를 쥐여주는 셈입니다.
나쁜 평화
마라라고에서 흘러나오는 트럼프의 낙관적 전망은 신기루입니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 신기루입니다. 지금 트럼프가 밀어붙이는 평화는 우크라이나의 숨통을 서서히 조르는 ‘나쁜 평화’입니다. 우크라이나가 무장을 해제히고, 서방이 관심을 끄고, 러시아가 다시 숨을 고를 시간을 벌게 할 평화 말입니다. 푸틴이 원하는 평화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독자자에게 양보를 해서 얻어낸 평화는 더 큰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뮌헨 협정을 통해 배웠습니다. 트럼프가 약속하는 ‘안보 보장’은 미국의 국내 정치 상황에 따라 언제든 철회될 수 있는 종이쪽지에 가깝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실실적으로 보장하지 않는 어설픈 합의는 수년 내로 푸틴에게 더 큰 승리를 헌납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