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 유통의 최전선

bkjn review

이제 편의점은 다른 경쟁력을 발굴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소매 유통의 최전선

2025년 12월 31일

영국의 대표적인 슈퍼마켓 체인 ‘막스앤스펜서(Marks & Spencer)’가 새로운 식품 라인을 출시했습니다. 칼로리에 비해 영양의 밀도를 높인 식품입니다. 위고비나 마운자로 등과 같은 GLP-1 계열의 비만 치료제를 투여하고 있는 고객을 위해 개발한 신상품이라고 합니다. 시대의 변화는 이렇게 계산대 앞에서 발견되곤 합니다. 소매 유통의 최전선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편의점이 그런 역할을 주로 해왔습니다. 편의점은 늘 가까운 곳에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작정하고 운전해 방문하는 대형마트와는 달리, 슬리퍼에 잠옷 차림으로도 가볍게 들릴 수 있는 곳입니다. 작은 충동구매도 쉽게 일어나죠. 신제품을 편의점에서 먼저 출시해 고객 반응을 보거나, 기발한 콜라보 상품을 편의점 한정으로 내놓는 이벤트 전략도 편의점의 낮은 문턱 덕분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요즘엔 분위기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편의점보다 다이소나 올리브영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옵니다. 분위기만 달라진 게 아닙니다. 숫자의 추세도 달라졌습니다. 2025년 편의점 점포 수가 역대 처음으로 감소세로 돌아선 겁니다. 2026년 전망도 밝지 않습니다. 내년도 편의점 업태 성장률은 0.1퍼센트에 그칠 전망입니다. 편의점의 성장이 멈춘 겁니다.

우리 동네 냉장고

편의점의 역사는 19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술의 혁신이 일어났던 때입니다. 자연의 힘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얼음을 만들어내는 냉각 기술 말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만든 먹거리를 우리 지역 안에서 소비한다는 당연한 이치가 깨지고, 식품 유통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첫 번째 편의점은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있는 얼음 공장 ‘사우스랜드 제빙회사(Southland Ice Company)’였습니다. 우유와 빵, 달걀 등을 팔았죠. 일반 식료품 상점이 문을 닫은 늦은 시간이나 일요일에 매출이 잘 나왔습니다.

식료품을 차갑고 신선하게 보관해 판매한다는 장점이 잘 먹혀들어 이 새로운 형태의 유통은 산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60년대엔 일부긴 하지만 지금과 같은 연중무휴, 24시간 영업을 하는 편의점도 생겨나죠. 당시 미국에서 편의점은 마을의 냉장실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안정적으로 저온을 유지한 먹거리를 판매한다는 것이 압도적인 경쟁력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1980년대로 들어오면서 편의점은 미국보다 일본에서 더욱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미국 편의점 체인이었던 ‘세븐일레븐’을 일본에서 수입해 효과적으로 현지화하면서 엄청난 인기몰이가 시작되죠.

먼저, 입지부터 달랐습니다. 자동차를 주로 이용하는 미국에서 ‘편리한’ 입지는 주로 주유소 옆이나 고속도로 초입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대도시의 인구 밀도가 높고 대중교통 이용률이 높습니다. 지하철역, 번화가, 주택가 골목 등으로 파고듭니다. 일상으로 침투한 겁니다. 24시간 영업이라는 특성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판매 물품도 차별화했습니다. 1978년 일본식 주먹밥인 ‘오니기리’와 일본식 어묵탕인 ‘오뎅’을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적중합니다. 특히 오니기리의 경우 김이 눅눅해지지 않도록 하는 고유의 포장법을 개발하는 등, 도시화로 인해 점점 빨라지는 생활의 속도에 딱 맞는 한 끼 식사가 있는 곳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편의점 왕국’이 시작된 겁니다. 결국 1991년, 세븐일레븐은 일본에서 라이선스 사업을 하던 이토요카도(イトーヨーカ堂)에 인수되기에 이릅니다.

슈퍼마켓에는 없는 가치

우리나라에 편의점이 최초로 선보인 것은 1982년도입니다. 롯데쇼핑이 세븐일레븐과 손잡고 ‘롯데세븐’ 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였습니다. 늦게까지 영업한다는 차별화가 먹혀들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너무 일렀습니다. 소비 여력은 충분히 올라오지 않았고, 유통망은 아직 주먹구구식이었죠. 장부도 쓰지 않고 물건이 거래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7년 후엔 달라졌습니다. 1989년 서울 송파구에 세븐일레븐이 첫 점포를 엽니다. 그리고 국내 대기업들이 편의점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합니다.

한국에서 편의점에 가지는 경쟁력은 공간의 가치였습니다. 라면에 김밥은 동네 분식집에서도 먹을 수 있습니다. 과자나 담배, 술도 옆 골목 구멍가게에서 팝니다. 하지만 당시 편의점은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밝고 깨끗한 공간이었습니다. 유리로 둘러싸인 점포는 늦은 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환하게 불을 밝혔죠. 어딘가 세련되고 미래적이었습니다. 동네 슈퍼마켓보다 가격이 조금 비싸도 상관없었습니다. 어차피 편의점에 치르는 값은 컵라면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상징을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편의점은 특정 계층의 문화적 공간이었습니다.
개념미술 작가인 바바라 크루거의 말처럼, 우리는 ‘소비하며 고로 존재’합니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고르고, 컵라면을 먹는 사람들은 이전까지는 한국 사회에 없던 존재였습니다. 1990년대 초반, 기성세대에게 편의점은 이해할 수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뻔히 더 싸게 파는 곳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대의 자아 정체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게 한국 편의점의 경쟁력이었죠. 초창기 편의점의 주요 입지가 방이동, 목동, 동부이촌동, 여의도 등 중산층이 거주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끼고 있었던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황이 지나간 자리

단, 편의점의 문화적 상징성은 대중화와 함께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1998년 IMF 외환위기가 특히 결정적이었습니다. 퇴직금을 투자해 큰 기술 없이도 쉽게 창업할 수 있는 업종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점포 수는 1999년 이후 한동안 급증세를 보였습니다. 점포 수가 늘어나면서 방문 경험이 쌓이고, 급할 때 언제든 들러 간단한 것 하나만 구입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하죠. 소비의 방향성도 달라졌고요. 편의점은 진화하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경쟁력을 찾기 시작한 겁니다.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촉발한 몇 년간의 불황이 기회가 되었습니다. 저렴한 한 끼를 보장해 주는 편의점 도시락이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겁니다. 대표적으로 2010년 처음 출시된 GS25의 ‘김혜자 도시락’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출시 직후 매출이 152퍼센트까지 급증하며 일종의 사회 현상이 되었죠. 꾸준히 증가한 1인 가구도 한몫했습니다. 2000년 15.5퍼센트였던 1인 가구 비율은 2010년 23.9퍼센트까지 늘어났습니다. 편의점은 야근하며 혼밥하는 피곤한 사람들에게 대체 불가능한 장소로 거듭났습니다.

업계에서는 편의점이 불황 이후 2~3년에 걸쳐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2010년도 그러했습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편의점 업계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누립니다. 그런데 그게 독이 되었습니다. 점포 수는 늘어나는데 점포당 매출은 하락하기 시작합니다. 본사가 공격적으로 확장 정책을 펴면서, 한 골목에 편의점이 두세 곳씩 들어선 겁니다. 한국편의점협회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전체 편의점 수는 1만 6937개였습니다. 2013년엔 2만 4859개까지 치솟습니다. 수요에 비해 편의점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본사가 욕심을 부리다 가맹점주들이 피해를 떠안았습니다.

소확행이 끝난 뒤

경쟁이 과열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편의점이라는 것만으로 경쟁력이었다면, 지금은 CU라서, GS25라서 찾아올 유인책이 필요해졌습니다. 편의점에서 각종 콜라보 제품이 쏟아지고, 경쟁적으로 판촉 행사가 열리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기분 좋게 작은 사치를 부리거나, 비교적 저렴한 군것질거리를 잔뜩 쇼핑하는 것과 같은 이벤트적인 소비 트렌드에도 적극적으로 반응했고요.

그런데 경쟁자가 나타났습니다. 당장 필요한 물건은 쿠팡 새벽 배송이, 값싼 물건을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아 질러버리는 놀이적 소비는 테무가, 소비 공간을 즐기는 문화적 경험은 팝업 스토어가 압도적입니다.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에는 다이소까지 들어섰고요. 그런데 2025년 3분기 기준으로 편의점은 5만 3731곳입니다. 인구 밀도를 감안해 계산하면, 일본의 두 배 수준입니다.

이제 편의점은 다른 경쟁력을 발굴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업계에서는 일상과 가장 가깝게 자리 잡은 편의점의 입지에 주목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쿠팡의 로켓 배송 서비스보다 빠른 퀵커머스입니다. 이미 GS25와 CU가 배달의민족과 같은 배달 플랫폼에 입점하여 1시간 내외로 물건을 받아볼 수 있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점포 수를 오히려 레버리지로 활용하는 전략입니다.

완전히 다른 시장을 개척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편의점이 ‘식품 사막’ 지역을 새로운 시장으로 고려해 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시에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우리나라에서 장보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지역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전국 행정리 3만 7000여 곳 중 2만 7000여 곳에 주민들이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소매점이 없습니다. 당연히 쿠세권도 아니고요.

편의점의 쓸모

신선식품을 쉽게 살 수 없는 환경은 건강 문제를 초래합니다. 하루 몇 대 없는 버스를 기다려 장을 보러 나가야 하니, 날이 궂으면 포기하고 맙니다. 토마토 대신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과자를 먹고, 장아찌와 김치같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염장 음식에 의존하게 됩니다. 식품사막 지역을 몇 곳씩 묶어 유통 공백을 메우는 식으로 운영하는 그림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사업을 잘 설계해야겠죠. 정부의 지원도 필요합니다.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이 시범적으로 식품 사막 지역에 이동식 마트를 운영해 봤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적자가 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입니다. 기업도 지역도 이익을 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어야겠습니다.

편의점은 여전히 소매 유통의 최전선입니다. 사람들의 삶과 함께하는 공간입니다. 지난 2024년 세븐일레븐이 캐나다의 한 유통업체에 인수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일본 정부가 강력히 개입한 일이 있습니다. 편의점을 재난 상황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공급하고 물류 및 통신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필수적 사회 안전망으로 본 겁니다. 전성기는 끝났을지라도, 우리에게 편의점과 같은 소매 유통점은 여전히 중요한 공간입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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