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에 가까운 존재

bkjn book review

그날 이후 바둑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주관의 영역을 무시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주관과 편견이 비슷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편견은 부조리와 비극을 낳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조건을 먼저 보는 어리석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잃었고 차별받았으며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눈을 가리기로 합니다. 객관이라는 방법을 추앙하는 겁니다.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누가 봐도 똑같이 읽어야 합니다. 숫자만큼 딱 들어맞는 게 드물죠. 데이터가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숫자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신화가 생긴 겁니다. 데이터를 근거로 한 주장에 토를 다는 것은 ‘비과학적’인 일입니다. 21세기의 비과학은 중세 시대의 이단과 크게 다르지 않죠.

저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기술 문명과 숫자에 근거한 사고방식은 일종의 ‘고향’이며 ‘종교’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숫자가 진실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고, 퍼뜩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장강명 작가의 《먼저 온 미래》를 읽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2016년 이후의 세계

2022년 흥미로운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2010년대 후반부터 프로 바둑 기사들의 기량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시기적으로 구급 딥마인드의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 이후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프로 바둑 기사들의 실력이 거의 정체되어 있었는데, AI가 인간보다 우월한 실력을 갖추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이전에는 아예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경지에 인간 바둑 기사들이 속속 도달하고 있습니다.

논문은 이 실력 향상의 40퍼센트 정도는 AI가 두는 수를 암기해서 발생했고, 나머지 60퍼센트는 인간의 창의력이 만들어냈다고 분석합니다. 세계 최고의 인간도 압도하는 실력자의 등장으로 인간 바둑 기사들이 의심하지 않았던 수(手)를 재평가하게 되었고, 직관에의 의존이 약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AI가 전체적인 바둑의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것이죠.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술이 인류를 진보시키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 논문은 곧 잊어버렸습니다. 결론만을 제 머릿속 어딘가에 대충 남겨둔 채 말이죠. 그런데 장강명 작가가 직접 취재한 현실은 좀 달랐습니다. 바둑계가 맞이하게 된 것은 진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장강명 작가는 작가로서의 ‘롤 모델’로 조지 오웰을 꼽습니다.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가로 사랑받는 작가들이지만, 둘 다 논픽션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지 오웰은 기자이자 르포르타주 작가였습니다. 영국의 빈곤 문제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직접 노숙자 생활로 뛰어들 만큼 현실과 정면으로 부딪쳐 사유한 작가입니다. 장강명 작가도 잘 알려진 대로 《동아일보》의 기자 출신입니다. 《댓글부대》나 《우리의 소원은 전쟁》과 같은 소설은 작가의 엄청난 취재력과 그에 걸맞는 사유의 깊이를 짐작게 합니다.

이번 책에도 작가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한국 바둑계를 깊고 충실하게 취재했습니다. 그곳에 미래가 먼저 왔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2022년 11월 30일에 미래를 맞이했습니다. 오픈AI가 챗GPT를 처음으로 공개한 날입니다. 프로 바둑 기사들이 미래를 맞이한 날은 2016년 3월 9일이었습니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가 열린 날입니다.

장강명 작가는 프로 바둑 기사들을 여럿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래를 만난 날과 그 이후의 변화에 관해 말입니다. 사람마다 느낀 바가 달랐고, 생각하는 바도 다릅니다. 미래를 향한 전망도 엇갈립니다. 하지만 인터뷰에 응한 모든 바둑 기사들의 의견이 모이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날 이후 바둑은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데이터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실재’가 《먼저 온 미래》에 담겼습니다. 
더는 이런 대국을 볼 수 없습니다. 2017년 이후 구글 딥마인드는 알파고의 경쟁 대국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 출처: Google DeepMind
바둑이 승부가 되면

저는 최근에야 체스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규칙을 겨우 익히는 중입니다. 바둑은 줄바둑을 조금 둘 줄 아는 정도입니다. 문외한에 가깝죠. 그래서 ‘AI가 체스에서는 인류를 이길 수 있어도, 바둑에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둑 기사들의 판단에는 근거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흔히 했던 착각입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창의력은 따라올 수 없다는 착각 말입니다. 단순 반복 업무나 복잡한 계산, 어쩌면 지식의 영역까지는 AI가 따라올 수 있겠지만,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상상력은 인간만의 영역이라는 믿음이 얼마 전까지 있었죠.

바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체스는 계산력과 기억력만 좋다면 판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습니다. 무한대에 가깝지만, 경우의 수가 정해져 있죠. 각 말이 이동할 수 있는 경로 등 규칙이 까다롭게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바둑은 처음부터 끝까지 돌로 전투를 벌이는 과정입니다. 누가 언제 어떤 판단을 해 어디에 수를 놓을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기발한 수, 천재적인 수라는 말이 성립하는 이유입니다. 그런 바둑을 AI가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겁니다.

2016년, 그 믿음이 깨지자, 바둑계는 상상해 본 적 없는 충격을 받습니다. 감정적인 동요나 절망 같은 것도 물론 있었지만, 바둑을 공부하는 방법부터 바둑을 두는 방법, 즐기는 방법까지 송두리째 흔들리고 뒤집혔습니다. 정답이 없던 세계에 정답에 준하는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신이 사라진 자리

예를 들면, 바둑을 공부하는 방법이 연구에서 암기로 옮겨갔습니다. 특히 초반, 중반, 종반 중 초반이 그렇다고 합니다. 대국을 시작하고 몇십 수는 AI 바둑 프로그램으로 공부하여 암기한 대로 두는 겁니다. 누가 더 열심히 공부해 한 수라도 더 많이 암기했느냐에 따라 초반의 유불리가 갈립니다.

예전에는 자신보다 더 잘 두는 스승과의 대국을 통해 배웠다고 합니다. 함께 모여 수를 연구하는 연구 모임도 무척 활발했고요. 바둑판에는 신이 있었습니다. 바둑에 큰 관심이 없어도 이름을 아는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등과 같은 최고의 기사들입니다. 그들이 둔 절묘한 수를 함께 분석하며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실력이 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AI가 등장하면서 신은 사라졌습니다. AI에 패한 신이란 있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대신 정답에 가까운 존재가 등장했습니다. 한 수씩 둘 때마다 AI는 승률을 예측하고 다음 둘 수를 몇 가지 추천합니다. 각각의 추천 유형별로 승률이 제각각이고요. 바둑은 두는 사람의 스타일을 반영합니다. 공격이 강한 기사도, 수비 위주로 작전을 짜는 기사도 있습니다. 모험을 감행하거나 보수적인 기사도 있죠. 하지만 AI라는 정답이 존재하는데, 내 식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바둑은 승부이기 때문입니다. 이겨야 살아남는 프로의 세계에서 AI를 무시할 수 있는 기사는 거의 없습니다.

장강명 작가는 상상합니다. 이렇게 써야 더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더 잘 팔린다고 알려주는 AI가 등장했을 때, 작가들은 AI를 거부할 수 있을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본인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런 실재가 다가왔을 때 인간이 경험하게 될 상실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자기 일에서 주인공이 아니라 보조적인 위치로 밀려났을 때의 상실감 말입니다. 바둑에서 예술을 봤던, 어떤 프로 기사들이 이미 경험한 것과 비슷한 감정입니다.
현재 세계 최고 기사로 꼽히는 신진서 9단은 AI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 출처: KBS
좋은 상상을 하는 것

상상한 적 없는 방식으로 기술의 충격을 온전히 다 받아낸 바둑계의 이야기는 데이터 같은 것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직접 들어 기록하고 사유하는 방식으로만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르포르타주의 힘입니다. 그들이 되어 그들의 이야기와 감정을 공유하는 경험을 안깁니다. 《먼저 온 미래》는 AI가 만들어낼 변화를 먼저 경험한 공동체에 관한 르포르타주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장강명 작가는 자신의 사유와 주장을 이어 붙입니다. 객관적이라 할 수 없는, 다분히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주장을 말입니다.

“우리는 과학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는 헛소리를 경계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AI는 기회였습니다. 고수에게 지도를 받을 기회가 제한적인 사람들에게도 바둑을 깊이 공부할 길이 열렸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생계를 위협받았습니다. 바둑을 가르치는 ‘스승’의 권위는 떨어지고, 그 자리의 숫자도 줄었습니다. 무엇보다 실력의 인플레이션이 나타났습니다. 초반엔 AI로 공부한 대로 수를 두니, 노력한 만큼 실력이 치솟는 겁니다. 대신 포석을 잡는 과정에서 드러났던 선수들의 개성이 흐릿해지니 경기의 재미가 떨어집니다. 무엇보다, 바둑이 가진 아우라가 깨지면서 승부만 남았습니다.

이건 자연재해의 결과가 아닙니다. 구글이라는 거대 기업이 AI라는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 발생한 일입니다. 구글이 바둑계라는 공동체에 그런 일을 해도 괜찮았던 걸까요? 건물을 지어도 그게 사람에게 안전한지 검사를 하는데, 기술 기업들이 만드는 상품에는 그런 과정이 없습니다. 청소년들이 우울증에 빠지고 가짜 뉴스가 퍼져 나가고 급기야 정치의 문법까지 뒤틀리는데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자의 문제라고 하죠.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기술은 돈과 권력의 목적성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조지 오웰이 《1984》를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1984년을 경계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 ‘오세아니아’와 같은 디스토피아를 기어이 맞이했을지도요. 기술의 속도를, 목적을 경계해야 한다는 이 책을, 일종의 ‘러다이트 운동’ 같은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장강명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아직 ‘좋은 상상’을 할 능력이 있습니다. 다음 올 미래에 관해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bkjn book review는 단순 서평이 아닙니다. 원전을 해체해 다른 책, 기사, 논문과 연결합니다. 매월 한 권의 책을 리뷰합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