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 나라를 운영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베네수엘라에 대한 군사 작전을 감행한 직후 내놓은 말입니다. 미국 동부 시간 기준 1월 3일 새벽 1시, 미군은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한 안전 가옥에 병력을 투입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체포했습니다. 마두로는 결박된 채 미국으로
압송됐습니다.
트럼프는 군사 작전을 성공시킨 뒤 기자 회견을 열고 미국이 베네수엘라에서 과도 정부 역할을 맡고, 미국 기업들이 석유 산업을 재건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군사 작전은 단순한 체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국가의 통치와 자원 관리까지 미국이 맡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사라진 명분
미국이 서반구에서 힘의 논리를 앞세운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1983년 그레나다 침공, 1989년 파나마 침공 등 미국은 라틴아메리카를 ‘뒷마당’으로 간주하며 반복적으로 무력을 행사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워싱턴은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덕적·법적 비계를 세웠습니다.
파나마의 마누엘 노리에가 정권을 무너뜨릴 때 미국은 미국인 보호, 운하 조약 준수, 부정 선거 시정, 마약 단속이라는 여러 명분을 줄줄이 제시했습니다. 그레나다 개입 역시 의대생 보호와 동카리브 국가 기구의 요청이라는 외피를 썼습니다. 설득력이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미국은 적어도 자국의 군사 개입을 국제 질서의 예외적 조치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베네수엘라 사태는 과거 사례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번 군사 행동을 설명하며 과거의 복잡한 명분을 거의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마두로를 ‘나르코-테러리스트’로 규정해 미국 법정에 세우겠다는 설명은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오히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를 당분간 미국이 “운영(run)”하며, 석유 수익으로 점령 비용을 충당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군사 개입의 목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발언이었습니다.
미국이 타국의 독재자를 군사력으로 축출한 적은 있었지만, 대부분 전면전이나 공식 침공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뤄졌습니다. 이번처럼 선전 포고도, 전쟁 상태 선언도 없이 단시간의 기습 작전으로 현직 국가 원수를 체포하고, 그 나라의 통치와 자원 관리까지 직접 맡겠다고 밝힌 사례는 찾기 어렵습니다. 워싱턴은 더 이상 자신을 규범의 수호자로 포장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성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힘이 곧 권리다
전통적 국제법 질서에서 군사 개입은 언제나 규범적 정당화를 전제로 했습니다. 합법성에 대한 논쟁, 다자 기구의 승인, 절차적 정당성은 개입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군 작전에서는 그런 과정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합법성은 사전에 검증되지 않았고, 사후적으로 간략히 언급되었을 뿐입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규범이 살아 있는 체제에서는 위반이 논쟁을 낳습니다. 반대로 이번 사태처럼 논쟁 자체가 실종된 경우는, 규범이 훼손된 것이 아니라 이미 작동을 멈췄음을 의미합니다. 규범은 행동을 제한하는 기준이 아니라, 행동 이후에 덧붙여지는 설명으로 전락했습니다. 국제 질서를 규범 중심 체제라고 부르기 어려워진 이유입니다.
새로운 국제 질서의 형성
미국의 대외 군사 태세는 더 공격적으로 변했다기보다, 더 단순해졌습니다. 베네수엘라 개입에는 민주주의나 인권 같은 보편적 가치의 언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르코-테러’라는 범죄 프레임은 군사력을 법 집행의 연장선으로 재배치했고, 그 순간 주권 침해는 논쟁의 대상에서 빠져나갔습니다. 석유와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실리적 이해는 숨겨지지 않았고, 숨길 필요도 없었습니다. 강대국의 행동반경을 제한하던 설명의 장치가 무너진 것입니다.
이 변화는 미국의 외교 스타일 변화로만 설명되기 어렵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를 제어해야 할 국제 규범 체계가 기능을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유엔과 국제사법재판소, 다자 외교는 이번 사태에서 사실상 주변화됐습니다. 국제 사회는 분열된 반응을 보였고, 집단적 제동 장치는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 공백은 가장 먼저 소국의 주권을 잠식합니다. 규범이 보호 장치로 작동하지 않는 환경에서, 주권은 더 이상 보편적 권리가 아닙니다. 힘의 균형에 따라 조건부로 인정되는 지위가 됩니다. 이번에는 ‘나르코-테러 국가’라는 이름으로 개입이 정당화되지만, 내일은 사이버 안보, 에너지 안보, 금융 범죄라는 다른 이름이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기준이 사라진 자리에는 선례만 남고, 선례는 언제나 다음 개입의 문턱을 낮춥니다.
그 결과 국제 질서는 규칙의 체계에서 사례의 집합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허용되는지는 국제 사회가 합의해서 만든 조약이 아니라 직전 사건이 결정합니다. 냉전 이후 구축된 규범 중심 질서는 붕괴 직전에 와 있습니다. 국제 질서에서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는지를 결정하는 잣대가, 다시 규범에서 힘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시대는 끝났지만, 제국이 세계를 바라보던 사고방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026년의 강대국은 영토를 병합하지 않습니다. 대신 다른 나라를 관리하고, 통제하고, 필요하면 직접 개입합니다. 제국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제국적 논리는 다시 국제 질서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