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1984》는 도래하지 않은 디스토피아입니다. 하지만 소설이 암시했던 모든 비극은 현실 세계에 존재했거나 지금도 존재합니다. 일부는 이제야 도래하기도 했죠. 사실과 진실의 정의를 권력의 필요에 맞춰
고쳐 쓰는 일이 당연한 사회 같은 것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2026년의 우리가 가장 절감하게 되는 부분은 오웰이 그린 블록화된 세계관입니다. 《1984》의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의 세 개의 초강대국(Superstates)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각각 미국과 러시아, 중국을 중심으로 한 거대 정치 블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웰이 창작한 역사 속에서 동맹관계는 존재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 고쳐 서술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세 블록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권력을 공고히 유지한다는 점입니다. 전력이 서로 비슷하고, 천연 방어벽 또한 강력합니다. 오웰의 소설 속에서 각 블록은 자급자족합니다. 블록 간에는 무역이 없지만, 블록 내 경제활동만으로도 경제는 충분히 유지됩니다. 오히려 공고한 독재를 위해 잉여 생산물을 파괴해야 할 지경이죠. 어쩌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1984》 속의 세 블록과 같은 세계를 만들어 가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흡사 소설 속 오세아니아 제국과 비슷한 블록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영국과 호주는 이미 파이브 아이즈 (Five Eyes, FVEY)의 일원으로 묶입니다. 남미 지역은 최근까지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추세였지만, 이번 마두로 대통령 체포를 계기로 ‘서반구’ 전역에 대한 미국의 ‘관리’가 공고해질 겁니다.
문제는 이런 트럼프의 제국주의적인 외교 정책에 유권자가 동의하느냐입니다. MAGA 세력은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느라 정작 미국의 국민을 등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트럼프는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네수엘라 공습은 단지 석유 때문에 생긴 예외였을까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제 막 영토 확장에 돌입했을 뿐입니다.
미국은 원래 자급자족이 가능한 국가였습니다. 수출액 기준으로는 세계 최대의 농업국입니다. 제조업도 튼튼했죠. 각종 자원도 풍부하고요. 무엇보다, 석유를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2024년까지 이어진 페트로-달러 협정을 통해 사우디아라비아가 판매하는 원유는 달러로만 결제할 수 있었죠. 2010년대 이후로는 셰일 혁명을 통해 세계 최대의 산유국으로 거듭났고요. 그런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세계화입니다.
노동력이든 자원이든 제일 싼 곳에서 공급하니, 풍요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경제적 상호 의존성이 지정학적 권력 투쟁을 압도하게 되었죠.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보기에 이 ‘상호 의존성’이라는 것은 미국에 독이 되었습니다. ‘공급망’을 인질 잡혀 중국과 같은 적국에 질질 끌려다니는 신세가 된 겁니다. 미국은 더 이상 위대하지 않은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생국의 임무
역사 속에서 미국이 늘 위대했던 것은 아닙니다. 위대해지기 위해 투쟁해 왔고, 그 중요한 수단 중 하나가 바로 영토 확장이었습니다. 아메리카 선주민에게서 땅을 거의 강탈했다는 것은 더이상 논란의 여지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9세기의 미국 역사는 정복의 역사였습니다.
멕시코의 일부였던 텍사스는 미국계 이주민 중심으로 무장 봉기해 독립한 후 미국에 편입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미국과 멕시코는 전쟁을 벌이게 되고, 승리한 미국은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 거대한 영토를 멕시코로부터 헐값에 확보하게 됩니다.
플로리다는 스페인으로부터 무력행사를 통해 넘겨받았고, 루이지애나는 프랑스로부터 사들였습니다. 알래스카도 러시아로부터 사들인 땅이죠. 태평양 한가운데 하와이의 경우에는 미국인 사업가들이 주도한 쿠데타와 무력 개입을 통해 주권 국가였던 왕국을 무너뜨리고 병합했습니다. 미국은 18세기 후반에 건설된 신생국입니다. 영토 확장은 국가의 힘을 키우기 위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미국인은 그 얼마 되지 않은 역사를 교육받습니다. 정복의 역사라기 보다는 건국의 역사로 말입니다.
미국의 방식
이번 베네수엘라 공습은 어떨까요. 2025년 12월 국가 안보 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NSS)
보고서에서 언급했던 대로 “미국이 아틀라스처럼 전 세계 질서를 떠받들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마두로 대통령 체포는 세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작전이 아니었다는 얘깁니다.
영국의《이코노미스트》가 흥미로운
여론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원래 MAGA 세력은 마두로 대통력 축출에 대해 절반 정도가 찬성하고, 4분의 1이 반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실제 작전이 진행된 이후의 여론 조사에서는 80퍼센트가 마두로 축출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대는 9퍼센트에 그쳤죠.
이 결과를 두고 미국이 국제 정세에 개입하는 것에 극도로 반대하는 MAGA 세력도, 지도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결집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입니다. 하지만 좀 다르게 해석해 볼 여지도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작전 성공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다면 지상군 파병(boots on the ground)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국 기업들이 (베네수엘라에서) 막대한 부를 뽑아낼(take out) 것.”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작전이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필요하다면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다고도 이야기합니다. 베네수엘라의 정치를 정상화하는 것은 목적이 아닙니다. 향후 통치 계획에 대해 현재 부통령과 협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마두로 대통령과 함께 부정선거로 당선된 인물입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야권 지도자에 관해서는 ‘지지 기반이 없다’며 정권 이양 가능성을 일축했습니다. 베네수엘라 정치는 조만간 선거를 통해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입니다.
베네수엘라는 미국 코앞입니다.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량을 자랑함과 동시에,
쿠바를 비롯한 주변 반미 국가들에 에너지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1세기에 주권 국가인 베네수엘라를 미국이 정복하기란, 아무리 트럼프라 해도 쉽지는 않겠죠. 하지만 미국이 그에 준하는 지위를 획득하고, 필요한 무엇이든 ‘뽑아내는 것’을 막아설 방법은 없습니다.
MAGA 진영에서는 콜롬비아나 쿠바는 물론 그린란드 등까지 식민지화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논의가 나옵니다. ‘팽창은 건국 초기부터
미국의 방식’이었다면서 말이죠. 백악관 부비서실장
스티븐 밀러는 〈CNN〉에
출연해 대놓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현실 세계는 힘과 무력,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요. 이것이 태초부터 이어져 온 불변의 법칙이라고 말입니다.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국의 충돌
오웰이 그렸던 세 개의 블록 중 오세아니아만 자리를 잡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자국 군인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지만, 전쟁을
멈출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2026년에는 유럽 대륙을 향해 사이버 공격 등
회색 지대에 해당하는 위협을 확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푸틴은 제국주의자입니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와 동유럽을 러시아의 절대적 영향권 아래 두려는, 일종의 ‘
얄타 2.0’ 체제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1984》 속의 유라시아 블록과 흡사합니다. 상황은 푸틴에게 나쁘지 않습니다. 경제 침체에 시달리는 유럽 내부에서 러시아와의 관계 회복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과 가장 거리가 먼 블록을 구축하고 있는 것은 중국입니다. 시진핑 주석은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경제 발전에 드라이브를 걸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세계의 공급망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고요. 다만, 소설과는 달리 중국이 자신의 블록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지역은 일본과 한국보다 브릭스(BRICS) 국가들입니다. 베네수엘라 작전은 이 야망에 제동을 걸었고요. 남미 지역은 미국의 영역이라는 선언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과
관리된 경쟁을 지속할 의사가 있습니다. 대만에 대한 ‘전략적 모호성’이 그 증거입니다. 이번 NSS에서는 대만에 관해 ‘현 상황의 일방적 변경’을 경계했을 뿐, 이전에 비해
언급 수위가 낮아졌습니다. 이제 미국이 대만을 중국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라는 희망은 불안합니다. 시진핑 주석 입장에서는 ‘중국몽’에 한발 다가선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트럼프의 지나친 발언들은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캐나다를 향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해 들어오라고 제안했던 일, 그린란드 주민에게 주민 1인당 최대 10만 달러까지
지급하겠다는 정책 같은 것들 말입니다. 모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영토 확장의 일환입니다. 블록을 든든하게 구축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 제국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이란의 상황을 조심스럽게 예측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란에서는 2주 넘게 지속된 반정부 시위 사태가 이어지면서 몇백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을 향해 유혈 사태가 있을 경우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고요. 현재로서는 이란과 교역하는 국가들에 25퍼센트의 관세를 매기겠다는 식으로 우회적인 제재를 가하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전례가 발생한 직후이니만큼, 전 세계가 테헤란이 다음 타깃이 될 것인지를 놓고 긴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무리 트럼프라 하더라도 이란을 오세아니아 블록에 포함하려는 시도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MAGA 세력이 경계하는 미국의 ‘
실패한 개입’은 동유럽이나 중동과 같은 지역에서 발생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이란이 세 블록 바깥의 영역에 머물도록 관리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입니다. 무력의 사용 여부와는 관계 없이 말이죠. ‘
신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