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도 라스베이거스는 뜨거웠습니다. 소비자 기술 분야의 연례 최대 행사인 CES 2026 얘깁니다. 4100곳 이상의 업체가 전시에 참여했고, 지난 1월 9일 폐막까지 관람객 14만 8천 명 이상이 찾았다고 합니다. 2025년에 비해 참여 업체는 400여 곳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관람객은 1000여 명 늘어났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CES를 향한 관심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기술이 우리 삶을 바꿀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그 기대의 중심에는 AI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엔비디아가 선보인 자율주행 플랫폼 ‘알파마요’ 같은 것 말입니다. 과학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한 기술이 당장 나의 출근길을 안락하게 만들어 줄 ‘상품’으로 해석되어 제공되는 현장이 바로 CES입니다.
그런데 CES가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딘가 좀 힘이 빠졌고, 화려함도 덜하다는 겁니다. 낡고 헐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전시장을 둘러보면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던 부스들이 꽤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나 메타 같은 기업들이 메인홀이라 할 수 있는 LVCC 센트럴 홀에서 빠져 윈 호텔로 전시 공간을 옮겼습니다. 소니도 센트럴 홀을 떠났고 파나소닉은 부스 규모를 축소해 극장식 체험 공간을 새로 꾸몄습니다.
CES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CES의 변화를 따라가 봅니다.
에디슨의 개회사
20세기 초반의 미국, 그중에서도 뉴욕과 같은 대도시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각 가정에 전기가 빠른 속도로 보급되기 시작되었고 라디오, 엑스레이, 비행기 등 신문물이 빠르게 거리로 쏟아졌습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전화기, 진공청소기, 전자레인지, 냉장고 등이 새로운 가정의 모습을 정립했고요. 이런 시대였으니, 앞으로 다가올 기술 혁신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전자 제품 박람회는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6년 1월에 개최된 제1회 시카고 전자 박람회는 테디 루스벨트 대통령과 토머스 에디슨의 ‘
무선 메시지’로 화려하게 막을 열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우주 어딘가에서 키노트를 하는 수준의 감동이었겠지요.
이후 전쟁이 끝나고 회복의 시간을 지난 뒤, 눈부신 신제품들을 선보일 무대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지금은 라스베이거스가 CES를 상징하는 도시로 자리 잡았지만, 시작은 뉴욕이었습니다. 1967년 뉴욕의 힐튼 호텔과 아메리카나 호텔에서 처음 CES가 열렸습니다. 200여 개 기업이 참가한 작은 박람회였지만,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나흘 동안 1만 7500여 명이 뉴욕의 두 호텔로 몰려들었으니까요. 집적 회로를 탑재한 최신형 휴대용 라디오와 TV 등이 전시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CES는 과학의 발전이 소비자의 삶을 새롭게 정의하는 장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라스베이거스로 장소를 옮기면서 규모는 더욱 커졌고요. 1970년에는 VCR이, 1981년에는 CD 플레이어가 선보였습니다. 테트리스도 1988년 CES에서 공개되었습니다. 인류의 생산성을 새롭게 정의한 기술들도 CES에서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초기 버전의 가정용 컴퓨터는 1978년에, 디지털 위성 시스템은 1994년에 선보였죠. 어떤 기술은 꾸준히 사랑받는 상품으로 남았고, 어떤 기술은 잠깐의 흥분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애플 없는 아이폰 축제
1980년대 이후 한동안 CES에서는 일본 기업들의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소니, 파나소닉 등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일본 전자 기업들이 혁신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세를 다시 미국 쪽으로 되돌린 것이 아이폰의 등장과 함께 찾아온 모바일 혁명입니다. 2010년대 CES에서는 관련 서비스, 새로운 모바일 기기 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모두 방향성은 맞았지만, 과녁을 맞춘 제품은 많지 않았죠. 예를 들면 윈도우 운영 체제를 탑재한
스마트폰이나 스포티파이, 애플뮤직 이전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등입니다. 시대를 앞서간 실패 사례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화려한 CES 전시장에 혁명의 주인공이었던 애플은 좀처럼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1990년대 초 이후로 애플은 CES 행사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적이 없습니다. 2009년 이후로는 업계의 다른 전시회 참가도 완전히 중단했죠.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의 매년 CES가 끝나면 애플의 영향력에 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새로운 콘셉트의 스마트폰이 등장하면 아이폰과 비교하면서 애플의 아성을 뒤집을 수 있을지 예측하고, 스마트 TV 기술이 선보이면 애플TV부터 언급하는 식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애플은 독자적인 전시 공간을 전 세계에 갖고 있습니다. 브랜드의 팬들이 언제든지 찾아와 행복에 취할 수 있는 애플 제품의 천국, 애플 스토어 말입니다. 전 세계 애플 스토어에 매주 몇백만 명이 방문합니다. 14만 명이 방문하는 CES에 굳이 부스를 차릴 이유가 없죠. 수많은 경쟁사 제품 속에서 돋보이려 애써야 할 필요도 없고요.
게다가 애플은 브랜드가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는 연례행사가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와 팀 쿡이 직접 참여하는 키노트 행사 말입니다. 특히, 잡스 시절의 키노트는 도저히 놓칠 수 없는 공상 과학 쇼였습니다. 발표되는 기기들이 세상을 바꿀 테니까요. 손바닥보다 작은 기기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면, 서류봉투에서 꺼낼 수 있는 노트북이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까요? 애플의 키노트는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한 질문을 던졌고, 곧바로 그 답을 보여줬습니다.
사기가 된 기술들
CES에 참가하든 참가하지 않든, 다른 빅테크들도 애플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그 결과 CES는 조금 지루해졌고요. 결정적 순간보다는 결정적 순간을 저렴한 상품으로 파편화한 제품들이 소개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아이폰이 아니라 아이폰 액세서리 제품들이 전시되는 공간이 된 겁니다. 물론 TV 등 백색 가전 쪽에서는 다른 종류의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특이점과는 거리가 먼 분야였죠. 자동차 업계도 CES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완성차 업계의 혁신을 상징하는 테슬라는 애플과 같은 이유로 CES에 참여하지 않았죠.
변화가 다시 찾아온 것은 AI 덕분입니다. 챗GPT 서비스의 등장으로 소비자 가전 시장은 스마트폰을 뛰어넘을 신기술을 확보하게 됩니다. 다만, 초반의 상상력은 생성형 AI 모델의 발전 속도와 방향을 오판했습니다. 기술의 정점이 어디인지 몰랐고, 설익은 제품을 내놓았다가 실망으로 끝나기 일쑤였죠. 휴메인의 ‘AI핀’, 래빗의 ‘R1’ 등이 CES 2024에서 소개되었지만, 출시 후엔 ‘사기’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써야 했습니다.
당시 방향성이 엇나갔던 까닭은 업계를 지배하고 있는 패러다임이 ‘스마트폰’이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디지털 기기의 패러다임은 아이폰의 등장으로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생성형 AI의 등장도 비슷한 방식으로 올 것이라는 예측이 본능처럼 업계를 덮친 겁니다. 그래서 스마트폰의 자리를 대체하면서 스마트폰 이상의 기능을 수행하는 무언가를 상정한 기기들이 쏟아졌습니다. ‘에이전트 AI’의 도래에 발맞출 제품이 다음 패권을 차지할 것이라고 본 겁니다.
하지만 AI는 스마트폰보다는
전기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CES에 등장한 모든 기술이 전기라는 대전제를 상정하듯, AI는 모든 기술의 전제가 될 겁니다. 적어도 업계는 이제 그렇게 생각합니다. CES 2026의 키워드는 피지컬 AI, 즉 인공지능을 탑재해 알아서 일하는
중국발 휴머노이드 로봇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알아서 빨래를 갤 줄 아는 로봇 말입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더욱 주목받은 것은 그 로봇들이 빨래를 개는 데에 한세월이 걸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직은 조금 먼 미래입니다. 대신 가까운 미래를 겨냥한
제품들은 AI 냉장고나 AI 초인종, AI 러닝머신, 스마트 레고 블록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제품들 모두 이번 CES의 주인공은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은 엔비디아니까요. 젠슨 황은 심지어 본 행사가 시작하기도 전, 오후 1시에 따로 시간을 잡아 ‘스페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습니다. 반면, 이번 CES 공식 개막 키노트였던 AMD의 리사 수 CEO의 프레젠테이션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고요.
전시장보다 회의실이 중요해진 이유
CES는 전문 무역 박람회입니다. 정식 명칭은 ‘The Consumer Electronics Show’로, ‘소비자 가전 박람회’쯤 되겠네요. 업계 사람들을 위한 행사지만, 대중적인 인기도 높습니다. 그래도 엄연히 업계 행사입니다. 엔비디아가 GTC라는 독자적인 축제를 매년 개최하면서도 CES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이유입니다. B2C가 아니라 B2B 기업이기 때문에 파트너사와의 관계 및 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죠.
2026년도 CES에서 엔비디아는 퐁텐블로 호텔에 따로 전시관을 마련했습니다. 호텔 곳곳의 연회장이 엔비디아 전시장으로 변신했고, 엔비디아와 협력을 원하는 기업들이 긴밀히 논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습니다. 엔비디아는 단순한 부품 제조사가 아니라 AI 시대의 새로운 플랫폼 기업으로 거듭나고자 합니다. AI를 이용해 로봇을 만들든, 자율주행차를 만들든 엔비디아의 시스템을 사용하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엔비디아는 CES에 참여했지만, 메인 전시홀 바깥에 고객과 제대로 만날 공간을 따로 확보한 겁니다. 여기서 고객이란 소비자가 아니라 로봇회사, 완성차 회사 등이겠죠.
삼성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성은 LG와 함께 꽤 오랜 기간 주 전시장을 화려하게 장식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윈 호텔로 장소를 옮기면서 훨씬 더 넓은 전시 공간을 확보했습니다. 이건 일종의 자신감일 수도 있겠습니다. 고객이 일부러 윈 호텔까지 찾아오리라는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요. 또,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공간에서 AI 기반의 가전, 디스플레이 등을 시연해 몰입감을 높이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습니다. 메타나 퀄컴 등도 윈 호텔에 따로 회의실을 확보했습니다. 협력사와 긴히 할 얘기가 많다는 뜻이겠지요.
메인홀에서도 화려한 볼거리는 넘쳤습니다. 특히 갈수록 체험형 전시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CES에 기대하는 미래의 기술은 문이 닫힌 호텔 회의실에서 작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휴메인이나 래빗과 같은 실험적인 스타트업이 아닌 빅테크들이 펜을 잡았습니다. 아직은 그 기술을 모두에게 전시할 단계는 아니지만, 설계도를 함께 그리는 단계입니다. 2026년의 CES는 숨 고르기였습니다. 우리 삶을 바꿀 기술은 아직 전자 제품이 되기 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