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차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8개국이 반대하며 그린란드에 병력을 파견했거나, 파견 의사를 밝혔습니다. 미국과 전쟁을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소규모 병력을 보냈습니다. 상징적 조치입니다.
트럼프는 그 정도 체면도 세워 주지 않았습니다. 그 8개국을 상대로 2월 1일부터 대미 관세를 10퍼센트 부과하기로 했습니다. 6월 1일부터는 25퍼센트 관세가
부과됩니다.
최근 중국은 일본에 중국산 희토류 수출을 금지했죠. 미국이나 중국이나 주변 국가들을 거칠게 상대하고 있는데요, 미국과 중국이 힘을 과시하는 방식은 구조적으로 다릅니다.
자원과 질서
중국이나 러시아가 무기화하는 것은 자원입니다. 희토류, 천연가스 같은 물질입니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이며, 특정 산업의 입구에 해당합니다. 중국산 희토류를 들여와야 일본이 반도체 장비를 만들고,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들여와야 유럽이 공장을 돌립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상대국이 쉽게 대체하기 어려운 자원을 인질로 삼아, 상대국을 통제합니다.
트럼프의 방식은 다릅니다. 트럼프는 물질을 통제하지 않습니다. 대신 미국이 주도해서 만든 국제 질서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조건화합니다. 달러 결제 시스템, 군사 보호, 미사일 방어, 정보 공유, 그리고 미국 시장 접근 같은 것들입니다. 운영 체제(OS)입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게 다르니, 통제 방식도 다릅니다. 트럼프는 뭔가를 주지 않는 방식이 아니라, 접속 레벨을 낮추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중국은 수틀리면 아예 안 주겠다고 하지만, 미국은 수틀려도 일단 쓸 수는 있게 합니다. 대신 더 비싸진다고 말합니다. 봉쇄가 아니라, 특정 사용자에 대한 요금 인상입니다.
거래의 기술
요소수 대란을 겪은 우리나라로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방식이 더 무시무시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미국의 방식이 더 무섭습니다. 수출 중단은 선택지가 없습니다. 그냥 안 주겠다는 겁니다. 당장은 고통스럽겠지만, 상대방에게 벗어날 수밖에 없는 동기를 줍니다. 그래서 중국의 희토류 무기화는 탈중국 공급망으로 이어집니다. 러시아의 천연가스 무기화는 탈러시아 공급망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미국은 질서라는 서비스 자체를 끊지는 않습니다. 요금을 올릴 뿐입니다. 희토류와 천연가스는 몇 년 고생하면 대체재를 어떻게든 구할 수 있지만, 미국이 만든 OS는 다른 데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트럼프가 마음에 안 든다고 영국, 독일, 프랑스가 중국, 러시아와 동맹을 맺지는 않습니다.
결국 미국이 짠 판에서 탈퇴할 수가 없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결국 이탈하지 못하고 일단 반발을 좀 하다가, 결국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됩니다. 중국의 자원 수출 통제는 탈중국 공급망을 낳지만, 미국의 질서 요금 인상은 협상을 낳습니다. 트럼프는 정말이지 거래의 달인입니다.
나토 고객님의 요금제
미국과 유럽 8개국의 충돌을 두고 나토의 붕괴를 말하는 분석도 있습니다. 저 역시 나토의 균열과 붕괴를 경고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정확히는, 나토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토는 더 이상 자동으로 작동하는 집단 안보 장치가 아닙니다. 트럼프의 세계관에서 나토는 이미 확보한 충성 고객입니다.
유럽 국가들이 트럼프의 협박에서 느낀 불쾌감의 본질은 관세 부과 그 자체가 아니라, 무료 요금제 사용자에서 유료 플랜 사용자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 기분 나쁜 건 이 전환이 합의나 조약이 아니라, 트럼프의 말 한마디로 이뤄졌다는 겁니다.
트럼프는 그린란드 매입에 반대하는 유럽 8개국을 상대로 관세 부과를 예고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 관세는 그린란드의 완전하고 총체적인 매입에 관한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부과된다.”
이건 정복자의 언어가 아닙니다. 구독 약관의 언어입니다. 트럼프의 미국은 더 이상 우리에게 너는 누구의 편이냐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 어떤 플랜을 쓸 것인지를 묻습니다.
미국이 만든 국제 질서를 이용하려면 이제 돈이 듭니다. 정치적 태도와 행동에 따라 제공되는 서비스도 다르고 요금도 달라집니다. 그린란드는 미국이 만든 새로운 구독형 질서의 베타 테스트입니다.
중국의 한계
중국도 질서를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위안화 국제화, 일대일로, AIIB 같은 시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질서를 상품화하려면 희토류 통제에는 필요 없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일단, 규칙에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계약 집행에 대한 신뢰도 필요합니다. 합의가 어그러질 때 최종 책임을 중국이 진다는 약속도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국 내부를 외부에 개방해야 합니다. 자신의 법과 제도를 외부에서 평가하고 채택하고 의존하게 해야 질서를 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마지막 조건을 10년 넘게 충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2년 시진핑이 집권하고 ‘신형 대국 관계’를 주장하며 G2를 자처했지만, 중국이 주도하는 질서가 대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현재로서는, 상대국과 마찰이 생기면 쥐고 있는 물질을 무기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국은 강력 반발하며 다른 수입처 또는 대체재를 물색합니다.
반면, 미국은 전 세계에 반세기 넘게 무료 체험판 OS를 제공해 왔습니다. 트럼프는 이 질서가 이제까지 ‘공짜’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구독료를 요구합니다. 플랫폼이 무료 사용자를 충분히 확보한 뒤, 요금제를 도입하는 방식과 닮았습니다. 너무 익숙해져서, 웬만해서는 플랫폼을 옮길 수 없습니다. 결국 구독료를 조금이라도 깎아 보려고 협상 테이블에 앉습니다.
무료 체험판이 끝나가는 한국
트럼프가 론칭한 미국 구독 서비스는 한국 사용자에게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한국은 뭐든 해외에서 들여와 부가 가치를 더해 수출해서 먹고사는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 미국 주도의 질서 의존도가 매우 높은 나라입니다. 안보, 금융, 기술, 통상 규범 대부분이 미국이 설계한 시스템 위에서 작동합니다.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는 산업 전략의 문제이지만, 미국의 질서 상품화는 국가 운영 방식의 문제입니다. 외교적 결정이 관세율로 환산되고, 안보 발언이 금융 비용으로 돌아오는 세계에서 전략적 모호성 같은 것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유럽 8개국이지만, 곧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이 날아올 겁니다.
무료 체험판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