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가자 지구 평화위원회’ 설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는 모두가 중동 분쟁 해결을 위한 임시 중재 기구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헌장
초안을 보면, 이 기구는 가자 지구의 전쟁을 끝내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유엔을 끝내기 위한 시도에 가깝습니다.
‘가자’ 없는 가자 평화위원회
헌장에는 ‘가자 지구’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자리는 ‘지속 가능한 평화’, ‘실용적인 판단력’, ‘상식적인 해결책’ 같은 포괄적이고 모호한 개념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즉, 가자 지구는 목적이 아니라 명분에 불과합니다. 트럼프는 가자라는 시급한 현안을 지렛대 삼아, 전 지구적 분쟁에 즉각 개입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초법적 국제기구를 설계한 겁니다.
헌장은 이 기구를 “지속적인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제기구”라고 소개하지만, 구조와 작동 방식은 기업의 이사회나 사모펀드와 비슷합니다.
총회와 안보리로 분화된 유엔식 민주주의는 폐기되고, 의장이 의제 설정부터 기구 해산까지 독점하는 수직적 지배 구조를 가집니다. 다수결은 존재하지만, 의장의 승인 없이는 효력을 갖지 못합니다. 의장은 트럼프가 맡습니다. 종신직입니다.
이 기구에 가입하려면 먼저 초대장을 받아야 합니다. 초대는 의장이 합니다. 회원 자격은 3년마다 갱신해야 하는데, 10억 달러를 내면 사실상 영구 회원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외교의 문법을 가치와 규범에서, 자본과 지분으로 바꿨습니다. 고급 사교 클럽이나 투자 컨소시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패키지 딜
한국을 포함해 독일, 프랑스, 호주, 캐나다, 이집트, 튀르키예, 이스라엘, 러시아 등 60여 개국이 초청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참여 거부 의사를 밝히자, 트럼프는 프랑스산 와인과 샴페인에 200퍼센트 관세를 물릴 수 있다고 응수했습니다.
이 장면은 평화위원회의 작동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과거 외교는 안보는 나토나 한미 동맹에서, 경제는 WTO나 FTA라는 독립된 칸막이 안에서 각각의 법규에 따라 작동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평화위원회는 모든 칸막이를 허뭅니다. 경제, 안보, 정치가 하나의 패키지 딜로 묶여 단일한 협상 테이블에 올라갑니다.
이제 안보 문제는 안보 논리로만 풀리지 않습니다. 중동 재건 비용 분담에 소극적이면 자동차 관세가 붙을 수 있고, 에너지 협력에 미온적이면 무역 제재가 거론될 수 있습니다. 한 영역의 약점을 다른 영역에서 지렛대로 사용하는 교차 압박 전략이 외교의 기본 문법이 됩니다.
유엔 우회로
트럼프의 구상이 유엔을 대체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옵니다. 실제로 트럼프는 오래전부터 유엔을 말만 많고 실행은 느린 조직으로 평가해 왔습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목표는 유엔을 없애거나 대체하는 게 아닙니다. 국제적 합의가 필요할 때 유엔을 더 이상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아니게 만드는 겁니다.
만약 트럼프의 모델이 단 한 번이라도 작동해, 신속한 종전 합의나 대규모 재건 프로젝트 같은 가시적 성과를 낸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효율을 경험한 국가들은 느리고 복잡한 기존 절차로 돌아가려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트럼프가 퇴임하더라도 이 급행 외교의 기억은 남습니다.
그 순간부터 국제 외교는 두 개의 층위로 나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규범과 명분을 관리하는 공식 무대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 결정을 내리는 비공식 테이블입니다. 유엔은 전자에 남고, 평화위원회 같은 기구가 후자를 차지합니다. 문제는 갈수록 중요한 결정이 비공식 테이블에서 먼저 내려질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이 변화는 미국만의 현상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트럼프 이후의 지도자들, 그리고 트럼프를 싫어하는 국가들조차 이 방식을 참고하게 됩니다. 공식 절차를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필요하면 우회하는 외교가 표준이 될 수 있습니다. 국제 정치가 점점 공개된 규칙보다, 비공개된 거래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는 겁니다.
한국의 과제
한국도 트럼프의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외교부는 “검토 중”이라고 밝혔지만, 참여 여부를 고민하는 단계는 이미 지났습니다. 중요한 건 참여할지 말지가 아니라, 어떤 조건으로 참여하느냐입니다.
앞으로의 외교 환경에서 중견국에 허용된 선택지는 많지 않습니다. 규범의 영역에만 머무르면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에 테이블 밖에 있게 됩니다. 그렇다고 거래의 영역에 너무 깊이 들어가면, 당장의 실익은 얻을 수 있어도 국제적 신뢰를 잃게 됩니다.
한국이 선택할 길은 중간이 아니라 이중 전략입니다. 유엔과 다자 채널에서는 규범과 원칙을 분명히 강조하면서, 트럼프식 거래의 테이블에서는 수동적 참여자가 아니라 조건을 제시하는 협상자로 앉아야 합니다. 참여를 전제로 요구 사항을 분명히 하고, 그 대가로 관세, 공급망, 에너지, 안보 협력 같은 구체적 이익을 확보해야 합니다.
중견국에 가장 위험한 태도는 모호함입니다. 초대에 응하면서도 아무 조건을 걸지 않는 것은 순응입니다. 한국 외교에 필요한 것은 “검토 중”이라는 완곡한 표현이 아니라,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을지 먼저 제시할 수 있는 협상 언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