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세의 성공한 사업가
제프 베이조스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아마존의 창업자로 남았지만, 그의 영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마존이 베이조스의 뜻을 거스를 리는 없습니다. AI 시대의 수혜를 톡톡히 입고 있는 세계 최대의 클라우드 컴퓨팅 기업, 아마존 웹서비스(AWS)도 마찬가지죠.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워싱턴포스트》와 블루오리진은 이 세계의 미래를 만드는 기업입니다.
무적으로 보이는 베이조스에게도 악연이 있습니다. 트럼프입니다. 2019년 10월, 아마존은 당시 미국 국방부를 고소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워싱턴포스트》와 그 소유주인 베이조스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100억 달러 규모의 클라우드 컴퓨팅
계약건 수주를 방해했다는 이유였습니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포스트가 달갑지 않았을 겁니다. 트럼프 집권 1기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를 먹여 살린 건 트럼프에 대한
비판 기사였으니까요. 다만, 그 악감정 때문에 세계 1위의 클라우드 컴퓨팅 회사와 국방부의 계약을 망가뜨렸다면, 트럼프도 상식적인 인물은 아니죠. 베이조스는 트럼프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일갈했습니다.
단, 베이조스는 사업가입니다. 물론, 실리콘밸리의 다른 리더들이 그렇듯, ‘사업가 같은 사업가’는 아니죠. 그러니 정부와 기꺼이 대립각을 세우고, 언젠가 권력의 중심으로 복귀할 수도 있는 인물과 대담하게 척질 수도 있었겠고요. 하지만 베이조스도 변했습니다. 뭐든 일단 해보고, A/B 테스트를 통해 실패를 기회로 만들던 스타트업의 리더가 아닙니다. 61세의 이 성공한 기업가는 근육을 키웠고 새로운 배우자를 맞았으며, 책이 아닌 영향력과 우주 산업을 팝니다. 베이조스는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뭘 하든, 성공 비결이 됩니다. 농담삼아 말씀드리자면, 베이조스가 매일 얼음 목욕을 한다는 보도가 나오면 다들 얼음 목욕이 실리콘밸리의 성공 비결이라고 떠들 겁니다.
베이조스는 원하는 것을 위해 뭐든 해도 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체면 차릴 것 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베이조스는 블루오리진의 성공을 간절히 바랍니다. 크게 내색은 하지 않지만, 머스크와의 경쟁에 밀리고 있다는 사실이 편치는 않을 겁니다. 그 자신이 혁신가로서 지구 바깥에서 미래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고요. 단, 우주 산업은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이조스는 돌아섰습니다. 트럼프에게로 말이죠.
새로운 협상의 기술
다른 빅테크의 수장들은 트럼프의 당선 소식이 들리자마자 마라라고로 달려갔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시대에 순응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죠. 수표책을 꺼내 서명하고, 취임식에 섰습니다. 기업의 미래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를 굳이 백악관에 마련해 트럼프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베이조스는 한 끗 달랐습니다.
멜라니아 트럼프는 모델 출신입니다. 당연히 전속 에이전트가 있죠. 멜라니아가 영부인으로 복귀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는 이미 제작이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첫 기획이 언제였는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트럼프의 당선 직후부터 멜라니아의 에이전트는 이 영화를 배급할 배급사를
찾고 있었죠. 애플과 넷플릭스는 입찰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업계의 전통 강자 파라마운트는 400만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그 정도의 가치로 본 것이겠죠. 그런데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디즈니와 아마존이었습니다. 디즈니가 먼저 통 큰 제안을 합니다. 1400만 달러를 불렀습니다.
업계 기준으로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깨어 있음(woke)’을 강조하는 콘텐츠를 연이어 내놓으며 트럼프와 MAGA 진영에 미운털이 박혔다는 약점을 만회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투자 대비 수익을 올릴 방안도 궁리했겠고요. 하지만 베이조스는 앞뒤 재지 않았습니다. 배급권은 아마존이 가져갑니다. 4000만 달러였습니다. 관계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이 중 영부인의 몫이 70퍼센트 이상입니다.
트럼프는 정치인입니다. ‘정치인 같은 정치인’은 아니죠. 다만, 정치인으로서의 본능은 확실합니다. 영토를 확장하든,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든 그걸 ‘미국을 위한 일’로 포장하기를 즐깁니다. ‘세계 평화의 수호자’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도 강하고요. 트럼프에게 돈은 본능, 명예는 욕망입니다. 영부인을 일종의 브랜드로 프레이밍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과 배급은 트럼프의 구미에 아주 잘 맞는 프로젝트입니다. 미국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일이며, 트럼프 가문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기도 하죠. 돈이 되는 사업인 동시에, 미국의 영화 산업에 기여하는 일입니다. 4000만 달러는 뇌물이 아닙니다. ‘협상의 기술’을 정의한 인물이 보기에 미국과 트럼프, 아마존에 모두 ‘윈-윈’인 사업입니다.
MAGA의 오해
우리는 한동안 실리콘밸리를 오해해 왔습니다. 특히 정치적 성향에 관해서 말이죠. 이들이 진보적이며 민주당의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기술의 가능성을 믿고, 혁신과 성공을 같은 선상에 놓는 이들 대부분은 진보주의자라기 보다는 이상주의자입니다. 그 이상에 가까운 진영이 어디인지를 놓고 저울질할 뿐이죠. 정치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두는 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미래는 정치가 아니라 기술이 만들 테니까요.
바이든 정부하에서 민주당이 실리콘밸리의 기술이 만들 디스토피아에 관한 우려를 강조하면서 규제책을 내놓는 동안, 빅테크의 리더들은 다시 생각했을 겁니다. 과연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이상에 가까운 정당은 어디에 있는지 말입니다. 불행히도 현실 세계에 그 정답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사업에 해가 되지 않는 선택을 하는 쪽으로 기우는 것이 합리적이겠죠. 빅테크의 전향은 사상적 변화라기 보다는 이성적인 의사 결정입니다.
이들을 가장 오해했던 것은 민주당이 아니라 MAGA 세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년 전만 해도 MAGA 진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플루언서로 꼽히는 스티브 배넌은 과거 빅테크 기업들이 트럼프의 발목을 잡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이 트럼프에게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트럼프가 언제든 빅테크를 해체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죠. 빅테크가 일자리를 빼앗고 폭리를 취하며 가짜 뉴스를 퍼트린다고 보는 MAGA 진영은 기대에 찼고요.
하지만 1년이 지나고 보니 승리자는 빅테크 쪽입니다. 실리콘밸리가 원하는 것은 뭐든 이루어졌습니다. 구글을 비롯한 빅테크 해체 움직임은 잠잠해졌습니다. 고숙련 외국인 테크 노동자를 위한 H1-B 비자 프로그램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 ‘안전’에 방점을 찍었던 AI 행정명령은 ‘안보’를 중심으로 다시 작성되었습니다. 백악관 내부에는 MAGA 세력도, 빅테크 쪽이 밀고 있는 인물도 자리를 맡아 권력 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MAGA 진영은 당연히 트럼프가 자신의 진영을 선택하리라 믿었습니다.
트럼프는 MAGA 세력도, 빅테크도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에 이득이 된다면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력 다툼을 조장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스타일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정치인 같지 않은 정치인이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사업처럼 하는 겁니다. 빅테크는 원하는 바가 확실하고 투자를 할 줄 압니다. 어쨌든 이 사람들은 영리하니까요. 트럼프 입장에서는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죠. 실리콘밸리는 새로운 시대에 완전히 적응했습니다.
한때 《러시아워》를 감독했고, 미투 운동 당시 논란의 당사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었던 브렛 레트너 감독의 〈멜라니아〉가 1월 30일 개봉합니다. 전 세계 개봉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