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은 결정적 순간이 될 뻔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195개국이 한자리에 모여 기후 변화의 속도를 늦추겠다고, 그 목표를 위해 행동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2015년은 2026년과는 기후 감수성이 많이 달랐던 때입니다. 지구 온난화로 이렇게 산불이 많이 날지, 이렇게까지 혹독한 눈보라와 홍수, 가뭄이 도래할지 몰랐습니다. 누군가는 경고했겠지만, 목소리는 지금보다 작았습니다. 그럼에도 세계는 어느 쪽이 맞는 방향인지 합의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합의란 것은 당장에는 힘을 가져도 곧 나약해집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속성입니다. 국가의 지도자를 정기적으로 선출하는 이상, 어제의 약속이 오늘도 유효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동안 국가 간의 협정은 ‘체면’이라는 명분 때문에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죠. 나라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에는 무게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체면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이 나타나면, 이마저도 툭 끊어집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정부는 지난 2026년 1월 27일부로 파리협정을 탈퇴했습니다. 처음도 아닙니다. 두 번째입니다. 1기 집권 당시 탈퇴했다가 바이든 전 대통령 당선 이후 복귀했습니다. 이번 탈퇴는 첫 번째와는 함의가 좀 다릅니다. 세계의 역학 관계가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더 더워졌다.
저는 파리협정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당연한 실패라고도 생각합니다. 정치가 권력의 임기보다 먼 미래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구 평균 기온 상승 폭을 산업 혁명 이전 대비 1.5°C 아래로 유지하자는 약속은 참 지키기 어려운 목표였던 것 같습니다. 돈을 벌던 사람이 욕심을 내려놓고, 편하게 살던 사람들이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2015년의 이례적인 합의는 유산을 남겼습니다. 협정 당시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연간 2퍼센트씩 증가했습니다. 협정 이후 증가율은 0.3퍼센트로 둔화했습니다. 석탄이나 석유와 같은 화석 연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부족합니다. 기온은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더욱 시기였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바닷길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북극 항로입니다.
북극은 바다입니다. 얼어 있는 바다 말입니다. 하지만 여름에는 제한적으로 배가 다닐 수 있습니다. 사람과 화물을 실은 배 앞에서 얼음을 깨며 길을 열어주는 쇄빙선의 도움이 필요하긴 합니다. 그런데 이 항로가 열리는 기간이 점점 길어집니다. 북극의 얼음이 얇아지고, 녹아 없어지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파나마 운하, 수에즈 운하에 의존해 온 세계 무역에 획기적인 운송길이 추가로 열리는 겁니다. 더 빠르게 질러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린란드는 이 바닷길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북극 항로뿐만이 아닙니다. 그린란드에 묻혀 있는 각종 자원과 희토류도 지구가
더워지면서 개발이 더 쉬워집니다. 알래스카도 마찬가지죠. 트럼프의 그린란드를 향한 욕심, 한국과 일본에 알래스카 자원 개발을 종용하는 억지는 참으로 시의적절합니다. 어쩌면 트럼프 입장에서는 지구가 좀 더 더워져도 상관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서반구를 위대하게 하겠다는 그의 야망에는 오히려 도움이 될 테니까요. 트럼프에게 지구 온난화는 세계와 협력해 막아 내야 할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투자와 확장의
기회입니다. 설마 싶겠지만, 정말 그렇습니다. 트럼프는 기후 변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 바닷가 부동산이 더 생긴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유럽이 쇠약해졌다.
그린란드를 향한 트럼프의 집착은 세계가 겪고 있는 또 다른 변화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유럽 대륙의 쇠락입니다. 트럼프가 공공연하게 그린란드를 합병하겠다고 이야기하는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인 유럽 국가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몇몇 국가가 그린란드로 군 병력을 소수 보냈다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협박’을 받았을 뿐입니다.
시장이 흔들리자,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카드를 도로 집어넣었지만, 이걸 그냥 TACO(Trump Always Chickens Out)로 볼 일은 아닙니다. 트럼프가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물러났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토 사무총장과 그린란드 및 북극 지역 전체에 대한
미래 협상의 틀을 마련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광물 채굴권이 포함되어 있다는 언급이 나온 정도입니다.
하지만 북극은 미국과 유럽의 점령지가 아닙니다. 그린란드도 덴마크의 ‘자치령’입니다. 지역의 선주민들이 행정을 덴마크 정부에 외주 주는 형식일 뿐, 주민 투표를 통해 언제든 독립할 수 있습니다. 북극의 이권을 트럼프와 나토 사무총장의 회의로 결정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습니다. 유럽은 트럼프를 달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럽이 상식을 벗어난 미국의 도발에 절절매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럽엔 미국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유럽은 안보를 미국에 의지해 왔습니다. 러시아로부터 이어진 파이프로 천연가스를 공급받았고, 중국은 훌륭한 수출 시장이 되어 주었죠. 하지만 세계화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럽은 이 모두를
미국에 의존합니다.
유럽 수출 20퍼센트는 미국 시장으로 향합니다. 천연가스 공급량의 25퍼센트가 미국에서 옵니다. 안보는 말할 것도 없죠. 뿐만 아닙니다. 금융도, 기술도 미국 기업에 의존합니다. 한때 미국은 유럽을 가장 중요한 동맹으로 인식했습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국가 안보 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NSS) 보고서에서 미국은 “일부 유럽 국가가 신뢰할 수 있는 동맹으로 남을 만큼 강한 경제와 군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명확하지 않다”라고 명시했습니다.
또, 유럽 연합의 세계 GDP 비중이 1990년 25퍼센트에서 현재 14퍼센트까지 감소했다고 지적하면서 그 배경으로 규제를 꼽았습니다. 유럽의 규제 정책이 창의와 근면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겁니다. 심지어 이런 규제와 함께 이민 정책을 펼치면서 최근 20년간 유럽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전시 상황이다.
다시 2015년의 파리협정으로 돌아가 보죠. 당시 회의(COP21)의 의장국은 프랑스였습니다. 엄청난
외교력을 발휘해 최종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죠. 1.5°C라는 구체적인 목표치 설정이나 주기적인 실행 계획 수립 등은 주로 태평양 도서국과 기후 취약국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들과 미국, 중국 등 강대국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 것은 EU였습니다. 국제법상의 구속력을 확보하는 등의 절차적인 부분도 당시 EU의 역할이 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얘깁니다. EU가 그동안 얼마나 무력해졌는지 확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국은 아니지만, 분명 우방국입니다. 지리적으로도 바로 옆이고요. EU는 전쟁을 끝낼 힘이 없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고요. 국방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교력도 포함한 이야기입니다. 전 세계가 EU를 중심으로 뭉쳐 러시아를 압박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겁니다. 하지만 중국도, 인도도 각자의 셈법대로 움직였습니다.
NSS가 열거한 대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각종 규제와 이민 정책 때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유럽의 영향력이 2015년 같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러시아로부터 공급받던 값싼 에너지와 미국으로부터 보장받던 국가 안보의 가격은 올라가는데, 산업 분야에서는 점점 중국에 밀리고 미래 산업으로 꼽히는 AI 등의 기술 분야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습니다. 기후협약의 중심에 섰던 유럽은 이제 힘을 잃었습니다.
오히려 미국의 압박에 유럽 내 정책이 후퇴하는 모습입니다. 실제로 2025년 10월 미국과 카타르가 EU 지도부에 공식 서한을 보낸 사실이
보도되었습니다. 공급망의 윤리성, 환경에의 영향 등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평가하는 EU의 규제가 LNG 거래에 걸림돌이 되니 완화하라는 압박입니다. 당시 EU는 이를 원칙적으로 거부한다고 밝혔지만, 이후 실질적으로 해당 규제를
완화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파리협정은 트럼프 입장에서 비합리적인 족쇄일 뿐입니다. 투자와 국익의 측면에서도, 국제 관계의 측면에서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에 매년 꼬박꼬박 내는 분담금만 아까울 따름이죠. 탈퇴는 당연한 수순입니다. 게다가 미국도 전쟁을 벌이는 중입니다. 중국을 상대로,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서반구의 반동 세력을 상대로, 캐나다를 상대로 말이죠. 다른 의미로도 지금은 전시 상황입니다.
트럼프의 탈퇴에도 파리협약은 건재할 것이라는 논조의 보도가 적지 않습니다. 미국을 따라 탈퇴하겠다는 국가도 없고요. 하지만 이미 세계는 알고 있습니다. 초국가적인 기후협약은, 그것도 10년 전에 만들어진 협약은 그 구속력을 점차 잃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2015년의 글로벌 협상 테이블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세계가 변화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