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시간입니다. 가족과 만날 계획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늘 가족과 함께인 사람들에게도 가족의 시간입니다. 명절은 참 얄궂습니다. 평소라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을 새삼 의심하게 만드는 시간입니다. 숨겨져 있던 불화는 도드라지고, 익숙한 줄 알았던 외로움이 불쑥 낯설어집니다. 내가 나인 줄 알았는데, 나도 결국 가족이었다는 사실을 원치 않아도 깨닫게 됩니다. 불편한 상황과 질문들이 문득 일깨우는 겁니다.
행복은 곱씹고 뜯어보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불편함과 부당함은 곱씹어 분석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양할수록 좋습니다. 예를 들면, 명절에 뵙게 된 당숙 어른의 ‘불편한 질문’에 ‘당숙이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무엇인가’라고 받아쳐 보자는 한 철학자의 제안 같은 것도 함께 생각해 볼 법한 이야기입니다. 몇 년 전 크게 화제가 되었던 칼럼의 내용이지요. 물론, 제게는 좋은 대안이 되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사유로의 초대에 흔쾌히 응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대신, 어째서 우리가 명절과 같은 가족의 순간에 당황스러운 충돌을 경험하게 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최근 찾아냈습니다. 100명의 1인 가구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
필연적 혼자의 시대》에서 당숙 어른과 나의 세상이 어떻게 달라진 것인지에 관한 힌트를 발견한 겁니다.
합리적인 불편부당
20세기까지 유효했던 모범적인 가족의 형태가 있습니다. 혼인한 부부와 미혼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입니다. 자녀의 숫자는 두 명이 적당합니다. 4인 가족이죠. 그리고 보통 이러한 모범 가족의 형태에서 벗어난 삶을 일구는 사람들이 명절에 질문을 받게 됩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인지에 관한 질문도 있고, 모범 가족의 경계 안으로 서둘러 들어가야 한다는 조언도 있습니다. 가족의 시간에는 가족이 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오가기 마련입니다.
결혼과 출산, 육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명절에 오가는 수많은 불편한 이야기의 종국에는 어떻게 모범 가족을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한 불안이 깔려 있습니다. 취업, 내 집 마련과 같이 성취에 관한 이야기도 실은 성공적인 4인 가족으로 가기 위한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혹은 ‘효도’나 ‘도리’와 같은 가족 구성원의 책임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요.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시대적 흐름으로 보자면, 그런 감정은 충분히 합리적입니다.
4인 가족을 중심에 둔 행복의 정의는 끝난 지 오래입니다. 한때 인생의 모범 답안으로 제시될 만한 것이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일종의 판타지가 되었습니다. 1인 가구가 가장 보편적인 가구의 형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025년 정부 집계 기준으로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의 비율은 42퍼센트에 달합니다. 우리나라만 특이한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경향이 관찰됩니다. 이 현상이 오롯이 개인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졌을 리가 없다는 얘깁니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의 저자인 김수영 교수는 대체 어떠한 구조적 변화가 1인 가구의 급증을 불러왔는지 추적합니다. 데이터를 분석하기보다는 직접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말입니다.
“직장에서 집이 차로 15분 거리에요. 직장이 바뀔 때마다 그 근처로 웬만하면 다 이사를 했었던 경우라서, 혼자이기 때문에. 결혼 전에 제가 자유로운 상황일 때는 직장 근처로 잡는 것이 최고인 것 같아요.”
패밀리맨
원래 직장은 바뀔 일이 잘 없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농경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습니다. 산업 사회에서도 오랜 기간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는 찬양받았습니다. 안정적인 노동력의 공급이 이윤 창출에 결정적이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평생직장과 정년퇴직의 신화는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는 우화였습니다. 세계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직장으로 출근하는 아버지상을 적극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산업화 시대의 영광을 상징하는 미국 포드사의 컨베이어벨트 생산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포드사는 움직이는 컨베이어벨트 앞에 작업자들이 서서 분업을 통해 각 부품을 조립하는 방식으로 생산성의 폭발을 이뤘습니다. 1908년의 일입니다. 이를 통해 ‘모델 T’를 대량 생산해 냈죠. 하지만 자연의 흐름과 내 몸의 상태에 맞춰 농사일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산업 노동자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컨베이어벨트에 익숙지 않았던 노동자들이 자꾸만 이탈했고, 사고도 잦았습니다. 포드사는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일당을 2배로 올립니다.
하지만, 성실히 일하라고 임금을 올렸더니 노동자들이 도박이나 술, 성매매 등에 빠진다면 전부 허사가 됩니다. 그래서 포드사는 노동자의 가정생활을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합법적으로 결혼한 사람, 배우자와 자녀를 제대로 부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해고하는 식입니다. 가정에 충실한 가장이 직장에서도 충실한 노동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가족 임금’의 탄생입니다. 가족을 책임질 (남성) 가장이 직장에서도 책임을 다하면, 부양가족을 먹여 살릴 정도의 임금을 지급하는 모델입니다. 그리고 이 모델의 수명은 100년도 넘게 이어집니다. 저자는 〈아빠, 힘내세요〉라는 동요를 언급하는데, 이 동요는 2005년 BC카드 광고에도 쓰인 적이 있죠.
유연한 노동자
여기까지가 명절에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당숙 어른’이 알던 세상입니다. 한국은 조금 늦게 합류했지만, 이 시스템을 세계 그 어느 곳보다도 빠르게 받아들여 내재화했습니다. 흔히 ‘표준’이나 ‘모범’이 되는 삶의 형태도 이에 맞춰 진화했습니다. 가족과 직장이 노동자의 책임감을 매개로 서로 얽혀 있는 형태입니다. 사회적 인정과 가족에 대한 책임의 경계가 흐릿합니다. 따라서 인생의 성취는 행복한 가족의 형성과 유지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가족의 행복은 성실한 사회생활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저자는 산업 사회의 ‘가족 중심 생산-재생산 메커니즘’이라고 봤습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이 시스템이 잘 작동했습니다. 노동시장은 거의 완전고용에 가까웠고, 대다수의 사람이 20대 초 취업, 20대 중반 결혼이라는 트랙에 올라탔습니다. 하지만 경제 구조가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는 IMF 외환 위기가 시그널이 되었죠. 후기 산업 사회로 접어들면서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이 증가합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낡은 것이 되었습니다. 여기부터는 내가 아는 세상입니다.
과거 산업 사회에서는 이직은 가족의 생계를 건 도박이었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가족이 빈곤으로 빠져듭니다. 하지만 현재의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 체제, 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한 후기 산업 사회에서는 이직을 ‘고용의 유연성’이라고 정의합니다.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커리어 성장의 기회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이런 환경에서는 ‘불안정하고 유연한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1인 가구의 노동력이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앞서 ‘직장이 바뀔 때마다 그 근처로 웬만하면 다 이사를 했었던’ 사례처럼 말이지요. 자녀의 학군이나 배우자의 생활 등을 고려해야 하는 다인 가구와는 달리, 1인 가구는 직장에 맞춰 삶을 빠르게 리모델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