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정경
1화

프롤로그; 연애 정경

‘그런 것’을 연구한다. 연애에 대한 연구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런 걸 연구해서 뭐해요?”라고 묻는다. 많은 사람에게 연애는 젊은 남녀가 사소한 일로 울고 웃으며 청춘을 소모하는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는 연애 같은 얄팍한 문제 말고 먹고사는 일과 밀접한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주제를 다루는 편이 좋지 않겠냐고 조언한다. 그럴 때마다 반문한다. “연애가 왜 중요하지 않은가요?”

우리는 살면서 무수한 연애담을 접한다. 피상적이고 도구적이며 때로는 감정에 매여 휘청이는 우리들의 연애를 보고 듣노라면 연애야말로 20~30대의 가장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다. 젊은 세대의 물적 조건과 가장 민감하게 묶여 있는 영역, 섬세한 정치가 작동하는 관계. 그것이 연애가 아니고 무엇일까. 연애가 중요하지 않다면 술과 담배의 판매량은 줄어들고 사랑 노래는 의미를 잃을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있다. 또 어떤 이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이기도 하다. 연애는 현실과 밀착한 실용적인 문제이자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세대론, 이데올로기, 페미니즘, 근대성과 탈근대성 같은 묵직한 개념과 이론으로도 접근 가능한 주제다.

그러니 어찌 질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연애란 어떤 의미인가? 왜 연애하지 못해 안달인가? 혹은 왜 안 하려고 애쓰는가? 답을 찾기 위해 과거와 오늘의 연애 정경(情景)을 관찰하고, 그 안의 정경(政經)을 읽어 내고자 한다.

관찰의 시작점에서 우리는 매우 이상한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온통 연애거나 연애가 없다. TV 드라마는 언제나 연애를 최우선 소재로 삼는다. 연애 코칭 예능 프로그램이 성행하고, 버스와 지하철 출입문 위에는 결혼 정보 업체나 소개팅 어플 광고가 난무한다. 심지어 지방 자치 단체까지 나서 미혼 남녀의 만남을 주선한다. 바야흐로 연애 시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연애 안 하는 세대 혹은 연애 못하는 세대로 칭한다. 연애는 어디에나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 모순된 풍경의 배경에 신자유주의가 있다. 신자유주의의 고도화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는 모순을 가시화해 우리 삶의 조건과 삶을 대하는 자세마저 바꾸었다. 그러면서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를 로맨스 위에 얹어 놓았다.

연애 정경을 읽어 내기 위해 로맨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신자유주의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와 함께 서구에서 들여온 개념인 근대의 사랑과 연애를 살펴볼 예정이다. 연애의 뿌리를 알아야 현대의 연애를 관찰할 수 있다. 연애는 시대적 배경과 유기적으로 얽혀 나름의 계통과 계보를 지닌다. 한국의 연애도 근대적 경험을 바탕으로 등장한 새로운 관계 경험에서 시작해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해 왔다. 역사를 톺아볼 좋은 사료로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택했다. 195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제작된 영화를 통해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 제도적 조건, 사회 속 청년의 위치 등 맥락에 따라 달라진 연애 양식과 감성을 알아본다. 연애 주체의 관계 맺기 방식을 들여다보는 일은 동시대의 특수성을 읽는 좋은 방법이 된다. 서구 사회와 우리의 과거를 경유해 마침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연애 정경에 도달한다. 2008년 이후 한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 콘텐츠와 청년들의 실제 목소리를 통해 현시대 연애의 특수성을 발견한다.

본격적으로 연애를 논하기에 앞서 독자에게 미리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우선 이 책은 연애 비법서나 자기 계발서가 아니다. 어떻게 이성을 유혹하고 대처하라는 귓속말 코칭을 해주지 않는다. ‘내 연애는 왜 늘 망할까’, ‘왜 나 빼고 다 연애를 할까’, ‘우리 관계가 이래도 괜찮을까’, ‘결혼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수많은 로맨스 주체 중 하나일 당신에게 지리멸렬한 현실을 새롭게 조망하고 스스로의 연애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고 싶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신자유주의라는 거시적인 프레임과 감정이라는 미시적인 프레임을 통해서 나의 연애를 옥죄는 사회적 조건과 이데올로기를 발견하고 나만의 고유한 로맨스를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기서 다루는 연애는 청년 세대의 이성 간 연애에 국한한다. 신자유주의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연애하는 청년 세대 문제를 다루고자 20~30대의 연애에 집중했다. 또한 LGBT의 연애, 다자 연애 등 새롭게 가시화되는 연애의 유형들이 있지만 다루지 못했다. 해당 영역에 대한 필자의 식견이 부족할뿐더러, 대중문화 콘텐츠의 노출 정도가 이성 간 연애에 비해 현저히 낮아 자연스레 논의에서 빠지게 되었다. 연애가 점차 보여 주는 데 익숙하고 자랑거리가 되어 가고 있는데,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소수자의 연애는 여전히 잘 다뤄지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특정한 주체의 로맨스만 긍정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비록 이 책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연애하고 있을 수많은 연애 주체들을 응원한다.

책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들은 독자의 고유 경험과 생각으로 채워 주기를 소망한다. 먹고살기만 해도 힘든 오늘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랑하고 연애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작은 공감과 위로가 되는 글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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