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수출

bkjn review

관광 산업이 한국의 다음 반도체입니다.

보이지 않는 수출

2026년 2월 26일

이재명 대통령이 관광 산업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2월 25일 확대 국가 관광 전략 회의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광 산업은 대한민국의 핵심 국가 전략 산업이다. K컬처 열기가 모니터 속 환호에만 머무르지 않게 하려면 세계인이 한국 땅을 밟고 체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면서 현재 1900만 명 수준인 연간 외국인 관광객을 2030년까지 3000만 명이 되게 하려면, 질적인 성장으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정부는 서울 중심의 관광을 지역 중심으로 재편하고, 비자·출입국 제도, 숙박 규제, 지방 공항 노선, 문화 콘텐츠 연계를 전면적으로 손보겠다는 구상입니다.

말로만 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단 대통령이 이 회의에 참석한 것 자체가 2019년 이후 7년 만입니다. 정부가 이 분야를 단순한 서비스업이 아니라 산업 정책의 핵심 축으로 재배치하려 한다는 신호입니다.

한국 경제 성장사는 실리콘과 철강으로 쓰였습니다. 우리는 반도체와 전자 기기, 자동차, 선박 수출을 국가적 자부심으로 여겨 왔습니다. 무역 수지는 국력의 성적표였습니다. 그러나 관광은 통계의 구석에 놓여 있었습니다. 한국관광공사가 하는 일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실상은 다릅니다. 일본과 프랑스, 스페인 같은 나라에서 관광은 제조업과 맞먹는 핵심 수출 산업입니다. 관광객이 쓰고 간 돈은 상품 수출과 동일한 외화 유입입니다. ‘보이지 않는 수출’입니다.

일본의 교훈

한국이 관광 전략을 국가 어젠다로 끌어올린 이유를 이해하려면 일본을 보면 됩니다. 2014년만 해도 외국인 관광객 수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섰습니다. 한국 1420만 명, 일본 1342만 명이었습니다. 일본은 그 무렵을 전후해 총리가 직접 관광 전략을 챙겼습니다. 미래 먹거리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국가를 재도약시킬 성장 전략이자, 지방 소멸을 막을 대책으로 관광업을 선택한 겁니다. 이때 우리는 관광이라고 하면 외국인이 ‘알아서’ 찾아오는 것쯤으로 여기고 있었죠.

일본은 관광을 자동차 산업처럼 다뤘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적극 지원한 겁니다. 일본 정부는 비자 요건을 완화하고, 입국 절차를 간소화했습니다. 지역 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지방의 명소를 조성하는 사업을 벌였습니다. 지역 공항 노선을 확대하고 하이엔드 리조트를 유치하는 등 인프라도 정비했습니다. 이런 작업을 지자체에서 조금씩 조금씩 한 게 아니라, 총리가 앞장서서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었습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났습니다. 2025년 일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4300만 명이었습니다. 우리가 500만 명 늘어난 사이에, 3000만 명이 늘어난 겁니다. 외국인 관광객이 하도 많이 와서 일본인이 먹을 쌀이 부족하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이 사람들이 한국 돈으로 90조 원을 쓰고 갔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이 지방 상권과 숙박업, 교통망을 동시에 살렸습니다. 관광이 지방 소멸 대응 정책이 된 겁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관광업이 수출 산업 규모 2위입니다. 자동차 다음입니다. 전자 부품, 철강보다 외화를 더 많이 버는 산업이 되었습니다.

한국도 조건은 나쁘지 않습니다. K팝, 드라마, 음식, 뷰티, 게임, 웹툰이 이미 세계인의 머릿속에 한국을 심어 놓았습니다. BTS가 부른 노래, 넷플릭스에 올라온 한국 드라마, 유튜브에서 본 길거리 음식 영상은 모두 잠재적 한국 관광 광고입니다. 자꾸 보다 보면 한국에 오고 싶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관광은 ‘서울’이라는 병목에 갇혀 있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의 80퍼센트가 서울에 머물다 갑니다. 일본만 하더라도 도쿄뿐만 아니라, 오사카, 홋카이도, 오키나와 등 여러 지역에 관광객이 분산되는데, 한국은 유독 서울 집중이 심합니다. 지방의 풍경과 이야기, 음식과 문화유산은 세계 시장에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습니다. 전국 각지의 명소가 더 알려지고 접근성이 좋아져야, 한 번 오고 마는 관광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오는 관광이 될 수 있습니다.

서울 독점의 해체

홍대와 강남, 경복궁만으로는 관광객 3000만 시대를 열 수 없습니다. 정부 전략의 핵심은 지역 분산입니다. 지방 공항 국제선 직항을 확대하고, 관광 특화 비자를 도입하고, 지역별 체류형 콘텐츠를 개발하는 계획이 추진됩니다. 청주, 김해, 양양 같은 공항을 새로운 관문으로 만들고, 지방 도시를 단순한 당일치기 코스가 아니라 체류형 도시로 바꾸려 합니다.

‘황리단길 30개 만들기’ 같은 프로젝트도 같은 맥락입니다. 지역 골목과 역사 자산을 보존하면서 상권을 재생하는 방식입니다. 일본의 가나자와, 스페인의 톨레도, 프랑스의 프로방스처럼 도시 자체가 브랜드가 되는 모델입니다. 관광은 건물 몇 채를 짓는 산업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큐레이션하는 산업입니다.

숙박 정책의 통합도 중요합니다. 한국 숙박업은 호텔·모텔·펜션·게스트하우스가 서로 다른 법과 규제에 묶여 있어 품질 관리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숙박업 지원 업무를 문화체육관광부로 일원화하고, 품질 인증제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경쟁의 무게 중심도 가격 경쟁에서 경험 경쟁으로 옮깁니다. 고택과 사찰, 민속 마을을 활용한 명품 숙박 모델을 육성할 계획입니다. 성이나 궁전을 리모델링해 만든 스페인의 국영 호텔 파라도르(Parador)처럼, 예컨대 하회마을 같은 곳에서 숙박하는 식입니다.

가장 민주적인 형태의 수출

관광이 중요한 이유는 분배 구조에 있습니다. 반도체 수출이 늘면 이익은 주로 대기업과 주주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나 관광객이 전라도의 작은 식당에서 식사하고 강원도의 한옥에서 하룻밤을 보내면, 외화는 곧바로 지역 경제로 흘러갑니다. 관광은 중소기업, 자영업자, 농촌, 문화 산업이 동시에 이익을 얻는 산업입니다. 제조업보다 일자리 창출 효과도 큽니다. 특히 청년과 여성, 고령층이 참여하기 쉬운 산업입니다.

한국은 지금 성장 전략을 다시 세워야 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제조업 중심 경제가 여전히 중요하지만, 인구 감소와 글로벌 공급망 변화 속에서 새로운 축이 필요합니다. 일본이 증명한 것처럼, 관광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관광은 단순히 수많은 서비스업 중 하나가 아니라, 문화, 교통, 도시 재생, 농산어촌 정책, 콘텐츠 산업을 연결하는 플랫폼 산업입니다.

K컬처는 새로운 천연자원입니다. 반도체가 실리콘을 가공하는 산업이라면, 관광은 이야기와 경험을 가공하는 산업입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규제 개혁과 인프라 투자, 지역 콘텐츠 발굴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건다면, 한국은 10년 안에 세계적 관광 강국이 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수출이 한국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수출은 한국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 겁니다. 두 축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다음 시대의 성장 모델을 갖게 됩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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