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리니 리서치 보고서, 그 이후

bkjn review

엄청난 수의 반론이 곧바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시트리니 리서치 보고서, 그 이후

2026년 2월 27일

2022년 11월 30일 GPT 모먼트 이후로 생성형 AI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관한 논의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초기의 담론은 약간 SF 소설 같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AI의 정체에 관해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생성형 AI도 너무 어렸습니다. 인류 대다수와 소통할 수는 있었지만, 뭔가 생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에는 아직 부족했죠.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생성형 AI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기술적인 용어를 들먹이며 정교하게 원리를 설명할 수는 없더라도, 이 존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죠. 유례없는 발전 속도에도 이미 적응했습니다. 아마도 오늘과 내일의 제미나이는 비슷하게 똑똑하면서 어딘가 답답하겠지만, 올해 늦봄 쯤의 제미나이는 아마도 지금과는 꽤나 다를 가능성이 큽니다.

인류도, 기계 지능도 경험이 쌓였습니다. 학습했습니다. 2022년의 챗GPT-3.5가 13세 정도였다고 한다면, 개인적으로 지금은 17세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20세가 되는 시점을 최소한의 AGI 도달로 봐서 거칠게 잡아 봤습니다. 가장 낙관적인 추정이 나오는 곳은 관련 업계입니다. 앤트로픽의 CEO인 다리오 아모데이는 2027년 AGI 도달 가능성을 언급했고, 소프트뱅크의 손정희 회장도 비슷하게 봅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와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는 조금 멀리, 5년 정도로 보고 있네요.

사실, 2027년인지, 2030년인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가 되었든 결정적 순간이 곧 닥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변화의 시그널에 한참 예민해진 상태고요. 시트리니 리서치가 내놓은 거시경제 메모가 크게 주목을 받고 시장에 실질적인 영향까지 미쳤던 이유입니다. 북저널리즘도 서둘러 롱리드로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 시나리오는 엄정한 데이터나 근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했던, 혹은 경험하고 있는 사건들을 일종의 시그널로 해석해 이야기의 얼개를 맞춰 나갑니다. 잘 짜인 이야기는 설득력을 갖는 법이고요.

약한 고리

시트리니 리서치는 최근 앤트로픽이 ‘클로드 코워크’ 기능을 선보인 직후 SaaS 기업들의 주가가 폭락했던 현상을 첫 번째 시그널로 삼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시그널을 해석해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AI로 SaaS 기업이나 금융 기업 등이 무너지면, 그 기업들에 대출해준 금융회사들이 손실을 보게 됩니다. 특히 사모펀드가 연루된 차입매수(Leveraged Buyout, LBO) 거래들에 문제가 생길 것으로 봤습니다. 사모펀드가 향후 인수할 기업을 담보 삼아 대출을 받은 뒤, 그 돈으로 기업을 인수하는 방식입니다. 집을 살 때 주택담보대출을 받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인수한 기업이 승승장구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업 가치가 갑자기 폭락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기업이 돈을 못 벌면 대출 원리금을 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담보로 잡았던 기업의 가치가 떨어진 마당이니, 대출금을 회수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채무 불이행, 즉 디폴트가 발생합니다. 시트리니 리서치는 이 디폴트가 사모 대출 시장과 여기에 얽혀 있는 생명 보험사 등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연쇄 금융 붕괴가 올 것으로 봤습니다.

그럴듯합니다. 엄청난 수의 반론이 곧바로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이 이 시나리오의 그럴듯함을 증명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이 〈블룸버그〉 칼럼니스트 출신의 저명한 경제 평론가인 노아 스미스의 글입니다. 시트리니의 보고서는 그저 ‘무서운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혹평했죠. 저는 개인적으로 시트리니 보고서를 터무니없다고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에 촉발된 논의를 여러 방향에서 뜯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을 수록, 변화가 닥친 그 순간 조금이라도 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스미스는 이 시나리오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화할 가능성은 작다고 봤습니다. 먼저, 현재 비금융 기업들의 부채가 낮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 연쇄 반응이 나타나려면, AI의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예상되는 기업들이 빚을 잔뜩 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숫자를 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스미스는 기업들의 이익 대비 부채 비율이 1960-70년대 수준으로 낮다고 지적합니다.
다음으로, 미국의 금융 시스템이 그렇게까지 엉망은 아니라는 점도 지적합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2010년대에 각종 규제가 강화되었습니다. 은행들이 예전만큼 위험 자산을 쌓아둘 수 없다는 얘깁니다. 금융 감독 당국도 시트리니가 언급한 비자나 도어 대시 같은 기업의 대출금이 위험 자산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있는 줄도 몰랐던 부실이 터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얘기죠.

단, 스미스도 사모 대출 시장과 그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생명 보험사들은 약한 고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쪽은 규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대형 사모 대출 기업인 블루아울캐피탈(Blue Owl Capital)이 흔들리면서 시장에 타격을 준 일이 있었죠. 시트리니가 감지한 두 번째 시그널이었을 겁니다.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부분이죠. 하지만 스미스는 생명 보험사가 미국 금융 시스템에서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고 봅니다. 이쪽이 약한 고리는 맞지만, 이 고리가 끊어진다고 금융 시스템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될지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라는 겁니다.

세속적 정체

시트리니의 시나리오에는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에 속하는 중견 기업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물론 가상의 기업이죠. 이 조달 담당자는 SaaS 업체와 연간 계약을 갱신하면서 30퍼센트 할인 조건을 받아 냅니다. 앤트로픽의 클로드 코드, 오픈AI의 코덱스 등 개발 작업의 효율을 엄청나게 향상 시킬 수 있는 툴이 나오면서, 인하우스 개발이라는 선택지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건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위험도 있고, 무엇보다 없던 일을 늘리는 선택입니다. 그래도 대안이 있으면 협상에서 유리해지는 법이죠.

이제 SaaS 기업은 매출이 줄어든 만큼 지출도 줄여야 합니다. 방법은 AI를 더욱 적극적으로 도입해 인건비를 대체하는 것이고요. 그렇게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AI의 성능은 상승하고 가격은 하락하는 추세입니다. 그러니 기업은 사람을 해고해 절감한 비용으로 AI 성능을 더 구매할 수밖에 없고, AI가 커버하는 업무 범위는 갈수록 넓어집니다. 추가 해고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SaaS 외의 다른 섹터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갑니다. 대해고 시대의 시작이죠.

이 악순환 속에서 해고된 이들은 비교적 상위 소득 계층에 속합니다. 시트리니는 이 점에 주목했습니다. 고용 충격보다 소비 위축이 더 클 것으로 전망한 겁니다. 이들이 돈을 쓰지 않으면 전반적인 수요가 붕괴하게 될 것이고, 결국 경기 침체로 이어진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시트리니 리서치는 명시적인 거시경제 모델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미스는 이론적으로 어떤 조건 아래서 시트리니의 수요 붕괴 시나리오가 성립할 수 있는지를 먼저 제시합니다. 이때 제시되는 개념이 ‘세속적 정체(secular stagnation)’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경기가 나빠지면 중앙은행이 금리를 내려서 투자와 소비를 자극합니다. 그런데 금리를 0에 가깝게까지 내렸는데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지요. 명목 금리는 0 아래로 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수요 붕괴가 지속되고 경제 전반은 저성장 균형에 갇혀 버릴 수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상황입니다. 1990년대 이후 30년간 일본이 겪은 일입니다.

AI로 생산성이 폭발했는데 경기가 침체하려면, 이 세속적 정체 상태에 갇혀야 할텐데,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스미스의 주장입니다. 먼저, AI가 생산성 폭발을 일으키면 실물 금리가 0으로 수렴할 이유가 없습니다.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건 투자의 미래 수익이 높아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기업 입장에서 AI 도입으로 내년도 생산성을 30퍼센트 올릴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돈을 빌려서라도 투자를 하겠죠. 돈을 빌리겠다는 기업이 늘어나면, 금리는 오를 수밖에 없고요.

시장 상황이 너무 불안해서 돈을 빌려 투자하려는 수요가 없어진다면, 정부가 직접 돈을 쓰는 방법도 있습니다. AI 인프라에 투자할 수도 있겠고, 국민에게 직접 현금을 지급할 수도 있겠죠. 마치 팬데믹 기간 많은 국가가 시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재원은 AI 섹터가 흡수한 ‘유령 GDP’에서 충당할 수 있겠죠.

나의 일자리는 어디 있는가?

거시경제 관점에서 시트리니의 시나리오를 조목조목 반박한 스미스와는 달리, 콰이어트 캐피탈의 마이클 블로흐는 아예 거울상으로 글을 다시 썼습니다. 시트리니의 시나리오와 똑같은 가정에서 출발해 같은 궤적을 따라 가지만, 낙관적인 결론에 이릅니다. 이를테면, 풍자했다고 할 수 있겠죠.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죠. 시트리니는 해고된 사무직 및 전문직 노동력이 배달과 같은 초단기 노동자 경제로 흘러 들어갈 것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블로흐는 AI가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세계에서 기회를 찾습니다. 창업 비용이 70~80퍼센트까지 하락하면서 실업자들이 스타트업을 창업해 소득 수준을 회복하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또, 임금 하락이 소비 위축을 불러올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의 여지를 제시합니다. 구매력은 임금뿐만 아니라 물가에도 영향을 받죠. AI로 인해 생산성이 향상되고 임금이 줄어든다면, 당연히 물가가 하락하리라는 것이 블로흐의 생각입니다. 서비스 가격이 연 8~12퍼센트 정도 하락한다면, 명목 임금이 제자리여도 실질 구매력은 오히려 오르는 셈이라고 계산했습니다.

블로흐는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하지만 디스토피아로 향할지, 유토피아로 향할지를 결정할 갈림길을 제시합니다. 바로 인간의 적응 속도입니다. 해고된 전문직 노동자가 달라진 환경 속에서 새로운 자리를 찾아내는 데에 9개월이 걸리느냐, 9년이 걸리느냐의 문제라는 것이죠. 사실, 블로흐는 도어 대시의 초기 멤버였고, 스스로 스타트업을 창업해 성공적으로 엑싯에 성공한 경험자입니다. AI가 일자리를 파괴할 수는 있지만, 창업 비용을 낮출 수도 있다는 데에 희망을 건 배경입니다.

언젠가는 AI가 나의 일을 포획할 수도 있습니다. 이 가능성을 두고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그러면 나는 뭘 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가 아닙니다. 나의 능력에 관해 거듭 생각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나도 몰랐던 나만의 재능을 갑자기 깨닫게 되는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질문은 ‘내 일자리가 없어진 세계에는 어떤 기회가 있을 것인가’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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