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미국의 금융 시스템이 그렇게까지 엉망은 아니라는 점도 지적합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2010년대에 각종 규제가 강화되었습니다. 은행들이 예전만큼 위험 자산을 쌓아둘 수 없다는 얘깁니다. 금융 감독 당국도 시트리니가 언급한 비자나 도어 대시 같은 기업의 대출금이 위험 자산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있는 줄도 몰랐던 부실이 터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얘기죠.
단, 스미스도 사모 대출 시장과 그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생명 보험사들은 약한 고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쪽은 규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대형 사모 대출 기업인 블루아울캐피탈(Blue Owl Capital)이 흔들리면서
시장에 타격을 준 일이 있었죠. 시트리니가 감지한 두 번째 시그널이었을 겁니다.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부분이죠. 하지만 스미스는 생명 보험사가 미국 금융 시스템에서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고 봅니다. 이쪽이 약한 고리는 맞지만, 이 고리가 끊어진다고 금융 시스템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될지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라는 겁니다.
세속적 정체
시트리니의 시나리오에는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에 속하는 중견 기업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물론 가상의 기업이죠. 이 조달 담당자는 SaaS 업체와 연간 계약을 갱신하면서 30퍼센트 할인 조건을 받아 냅니다. 앤트로픽의 클로드 코드, 오픈AI의 코덱스 등 개발 작업의 효율을 엄청나게 향상 시킬 수 있는 툴이 나오면서, 인하우스 개발이라는 선택지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건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위험도 있고, 무엇보다 없던 일을 늘리는 선택입니다. 그래도 대안이 있으면 협상에서 유리해지는 법이죠.
이제 SaaS 기업은 매출이 줄어든 만큼 지출도 줄여야 합니다. 방법은 AI를 더욱 적극적으로 도입해 인건비를 대체하는 것이고요. 그렇게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AI의 성능은 상승하고 가격은 하락하는 추세입니다. 그러니 기업은 사람을 해고해 절감한 비용으로 AI 성능을 더 구매할 수밖에 없고, AI가 커버하는 업무 범위는 갈수록 넓어집니다. 추가 해고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SaaS 외의 다른 섹터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갑니다. 대해고 시대의 시작이죠.
이 악순환 속에서 해고된 이들은 비교적 상위 소득 계층에 속합니다. 시트리니는 이 점에 주목했습니다. 고용 충격보다 소비 위축이 더 클 것으로 전망한 겁니다. 이들이 돈을 쓰지 않으면 전반적인 수요가 붕괴하게 될 것이고, 결국 경기 침체로 이어진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시트리니 리서치는 명시적인 거시경제 모델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미스는 이론적으로 어떤 조건 아래서 시트리니의 수요 붕괴 시나리오가 성립할 수 있는지를 먼저 제시합니다. 이때 제시되는 개념이 ‘세속적 정체(secular stagnation)’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경기가 나빠지면 중앙은행이 금리를 내려서 투자와 소비를 자극합니다. 그런데 금리를 0에 가깝게까지 내렸는데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지요. 명목 금리는 0 아래로 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수요 붕괴가 지속되고 경제 전반은 저성장 균형에 갇혀 버릴 수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상황입니다. 1990년대 이후 30년간 일본이 겪은 일입니다.
AI로 생산성이 폭발했는데 경기가 침체하려면, 이 세속적 정체 상태에 갇혀야 할텐데,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스미스의 주장입니다. 먼저, AI가 생산성 폭발을 일으키면 실물 금리가 0으로 수렴할 이유가 없습니다.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건 투자의 미래 수익이 높아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기업 입장에서 AI 도입으로 내년도 생산성을 30퍼센트 올릴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돈을 빌려서라도 투자를 하겠죠. 돈을 빌리겠다는 기업이 늘어나면, 금리는 오를 수밖에 없고요.
시장 상황이 너무 불안해서 돈을 빌려 투자하려는 수요가 없어진다면, 정부가 직접 돈을 쓰는 방법도 있습니다. AI 인프라에 투자할 수도 있겠고, 국민에게 직접 현금을 지급할 수도 있겠죠. 마치 팬데믹 기간 많은 국가가 시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재원은 AI 섹터가 흡수한 ‘유령 GDP’에서 충당할 수 있겠죠.
나의 일자리는 어디 있는가?
거시경제 관점에서 시트리니의 시나리오를 조목조목 반박한 스미스와는 달리, 콰이어트 캐피탈의
마이클 블로흐는 아예 거울상으로 글을 다시 썼습니다. 시트리니의 시나리오와 똑같은 가정에서 출발해 같은 궤적을 따라 가지만, 낙관적인 결론에 이릅니다. 이를테면, 풍자했다고 할 수 있겠죠.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죠. 시트리니는 해고된 사무직 및 전문직 노동력이 배달과 같은 초단기 노동자 경제로 흘러 들어갈 것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블로흐는 AI가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세계에서 기회를 찾습니다. 창업 비용이 70~80퍼센트까지 하락하면서 실업자들이 스타트업을 창업해 소득 수준을 회복하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또, 임금 하락이 소비 위축을 불러올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의 여지를 제시합니다. 구매력은 임금뿐만 아니라 물가에도 영향을 받죠. AI로 인해 생산성이 향상되고 임금이 줄어든다면, 당연히 물가가 하락하리라는 것이 블로흐의 생각입니다. 서비스 가격이 연 8~12퍼센트 정도 하락한다면, 명목 임금이 제자리여도 실질 구매력은 오히려 오르는 셈이라고 계산했습니다.
블로흐는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하지만 디스토피아로 향할지, 유토피아로 향할지를 결정할 갈림길을 제시합니다. 바로 인간의 적응 속도입니다. 해고된 전문직 노동자가 달라진 환경 속에서 새로운 자리를 찾아내는 데에 9개월이 걸리느냐, 9년이 걸리느냐의 문제라는 것이죠. 사실, 블로흐는 도어 대시의 초기 멤버였고, 스스로 스타트업을 창업해 성공적으로 엑싯에 성공한 경험자입니다. AI가 일자리를 파괴할 수는 있지만, 창업 비용을 낮출 수도 있다는 데에 희망을 건 배경입니다.
언젠가는 AI가 나의 일을 포획할 수도 있습니다. 이 가능성을 두고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그러면 나는 뭘 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가 아닙니다. 나의 능력에 관해 거듭 생각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나도 몰랐던 나만의 재능을 갑자기 깨닫게 되는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질문은 ‘내 일자리가 없어진 세계에는 어떤 기회가 있을 것인가’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