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경제야, 멍청아!”
1992년 빌 클린턴은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구호를 앞세워 당선됐습니다. 냉전이 끝나고 이데올로기가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했던 시대도 끝났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권력 투쟁을 끝내고 더 나은 삶으로 가겠다고 약속했죠.
하지만 백악관에 입성하고 나니, 경제 말고도 다른 문제가 보였던 것 같습니다. 역사 속 미국 대통령들이 그러했듯, 클린턴도 결국 국제 분쟁에 무력으로 개입했습니다. 여러 차례 미사일 공격이 있었고, 이라크 상공에는 비행 금지 구역이 설정되었습니다. 세르비아에서도 장기간의 공습 작전을 벌였죠.
언어의 결은 좀 다르지만, 비슷한 구호를 내세워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트럼프 대통령입니다.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는 2016년 처음 대선에 출마하면서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끝나지 않는 전쟁’이었고요.
트럼프가 완전히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오바마는 2003년 이라크 침공에 반대했던 전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후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등을 향해 공격을 이어나갔습니다. 트럼프는 오바마처럼 돈만 쓰고 무의미한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죠.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냉전 이후, 미국 대통령들은 모두 똑같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취임 후엔 그 약속을 저버린 겁니다. 마치 백악관에 입성하는 순간 마법에라도 걸려버리는 듯 말이죠. 진짜 그런 마법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미국 정계를 전쟁에 중독시켜 버리는 마법 말입니다. 민간 싱크탱크 소속의 군비 감시 전문가 윌리엄 D. 하텅과 벤 프리먼은《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에서 그 마법의 정체를 지목합니다. ‘군산복합체’입니다.
군산복합체
‘정경유착’이라는 언어에는 유쾌하지 않은 냄새가 배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라는 두 주체가 밀접하게 결탁했다는 뜻인데, 사실 곰곰이 생각하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저개발 국가에서 필요한 산업에 드라이브를 걸어 발전시키는 정책을 추진하려면, 정부와 경제계가 밀접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같이 생성형 AI라는 미래 기술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면, 이른바 ‘선진국’으로 불리는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책과 산업이 손발을 맞출 필요가 있지요.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재계와 정계가 부당한 이득을 챙길 가능성에 있습니다. 돈과 힘이 만났으니,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기업은 뇌물이나 정치 자금을 제공하고, 정치권은 사업 특혜나 규제 완화 정책을 추진하는 식입니다. ‘회전문 인사’도 발생합니다. 정계와 행정부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기업을 챙겨준 뒤, 이후 기업으로부터 그럴싸한 고소득 일자리를 제안받는 식이죠.
그래서 우리는 정경유착을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순기능보다는 역효과를 더 많이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시스템을 움직이는 거대한 축들이 서로 결탁하면, 필요 이상의 권력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군산복합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냉전 시대, 평화를 담보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막대한 국방력이었습니다. 모순입니다. 그리고 그 모순의 시대를 거치며 군산복합체는 세력을 무섭게 키웠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전쟁 없는 전시 상태가 계속되었고, 핵무기와 미사일, 항공우주, 전자공학 등 엄청난 연구 개발도 이루어졌습니다. 막대한 국방 예산을 배분하는 국방부, 그 예산을 승인하는 의회, 계약을 따내는 방산 업체, 기술을 공급하는 대학과 연구 기관이 얽혀 하나의 유기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군과 산업이 서로 얽혀 만들어진 공동체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양측의 이익을 위해 국가 전체의 역량을 희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제일 처음 경고했던 것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입니다. 1961년 1월 17일,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퇴임식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군산복합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부당한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잘못 배치된 권력의 재앙적인 부상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의 두 저자는 이 거대한 시스템에 ‘전쟁 기계’라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삐걱거리는 전쟁기계
천조국(千兆國) 미국의 올해 국방 예산은 9000억 달러에 이릅니다. 전 세계 국방비의 40퍼센트를 차지합니다. 이 돈의 절반은 미 군수산업으로 흘러들고요. 이렇게 많은 돈이 흘러드니 무기가 계속해서 생산됩니다. 그런데 그 무기의 성능은 들인 돈에 비해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그 원인은 클린턴 행정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냉전이 끝나가던 1993년, 당시 미 국방부 차관이었던 빌 페리는 주요 방위 산업체 CEO들과 회담했습니다. 국방 예산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이야기하면서, 많은 기업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죠. 이른바 ‘최후의 만찬’ 회담이었습니다. 전쟁의 위협이 멀어졌으니, 방위 산업 분야도 체질 개선에 돌입하자는 것이었죠.
하지만 정부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업계 내에서는 엄청난 인수 합병이 이어졌고, 그 결과 록히드마틴을 비롯한 5개 업체가 시장을 독점하는 체제가 완성되었습니다. 독점 시장에서는 혁신이 발생하기 어렵습니다. 그 결과, 방산 업계는 국방부의 예산을 끝없이 빨아들이면서 F-35 전투기와 같은 ‘실패작’들을 내놓게 됩니다. 전장에서 목숨을 걸 병력을 오히려 위험에 빠트리는 결함투성이의 무기들 말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물건에 결함이 있다면, 안 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총 연구 개발 및 생산 비용에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붙여 대금을 받는 거래 방식 때문입니다. 물건이 나오기도 전에, 견적이 확정되기도 전에 계약하는 겁니다. 국방부 입장에서는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도, 예산을 추가로 지급해 무기를 완성하는 것이 손해를 줄이는 길입니다. 어차피 빅5 업체가 나눠 먹고 있는 시장에서 혁신적인 대안을 찾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국방비 예산을 줄여 무기를 덜 만들 수는 없을까요? 그럴 수도 없습니다. 방산 업체들의 엄청난 로비 때문입니다. 정치 자금을 지원하며, 방산 공장이 위치한 지역구의 국회의원이 국방비 예산을 사수하도록 합니다. 의원 입장에서도 지역 일자리를 지켜야 하니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집니다. 게다가 이 로비스트들은 전직 의원이나 보좌 직원, 국방부 직원입니다. 이른바 ‘회전문 인사’로, 옛 동료들이죠. 방산 업체들은 국방 및 안보 전략을 제시하는 싱크탱크에도 거액의 후원을 합니다. 전문가와 학자들의 권위를 앞세워 지금은 군비를 줄일 때가 아니라는 보고서가 쏟아집니다.
오사마 빈 라덴과 ISIS의 무기
이렇게 책정된 국방비로 생산된, 혁신 없는 무기들은 미국의 국방력을 살찌우기도 하지만, 전 세계로 뻗어나가기도 합니다. 재고가 소진되어야 생산이 더 필요해지는 법이니까요. 미국 정부는 반테러리즘 세력에 무기를 지원하는 식으로 재고를 떨어냅니다. 이번에 이란 지상전에 미국 대신 나설 것으로 전망되는 쿠르드 민병대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원’의 종류는 두 가지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는 정보, 다른 하나는 무기죠.
이런 방식으로는 평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이 책은 강조합니다. 상징적인 예시가 바로 알카에다의 수장이었던 ‘오사마 빈 라덴’입니다. 빈 라덴은 원래 소련군을 아프가니스탄에서 몰아내기 위해 싸우던 무장 집단 세력 소속이었습니다. 당연히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요. 이 지원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알카에다를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한동안 전 세계의 숙제였던 ISIS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세력을 기웠지만, 특히 2003년 미국의 이라크 개입 이후 들어선 바그다드 정권에 대한 반발이 주요한 기반이었다는 것이 저자들의 분석입니다. 그리고 ISIS는 이라크군으로부터 미국산 무기를 대거 빼앗아 확보했고요.
‘시장’에 무기가 풀리면 결국 최종적으로는 전쟁에서 소진됩니다. 무기가 있으니, 전쟁이 가능한 겁니다. 전쟁이 발생하고 사태가 걷잡을 수 없어지면, 결국 미국이 군사 개입에 돌입합니다. 그 결과 참전 용사들은 자신들이 파병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전장에 투입됩니다. 미국은 전쟁에서 벗어날 수도, 전쟁을 끝낼 수도 없습니다.
경쟁자가 등장했지만
물론, 이 견고한 체제가 영원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독점 체제를 형성한 방산 빅5 업체들에도 유의미한 경쟁자가 나타났습니다. 스페이스X, 팔란티어, 안두릴 등과 같은 업체들입니다.
진입장벽이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2014년 스페이스X는 공군 계약을 따내기 위해 소송까지 제기해야 했으니까요. 당시 일론 머스크는 ‘회전문 인사’를 대놓고
비난했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이들에게 미래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을 회사에 계약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우리의 경쟁 상대는 이들의 친구들이 일하고 있는 회사다. 즉, 우리와 계약한다는 것은 친구는 물론 미래의 은퇴 프로그램으로부터도 등을 돌리는 것과 같다.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장벽은 어쨌든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압도적인 기술과 상대적으로 유리한 가격 조건 때문입니다. 사실, 《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를 읽다 보면 안두릴이라는 기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쟁 기계의 탄생 과정, 그리고 이 전쟁 기계의 작동 방식이 왜 무능할 수밖에 없는지에 관한 논리가 안두릴이
주장하는 바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생성형 AI와 우주 기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도전자들은 방산 업계의 견고한 시스템에 균열을 내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이 도전자들이 현재 트럼프 행정부 내에 꽤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데에 주목합니다. 기존의 빅5 업체와 미 국방부, 의회 등과의 결탁과 새로운 새력은 예산을 둘러싸고 이제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터져 나왔던 국방부와 앤트로픽의 갈등을 두고, 양심적인 앤트로픽의 저항쯤으로 보는 시각들이 많은데, 이와 같은 맥락을 깔고 보면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니기도 합니다. 앤트로픽의 AI 모델을 차용한 팔란티어의 시스템이 이미 국방부에 중요하게 자리 잡았고, 그만큼 신규 진입자들의 목소리가 예전보다 커졌다는 방증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변화가 기존의 ‘전쟁 기계’의 오작동을 멈춰 세울 수 있을까요? 저자들은 좀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습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려본다면, 국방부가 예산을 대폭 늘려 기존 세력과 신규 세력 모두에 충분한 자금을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골든 돔’ 프로젝트를 고려하면, 미국의 국방비는 앞으로도 천조국의 면모에 부족함이 없는 규모를 유지하게 되겠지요.
이 책은 희망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새로운 ‘평화 네트워크’를 구축해 전쟁을 멈추자는 겁니다. 하지만 저자들이 꼼꼼하게 서술한 전쟁 기계의 시스템은 이미 미국과 세계의 경제를 굴리는 한 축이 되었습니다. 돈도 권력도 이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는 이상, 그 관성을 멈추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결국, 저자들이 제시하는 전방위적인 개혁은 요원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선거 자금 제도 개혁, 회전문 인사 제한, 국방부 의존적 경제 구조를 벗어나기 위한 투자 확대 등은 엄청난 추진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당위성에는 동의하지만, 가능성에는 의문이 남습니다. 비극적인 일이지만, 책장을 덮은 후에도 전쟁이라는 중독을 당장 멈출 방법은 보이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