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참 이상합니다. 전쟁을 이끄는 각국 수장의 말에 무게가 없습니다.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이 걸프 국가들에 사과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이란은 다시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등을 공격했습니다. 이란의 정치 체계가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공격을 감행한 이란 혁명수비대는 대통령이 아닌, 종교적 지도자이자 대통령보다 더 큰 권력을 갖는 ‘최고 지도자’의 명령을 받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말을 뒤집었습니다. 쿠르드족 무장 세력을 앞세워 ‘대리 지상전’이라도 치를 것처럼 분위기를 잡았죠.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도
시사했습니다. 하지만 단 며칠 만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현지 시각 지난 3월 7일, 트럼프 대통령은 전사한 군인 6명의 유해를 맞이하는 귀환식에 참석한 후,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에 탑승해 돌연 기자들에게 쿠르드족 개입 방안을
배재했다고 밝힌 겁니다.
이란의 정치 체계는 우리와 많이 다릅니다. 최고 지도자였던 아야톨라 하메네이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살된 후 수뇌부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고요. 권력 없는 대통령의 말을 무시하고, 최고 지도자를 따르는 혁명수비대가 걸프 지역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예외적이지만,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
반면, 미국과 쿠르드족의 이야기는 다릅니다. 웬만큼
확신에 차지 않은 이상, 특정 세력이 참전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쉽게 흘릴 지도자는 없습니다. 아무리 돌발 변수의 상징 트럼프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말이죠. 이건 어딘가에서 이야기가 삐걱거렸다는 얘깁니다. 쿠르드족은 지구상 최대의 유랑 민족이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고 중동 지역 분쟁에서 이름이 빠지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들의 현대사를 떠올려 보면, 일이 어그러진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제국주의의 소용돌이
쿠르드족은 대부분 터키, 이라크, 시리아, 이란 지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인구는 약 3000만에서 4000만 명 사이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일 국가를 이루기에 충분한 숫자죠. 실제로 민족 국가를 세우고 한곳에 정착하기 위해 투쟁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에겐 일종의 ‘무장 세력’으로 각인되었고요. 하지만 그 시도는 늘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거듭된 배신 때문이었죠. 쿠르드족 사이에는 ‘쿠르드족에게는 산밖에 친구가 없다’라는 격언이 전해 내려옵니다.
처음 지상전 투입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쿠르드족이 ‘또’ 좌절을 경험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일각에서는 터키를 주목하기도 했고요. 터키가 반대하고 나서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죠. 쿠르드족이 독립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떠돌게 된 데에는
터키와의 악연이 있었습니다. 시작은 1차 세계 대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세기까지
쿠르드족은 대부분 오스만 제국 동부 산악 지대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통일된 민족 국가 의식은 없었습니다. 민족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 19세기에 발명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쿠르드족도 민족보다는 개별 부족 단위의 정체성이 훨씬 강했고, 부족장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오스만 제국도 이들을 간접 통치 방식으로 관리했습니다. 부족장들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고 세금과 병력을 제공받았죠.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탄압과 대학살에 동원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파고 속에서 쿠르드족에게도 독립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필요와 의지가 생겨납니다. 마침, 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오스만 제국이 붕괴 수순에 접어들었죠. 영국은 전쟁 말엽 쿠르드 부족장들에게 독립 또는 자치를 보장해 줄 것처럼 이야기하며 쿠르드 일부 부족을 끌어들였고, 연합군과의 협력 관계가 형성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약속은 지켜질 뻔했습니다. 1920년 체결된
세브르 조약에서 쿠르드 자치안이 마련되었고, 독립 가능성도 열어 뒀습니다.
하지만, 터키에서 독립 전쟁이 발발하고, 이에 맞서던 그리스가 밀리면서 세브르 조약은 유명무실해집니다. 소련을 견제할 완충지대로 터키가 필요했던 영국과 프랑스 등은 터키의 요구에 따라 쿠르드족에게 약속했던 독립을 없던 일로 돌려 버렸죠. 또, 쿠르드족이 자치를 약속받았던 영역 중 모술 지역에 유전 개발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도 독이 되었습니다. 영국으로서는 돈이 되는 이 지역을 식민 지배 중인 이라크에 포함하는 것이 유리했으니까요.
구원자는 없다.
어떤 민족이든, 어떤 국가든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또,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단어가 모든 개인의 삶을 대표할 수 있다는 환상도 위험합니다. 쿠르드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정착하여 터키인의 정체성, 이라크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쿠르드족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도 다수입니다.
쿠르드족은 주로 튀르키예,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수가 무장 세력화하여 자치권, 독립 국가를 요구하며 폭력 사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들로서는 독립 전쟁이고, 희생당하는 쪽에서 보면 테러이자 반란입니다. 각국은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쿠르드족은 탄압당하거나 학살당하기도 했죠.
독립을 향한 열망이 커지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세력도 나타납니다. 미국입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좌파 성향이었던 이라크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1991년 걸프전 이후에는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부를 흔들기 위해, 미국은 쿠르드족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자치 정부와 독립 국가의 가능성을 미끼 삼아 말이죠. 하지만 미국은 늘 배신했습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면, 지원을 끊거나 모른 척했습니다. 번번이 쿠르드족은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2019년에는 ISIS 격퇴전을 위해 쿠르드족이 동원됩니다. 지상군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고, ISIS를 상대로
승전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다시 비극이 반복됩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전화 통화를 한 이후 돌연 시리아 북부 국경지대에서 미군이 철수해 버린 겁니다.
이후 터키는 ‘평화의 샘’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터키군과 시리아 반군이 함께 시리아 북동부 국경지대를 공격한 겁니다. 쿠르드족이 실질적으로
자치 지역을 형성해 살던 곳입니다. 결국 쿠르드족의 희생은 물론, 그 틈에 ISIS
포로 수백 명이 탈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로 트럼프는 미국 국내에서도 초당적인 반발에 부딪혔고요.
이렇게 쿠르드족은 미국과, 그중에서도 트럼프 대통령과 악연으로 엮이고 말았습니다. 이번 이란 전쟁에 쿠르드족 이름이 다시 언급되자 ‘또?’라는 반응이 나왔던 이유입니다.
배신의 기술
쿠르드 측과 백악관의 협의가 어디서 어떻게 틀어졌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쿠르드가 개입을 결정했다면 다시 한번
배신 당했을 확률이 적지 않습니다. 각국의
정치적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이야 이란이 중동 지역 전체를 적으로 돌리면서 공격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란은 중동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국가입니다. 예를 들어, 이라크는 이란과의 협정을 통해 어떠한 테러 및 무장 세력도 자국을 거쳐 이란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만약, 쿠르드족이 이란 공격에 나섰다면, 이 약속을 깨야 했겠죠.
터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쿠르드족 무장세력을 안보 위협으로 간주해 강하게 억제해 왔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즈니스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가 말하는 거래의 기술은 제값을 치르고 가치 있는 재화를 손에 넣는 것이 아닙니다. 이란 시민들을 향해 봉기하라고, 저항하라고 독려했던 이유는 미국의 자원을 사용하지 않고 이란의 체제에 스트레스를 줄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란의 일부 시민들은 트럼프가 시민의 편이 되어 주리라 믿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런 거래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건 중동 지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장 대만에 관해서도 트럼프는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만 보호의 조건으로 미국 시장용 반도체 생산의 절반은 미국에 하자는
제안을 한 바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은 얘기죠. 결국, 2026년 1월 미국은 대만에 관세 인하의 대가로 2500억 달러 투자와 2500억 달러의 신용 보증을 받아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 1기 당시 국가 안보 보좌관을 역임했던 존 볼턴은 미국이 중국과의 협상을 위해 대만을 희생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란 전쟁은 끝날 겁니다. 이란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고, 정권은 유지하되 자세를 낮춰 미국과 협상에 나설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란엔 우크라이나처럼 끝없이 무기를 지원해 줄 세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이 끝난다고 세계에 평화가 찾아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이제 미국의 전쟁 앞에 쿠르드족처럼 결정해야 할 순간이 올 겁니다. 무력을 사용한 전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 정치적 전쟁도 포함해서입니다. 이번 전쟁에서는
영국 등의 국가가 비슷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지난 관세 협상을 통해 한국과 일본도 결정을 해야 했고요.
‘산밖에 친구가 없다’라는 쿠르드족의 격언처럼, 지정학적 관계 속에서 친구라는 개념은 사라졌습니다. 지금 이란을 둘러싼 모든 일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