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프트웨어 산업의 구조는 단순했습니다. 세계는 몇 개의 거대한 플랫폼에 지배되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세일즈포스, SAP 같은 기업이 만든 범용 소프트웨어는 수많은 기업의 업무를 표준화했고, 개발자는 전문 직업군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에게 소프트웨어는 사용하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구조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바이브 코딩 때문입니다. 이제 소프트웨어는 코드가 아니라 대화로 만들어집니다. 오픈AI 창립 멤버인 안드레이 카르파티가 대중화한 ‘바이브 코딩’이라는 개념은 개발자가 코드 대신 자연어로 원하는 기능을 설명하면 AI가 프로그램을 생성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굉장히 신기해 보이지만, 사실 구조만 놓고 보면 한영 번역처럼 간단합니다. 자연어를 기계어로 번역하는 것뿐이니까요.
AI 코딩 도구의 발전 속도는 놀랍습니다. 스웨덴의 스타트업 Lovable은 자연어로 웹과 앱을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을 개발해 불과 몇 년 만에 수십억 달러 가치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대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픈AI의 코덱스, 클로드 코드, MS 코파일럿, 구글 AI 스튜디오는 모두 개발자의 동료로 설계된 AI 에이전트입니다.
이런 도구들은 소프트웨어 개발의 본질을 바꾸고 있습니다. 과거의 개발이 “어떻게 만들 것인가(how)”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what)”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개발자의 역할도 바뀝니다. 코드 작성자가 아니라 문제 정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변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도메인 전문가입니다.
소프트웨어를 만들게 된 사람들
AI 코딩의 진짜 혁명은 개발자가 아닌 사람들이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최근 앤트로픽의 해커톤에서 변호사, 의사, 음악가, 인프라 노동자 등이 AI 코딩 도구로 실제 서비스를
만들었습니다. 한 변호사는 건축 허가 절차를 자동화하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한 심장 전문의는 환자 상담을 돕는 의료 서비스를 개발했습니다.
소프트웨어 산업의 무게 중심이 개발자에서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 이동하고 있는 신호입니다. 과거에는 소프트웨어를 만들려면 두 가지가 필요했습니다. 문제에 대한 이해와 코딩 능력입니다. 이제 두 번째 요소는 AI가 상당 부분 대신합니다. 남는 것은 문제 이해 능력입니다. 즉 도메인 전문성입니다.
이 변화는 소프트웨어 산업의 구조를 재편할 가능성이 큽니다. 지난 20년 동안 SaaS 산업은 범용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CRM, ERP, 협업 툴 같은 시스템은 수많은 기업이 동일하게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AI가 등장하면서 이런 구조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용자가 필요할 때마다 AI 도구를 이용해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즉석에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기업들이 범용 SaaS 구독을 계속 유지해야 할 이유가 줄어듭니다. 뭘 만들어야 할지만 정확히 알고 있다면, 만드는 게 너무 쉽고 저렴하니까 사서 쓸 필요가 없어집니다.
이 변화는 이미 ‘사스포칼립스(SaaSpocalypse)’라는 말로 불리고 있습니다. SaaS와 Apocalypse의 합성어입니다. SaaS의 종말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부동산 계약을 처리하는 공인중개사가 만든 계약 자동화 툴, 특정 병원의 진료 프로세스에 맞춘 의료 기록 시스템, 서울 소재 건축사 사무소가 만든 서울시 건축 인허가 관리 소프트웨어가 있습니다.
이런 제품은 범용 소프트웨어보다 훨씬 좁은 문제를 해결하지만, 그 분야에서는 훨씬 강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만든 사람이 바로 그 문제를 매일 겪는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챗GPT 같은 AI는 범용 도구입니다. 장점이자 한계입니다. 범용 AI는 모든 분야를 이해하지만, 특정 도메인의 깊은 지식까지는 갖기 어렵습니다. 특정 병원의 진료 프로세스 같은 데이터는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 제품 경쟁력은 점점 도메인 전문성과 AI가 확보하지 못하는 데이터에서 나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의료 소프트웨어는 의료 기록 데이터, 법률 서비스는 판례 데이터, 산업 시스템은 현장 데이터 같은 자산을 가진 사람들이 더 강력한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AI는 그들의 증폭기가 됩니다.
소프트웨어의 민주화
AI 기반 개발은 프로그래밍을 전문가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하고, 문제를 가진 사람에게 직접 해결 능력을 부여합니다. 1990년대 웹의 등장과 비슷한 변화입니다. 웹은 출판을 민주화했습니다. AI는 소프트웨어 제작을 민주화하고 있습니다.
도메인 전문가들이 만든 작은 소프트웨어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뒤에는, 역설적으로 개별 소프트웨어 자체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낮아질 수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공급이 많아질수록 희소성은 제품 하나하나에 있지 않고, 그것들을 연결하고 선택하고 실행하는 메커니즘에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때 중요해지는 것은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도구를 고르고 조합하는 능력입니다. 소프트웨어의 수는 전보다 폭발적으로 증가하겠지만, 소프트웨어 제작이 아무리 쉬워져도 전 국민이 소프트웨어를 직접 만들어 쓰지는 않습니다. 소프트웨어들이 다양해졌을 때, 일반 사용자는 수십 개의 앱을 직접 비교하고 고르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대신 목표를 말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은 다른 층위의 시스템에 맡기려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 시스템이 바로 에이전트입니다. 사용자는 “이 계약서를 검토해 주십시오”, “이 환자의 보험 청구를 처리해 주십시오”, “우리 공장의 재고를 최적화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에이전트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를 찾아 쓰고, 순서를 정하고, 데이터를 넘기고, 결과를 통합합니다. 이 과정에서 개별 소프트웨어는 사용자가 직접 상대하는 완결된 제품이라기보다, 에이전트가 호출하는 기능 단위의 모듈에 가까워집니다.
이런 변화는 낯선 것이 아닙니다. 웹 시대에는 정보가 폭증하자 검색 엔진이 중요해졌습니다. 모바일 시대에는 앱스토어라는 관문이 생겼습니다. 공급이 폭발하면 반드시 선택과 배분을 담당하는 계층이 생깁니다.
AI 시대에도 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이번에는 사람이 직접 앱을 고르는 인터페이스보다, 에이전트가 사용자 대신 도구를 선택하고 조합하는 인터페이스가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소프트웨어가 곧바로 에이전트에 흡수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회계, 보안, 인사, 협업처럼 공통 인프라에 가까운 영역에서는 여전히 대형 범용 소프트웨어가 강한 지위를 유지할 가능성이 큽니다. 규제와 책임이 무거운 영역에서는 검증된 공급자가 더 선호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미래는 ‘거대 소프트웨어의 완전한 종말’이라기보다, 범용 인프라는 남고 그 위에 도메인 특화 모듈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그 둘을 조정하는 에이전트 계층이 부상하는 방향에 더 가까울 겁니다.
소프트웨어의 미래
AI 시대의 소프트웨어 산업은 세 층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도메인 전문가들이 만드는 수많은 마이크로 소프트웨어입니다. 둘째, 그것들을 연결하는 API와 데이터 인프라입니다. 셋째, 사용자 대신 이들을 선택하고 조합하는 에이전트 계층입니다.
이 구조에서는 누가 코드를 더 많이 쓰느냐보다, 누가 문제를 더 잘 이해하느냐, 누가 더 좋은 데이터와 워크플로를 갖고 있느냐, 그리고 누가 이 흐름을 더 매끄럽게 조정하느냐가 중요해집니다.
미래의 소프트웨어 산업을 지배하는 것은 단순히 가장 큰 앱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가장 넓은 범용 모델과 가장 깊은 도메인 지식,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조정 능력을 가진 주체가 더 큰 힘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의 경쟁은 ‘앱 대 앱’의 경쟁이 아니라 ‘문제 이해, 데이터, 조정 능력’의 경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에이전트가 호출하는 도구들의 상당수는, 점점 더 도메인 전문가들이 만든 작은 프로그램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