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아이를 위한 담론

bkjn book review

청년층에게 고통은 적고 행복은 많은 사회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2025년 출생아 수 집계가 지난 2월 25일 발표되었습니다. 국가데이터처가 정기적으로 내놓는 수치입니다. 대부분의 매체가 2년 연속 출생아 수가 늘었다며 환영하는 헤드라인을 뽑았습니다. ‘아기 울음소리’라는 감성적인 언어도 거듭 등장했죠. 그리고 마치 시험 점수라도 되는 양, 매 분기 체크하고 있는 수치도 나왔습니다. ‘합계 출산율’ 얘깁니다. 0.80명으로 올랐습니다. 2023년 0.72명이 바닥이었습니다.

현재의 30대 초반 연령대를 ‘에코붐’ 세대로 지칭합니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 중에서도 한 해 출생아 수가 100만 명 안팎이었던 1960년대생의 자녀들입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반향’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에코붐 세대는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습니다. 이들이 30대 초반쯤이니, 인구 구조상 출산이 늘어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게다가 팬데믹 기간 미뤄 뒀던 결혼이 늘었고, 2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출산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조건들을 고려하면 출생아 수가 늘었다고 좋아할 일은 아닙니다. 너무 적게 늘었습니다. 0.8은 누가 뭐래도 낙제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보도들을 주욱 읽다 보면 문득 질문이 떠오릅니다. 왜 우리는 합계 출산율이라는 숫자에 이렇게 목을 매는 것일까, 이 숫자를 올리지 못하면 우리는 전부 불행과 고통의 나락을 빠지나, 이런 질문들 말입니다. 마치 수능 시험 점수를 올려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수험생처럼,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이 숫자를 올려야 할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실제로 정부 정책 또한 이 숫자를 올리는 데에 집중해 왔고요.

정말, 합계 출산율은 ‘합격’과 ‘낙제’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절대적인 성적표일까요? 인구 경제학자인 이철희 서울대학교 교수는 저서 《인구에서 인간으로》에서 “출생아 수를 늘려서 인구를 유지하는 일 ‘자체’를 국가 정책의 절대적, 궁극적 목표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합계 출산률

사람이 재산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니,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사람은 늘 재산이었죠, 구약성서 ‘창세기’에도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첫 축복은 “자식을 낳고 번성하라”라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노동력이 늘어나면 농사지을 땅을 더 넓힐 수 있어 가족이 번성하고 마을이 번성합니다.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가 확보되니 산업 기반의 경제에서도 유리합니다. 인구 폭발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몇몇 시기를 제외하면, 다산은 축복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자녀의 경제적, 사회적 편익은 컸던 반면 자녀를 키우는 비용은 낮았다.”

하지만,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위 문장은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집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쓸모로 보는 문장입니다. 저자도 이 언어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가려냅니다. 

“옛날에 자녀의 편익은 높고 그 비용은 낮았다는 진술은 여성과 아동의 권익과 후생이 무시되는 상황에서 가문과 가장의 이해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 경제적 용역이나 쓸모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시선은 당연히 출생과 육아의 당사자가 아니었습니다. 여성은 출산의 위험과 양육의 노동을 온전히 감당해야 했고, 아동은 빈곤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희생되는 존재였습니다. 다산은 여성의 삶에도, 아이의 삶에도 행복한 선택이 아닙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출산력 변천’ 현상입니다. 경제 구조, 정치 시스템, 삶의 방식이 차례로 변화하면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19세기 무렵부터 장기적인 출산율 감소가 시작된 겁니다.

위생과 의학이 발전하면서 영유아 사망률이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자녀를 적게 낳아 더 잘 키우는 선택이 가능해졌습니다. 지식 중심 사회로 이동하면서 교육 수준이 높아졌고, 교육 수준에 따른 임금 상승이 심화했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기보다는 양육의 질을 높이는 것이 더 유리한 선택이 된 겁니다. 여기에 여성의 경제 활동이 늘어났고, 복지국가도 확대되었습니다. 삶에 있어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늘어났습니다. 삶의 질도 나아졌습니다. 사회 안전망도 이전에 비해서는 탄탄해졌습니다. 그 결과가 출산율의 저하라면, 이게 정말 나쁜 일일까요?


반출생주의

다만, 개인의 선택지가 늘어났다는 것만으로는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극단적인 저출생 기조를 전부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가족 공동체를 구성해 아이를 낳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 우리의 존재가 그 증거이고요. 이것이 사회적으로 강요된 행위에 불과했다면, 훨씬 오래전부터 인류는 저출생 단계에 들어가 지금보다 훨씬 가파른 인구 감소를 경험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또, 저자는 1992년부터 30년간 발생한 출생아 감소분의 75퍼센트가 결혼 감소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니 출생률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결혼에 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하겠습니다. 《인구에서 인간으로》에서는 경제학의 시각으로 결혼의 ‘편익’에 관해 분석합니다. 결혼이 주는 대표적인 경제적 편익은 효율성입니다. 가사 노동과 소득 확보를 두 사람이 나누어 맡아 전념하면,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편익이 증가한다는 겁니다. 또, 위험 분담 가능성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결혼은 최소 단위의 사회 안전망에 편입되는 방법이죠.

하지만 이러한 편익이 시대의 변화와 함께 감소했습니다. 여성의 사회 참여가 증가했고 복지 시스템이 구축되었죠. 반면, 결혼을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이유는 증가했습니다. 교육 경쟁, 주거비 급등, 고용 불안, 불평등 확대와 함께 여성이 느끼는 출산과 일자리의 장벽 등입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끝없이 반복되는 담론입니다. 다만, 저자는 연구자의 자세로 이 요인들이 실제 결혼이나 출산을 억제한다는 연구를 꼼꼼히 제시합니다. 우리 사회가 결혼을 선택하기 어려운 쪽으로, 출생률을 억누르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수치적 증거가 제시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저는 철학자 데이비드 베나타의 ‘반출생주의’를 떠올리게 됩니다. 아이를 낳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베나타는 저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를 통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죠. 논쟁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베나타의 논리에 어떤 해방감을 느낀 까닭도 있는 것 같습니다.

베나티의 논리를 아주 납작하게 요약한다면, 출생은 반드시 타인, 즉 자녀에게 고통을 겪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부당하다는 겁니다. 물론, 사람의 일생에는 쾌락도 있죠. 하지만, 쾌락의 부재는 쾌락을 경험할 당사자가 있어야 ‘아쉬운 일’이 됩니다. 그러니 고통을 전제하는 삶을 자녀에게 겪게 한다는 것은 자녀에 대한 권리 침해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삶의 가치란 고통과 쾌락이라는 이분법적 계산으로 측정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때로 쾌락이며, 쾌락은 때로 고통입니다. 우리는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인 의미 체계 안에서 더욱 복잡한 스스로의 의미 체계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한 수많은 결정은 그 무엇도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느낀 수많은 감정도 고통과 쾌락으로 딱 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상태를 고통과 쾌락으로 정의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시도가 있다면, 그것은 월권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의심하게 만듭니다. 내가 자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지 말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내가 내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부터 의심하게 되죠.

상대 평가

《인구에서 인간으로》에서 지적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 중에서는 ‘청년층이 느끼는 세대 간 기대치의 괴리’가 아마도 베나티의 논리에 가장 부합하는 부분 아닐까 합니다. 저자는 한국에서 유독 부정적 현실 인식이 도드라지는 이유로 한국 특유의 압축 성장을 제시합니다. 현재 청년 세대는 어림잡아 7퍼센트 중반대의 경제 성장률을 경험한 부모 세대의 생활 수준을 보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2퍼센트는커녕, 1퍼센트대도 무너질 판입니다. 이러한 저성장기의 현실은 청년 세대가 성장기에 구축한 미래 전망과는 차이가 큽니다.

“옛날에는 난리를 겪으면서도 아이를 낳아 키웠다.”

이 말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절대 평가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상대 평가에 기초해 생애에 대한 전망을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고 이야기하죠. 그리고 만약, 부모 세대의 삶이 그 기준점이라면 그 전망은 절망으로 쉽게 떨어져 버립니다. ‘고통을 전제하는 삶’을 물려줄 뿐이라는 베나티의 주장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해 버리게 되죠.

이러한 현상은 출산 지원금과 같은 출산 장려 정책이 주로 소득 중상위계층에 소구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데이터로 보면, 상위 60~80퍼센트에 해당하는 소득 4분위 계층을 중심으로만 지원 정책에 의해 출산이 증가했습니다. 이 책은 소득 중상위계층이 주로 출산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 경계에 위치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아이를 낳을 여건이 어느 정도는 갖춰져 있는 상태에서 고민하는 계층으로, 여기에 정부 지원금이 일종의 ‘넛지’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고소득층은 의지에 따라 아이를 낳을 자유를 갖습니다. 지원금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소득층은 의지가 있어도 아이를 낳아 양육할 엄두를 못 냅니다. 정부 지원금을 고려한다 해도 말이죠. 그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노동자, 자영업자, 비정규직 등은 육아휴직 등의 제도를 이용하기 어렵거나, 아예 제도에서 소외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소수자의 문제

경제적 계급이 결혼과 출산에의 접근성을 가르는 것처럼 지역적 편차도 비슷하게 작동합니다. 지방에서는 출생아 수가 해당 지역에 분만실 하나를 유지할 수도 없을 정도로 낮아지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더 멀리 있는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는 비율, 출산일을 확실히 할 수 있도록 제왕절개를 선택하는 비율이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연쇄 작용이 도미노처럼 발생합니다.

학생이 줄어드니 지방에서는 학교의 규모가 줄거나 폐교가 생깁니다. 지방 대학의 존립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교육 환경이 나빠지는 겁니다. 지역의 소상공인, 임대업자 등 지역 주민들의 경제생활도 타격을 입습니다. 도시 경제가 쇠락을 겪으면서 일자리가 사라지고 청년이 빠져나갑니다. 지역 불균형은 더욱 심화합니다.

더욱 큰 문제는 우리 사회 전반에서 아이들이 소수집단이 되고, 청년들이 소수집단이 되면서 겪게 되는 변화입니다. 특히, 유권자 중 고령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고령자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현상을 저자는 경계합니다. 전체 인구에서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질 때 연금제도가 고령자에게 더 유리해진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저자는 고령자가 미래 세대의 이익과 자신의 현재 이익이 충돌하는 문제에서 미래에 한 표를 던질 수 있을 것인지 질문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제시하는 궁극적인 저출생 해결 방안이 과연 실현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태어난 아이가 건강하고 생산적인 사람으로 자라나서 각자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게 되어야 그럴 수(재앙적 미래를 막을 수) 있다.”

결국, 청년이 안정적인 삶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쪽으로 정책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는 것인데, 이미 언급된 것처럼 정치적으로 청년층의 목소리가 고령층을 압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 경우 정부가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 방향을 잡아야 하겠죠. 불행히도 선거 결과에 따라 정권이 결정되는 현재 시스템하에서 고령층에게 불리한 정책을, 설득을 통해 밀어 붙일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런 논의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논의는 이미 정치적 소수 계층이 된 청년층에게 고통은 적고 행복은 많은 사회를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저출생에 관한 담론의 본질이 이것입니다. 저자가 강조한 것처럼 “좋은 정치와 정책의 조건은 ‘사람의 변화’를 성공의 필수 조건으로 두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는 논의 중입니다.
bkjn book review는 단순 서평이 아닙니다. 원전을 해체해 다른 책, 기사, 논문과 연결합니다. 매월 한 권의 책을 리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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