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품에 안긴 러시아
완결

역전된 중·러 관계와 요동치는 중앙아시아

푸틴의 중국 포용 정책이 러시아를 덫에 빠뜨렸다

구소련 붕괴 후 독립한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샨베(Dushanbe)에 위치한 관료궁(The Palace of Officers)은 도시를 방문한 고위 관리들이 묵는 호텔로 기능한다. 이 건물은 색깔이 입혀진 창문과 보랏빛 네온사인, 그리고 훌륭한 중식당으로도 유명하다. 중식당에 놀랄 필요는 없다. 이 화려한 건축물은 중국 인민 공화국이 건설해 타지키스탄 국방부에 기증한 것이다.

중국의 선물은 더 있다. 인상적인 새 대통령궁과 현재 건설 중인 의회는 중국 공산당이 무료로 제공한 건물들이다. 한 서방 외교관은 중국이 선물한 타지키스탄 외무부의 음성 사서함 시스템이 중국어로 연락하는 관계자들과의 대화에 쓰였다고 회상했다. 중국은 학교를 지어 주고, 도로를 깔아 주고, 터널을 뚫어 줬으며, 타지키스탄 외채의 절반에 가까운 13억 달러(약 1조 5500억 원)를 빌려줬다. 그리고 중국은 타지키스탄에서 금과 은을 채굴하고, 대형 석탄 연소 열병합 발전소를 통해 난방을 공급하고 있다. CCTV와 교통 카메라도 제공했다. 반짝거리는 두샨베의 경찰차에는 ‘중국 지원(China Aid)’이라고 쓰인 로고가 박혀 있다.

타지키스탄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만큼 천연자원이 많지 않아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빈국으로 꼽힌다. 게다가 내전으로 더욱 쇠약해졌다. 타지키스탄에서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타지키스탄보다 잘사는 이웃 국가들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이 같은 호의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중국은 자국 내 무슬림을 탄압하고 억류하고 있다. 타지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접경 지역인 신장 자치구에 집단 거주하는 위구르족이 대표적이다. 중국이 자치구 주변의 무슬림 국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은 납득이 되는 일이다. 또한 중국의 신(新)실크로드 구상, 일대일로(The Belt and Road Initiative·BRI)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는 과거와 같은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은 중앙아시아에 침투하고 있다. 전직 타지키스탄 관료는 “중국은 과거 소련이 했던 일들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련의 계승자인 러시아에게 중국의 진출은 무엇을 의미할까. 러시아는 특히 군사적인 측면에서 19세기 제정 러시아 시대 황제들이 식민화했던 중앙아시아를 자국의 뒷마당쯤으로 여긴다. 이런 이유로 타지키스탄도 러시아가 주도하는 집단 안보 조약 기구(CSTO)에 가입했다.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관심이 투자 영역에 머무르는 한 러시아로선 감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2016년, 혹은 그 전부터 중국 군대는 와칸 회랑(Wakhan Corridor, 타지키스탄과 파키스탄을 분리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지역)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타지키스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해 말 중국은 타지키스탄 군대와 기동 훈련을 개최했는데, 타자키스탄의 일부 젊은 장교들은 중국 상하이에서 훈련을 받기도 했다.

중국과 타지키스탄은 중국군의 주둔 사실을 부인한다. 제복을 입은 중국군은 타지키스탄의 무르고프(Murghab) 마을 근처 중국 전초 기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워싱턴포스트 기자에게 “당신은 여기에서 우리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사관 소속 군 무관들은 알렉산더 대왕 시대부터 ‘세계 제패 전략’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파미르 고원에서 수십 명의 중국 군사들, 군사 훈련소, 그리고 경비 초소를 발견했다.

싱크탱크인 카네기 모스크바 센터의 알렉산더 가브예프(Alexander Gabuev) 중국 연구원은 중국의 늘어난 군사 활동이 러시아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인도 외교관이 지적했듯 러시아가 불만을 제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러시아는 중국에 맞설 수 없다. 중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불만을 제기하는 대신 세를 과시했다. 러시아는 2018년 보란 듯이 가장 현대화한 장비를 타지키스탄으로 가져가 중국의 훈련 지역과 가까운 위치에서 기동 훈련을 실시했다. 세르게이 쇼이구(Sergei Shoigu) 러시아 국방장관은 최근 7000명의 병력을 보유한 러시아 최대의 해외 주군 부대인 제201 차량 소총 사단(201st Motor Rifle Division)을 점검하기 위해 타지키스탄을 찾았을 때, 두샨베의 관료궁에 들렀다. 그는 식당 벽에 자랑스럽게 걸려 있는 사진 속 중국 지도자 시진핑 주석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오리와 당면을 먹기 위해 이곳에 들렀는지도 모른다. 주방장은 그의 수행단처럼 보였다.

이 외진 지역의 군사 태세는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친선 관계 이면에 깔린 긴장감을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과의 친선 관계 조성을 위해 노력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런 전략을 공식화해 왔다. “최근 수년간 중국의 직접적인 참여 덕분에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는 전례 없이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 지난 6월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1000명의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연례 경제 포럼에서 푸틴 대통령이 한 말이다.

“러시아는 내가 가장 많이 방문한 국가이며, 푸틴 대통령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료다.” 시 주석은 화답했다. 그들은 모스크바 동물원을 산책하면서 과거 중국이 신뢰의 상징으로 대여한 판다 두 마리를 살펴봤다. 러시아 어린이들은 중국어로 인사하며 시 주석을 환영했다. 70년 전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의 영원한 우정을 기리기 위해 쓴 노래 “러시아와 중국, 형제여 영원히”를 실제로 부른 사람은 없었다.

“양쯔강의 목소리가 볼가강에서 들린다.
중국인들은 크렘린궁의 빛을 본다.
우리는 군사의 급습이 두렵지 않다.”

그러나 누군가 이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도살업자들처럼 푸틴 대통령과 시 주석은 공동의 적으로 인해 뭉쳤다. 미국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적대감과 생사를 걸었던 과거의 전투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하나는 냉전(The Cold War)이 어느 쪽의 국가 모델이 세계의 미래를 보여 주느냐를 걸고 벌이는 싸움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대치는 단 하나의 미래가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러시아와 중국은 문명의 차이를 내세워 권위주의를 정당화한다. 그들은 그들의 가치가 보편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서구의 가치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좀 더 현실적으로 얘기하면 1949년의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던 후배 파트너였다. 지금의 시 주석은 거의 모든 카드를 들고 있다. 1989년 말 소련의 국내 총생산(GDP)은 중국의 두 배 이상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GDP는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러시아의 6배나 크다. 러시아는 중국 수출 시장에서 10위를 기록하고 있다. 필리핀보다는 조금 높지만 인도보다는 한참 아래다. 반면 중국은 러시아 수출 시장에서 유럽연합(EU)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은 러시아 석유를 가장 많이 구입하는 국가다.
가까운 관계/ 러시아의 중국 교역량/ 십억 달러/ 상호 교역 총량/ 석유 수출/ 출처: 레피니티브 데이터스트림, 유엔 컴트레이드
이러한 경제적인 비대칭성은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미친다. 서방의 외교관이 중국 관료에게 타지키스탄에 중국군을 주둔시키는 방안에 러시아가 동의했는지를 묻자, 중국 관료는 “우리 역시 러시아와 교역한다”고 답했다. 러시아가 이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듯했다. 그러나 두 국가 간의 변화한 역학 관계는 경제적 차원을 뛰어넘는다. 중국을 대하는 푸틴 대통령의 방식은 기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러시아를 이웃 국가에 의존하게 만들고 있다. 러시아 야당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Alexei Navalny)는 이렇게 지적한다. “지금 푸틴 대통령의 방식은 분명히 러시아의 차기 지도자를 현행 중국 정책의 인질로 만들 것이다. 러시아의 미래 지도자가 중국과의 협력 관계를 러시아에 유리하고 러시아 국민에게 지지받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대중적 지지와 관련한 문제는 양국의 관계에서 두 번째 비대칭성을 드러낸다. 중국에게 러시아와의 관계는 하나의 대외 관계다. 중요하고, 복잡하지만 국정 운영과 관계된 문제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새롭게 형성한 중국과의 친밀함이 국가 정체성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러시아의 엘리트들은 수 세기 동안 서방 국가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해 왔다. 중국의 궤도에 진입한 첫 번째 유럽 국가가 되는 일은 그 역사를 정반대로 뒤집는, 심지어는 부정하는 일이다.

 

라스콜니코프[1]의 꿈


17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러시아를 지배하는 세력은 유럽의 권력이 되겠다고 결심해 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러한 선택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도시다. 러시아는 개종에 대한 열정으로 아시아의 전통은 거부했다. 독일 혈통인 예카테리나 2세는 유럽에서 터키를 몰아내고 중국을 길들이며 인도와의 무역을 개방하겠다고 선언했다. 19세기 러시아의 서방 사람들은 중국을 경기 침체, 관료주의, 부패 그리고 폭정의 상징으로 인식했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정복하면서 동방으로 세를 넓힐 때, 러시아는 유럽의 열강이 아시아를 근대화하고 있다고 자각했다.
공산주의 사상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칼 마르크스는 사적 재산 소유권의 부재와 중앙 집권적인 전제 국가로 상징되는 “아시아적 생산 양식(Asiatic mode of production)”을 내세웠다. 여기에 열광한 사람들은 혁명적인 러시아가 자본주의적 시스템뿐 아니라 중앙 집권 체제를 완전히 없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에서 유럽이 오랫동안 차지해 왔던, 진보의 모범으로서의 자리가 아시아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스탈린은 중앙 집권적인 전제 국가 자체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지만, 여전히 아시아의 공산주의 체제를 지지해야 할 세력이라고 여겼다. 그는 마오쩌둥이 티베트와 신장 자치구를 점령하는 것을 돕고 그를 동맹으로 편입했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 관계는 악화했다. 흐루쇼프(Khrushchev)[2] 해빙기, 중국은 재건되지 않은 과거였다. 마오쩌둥은 러시아를 수정주의 세력이라고 평가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국경을 따라 소련과 중국 군대가 수차례 충돌했다.

소련이 붕괴한 후 완전한 서방 세력을 꿈꾸는 ‘러시안 드림’은 완벽하게 부활했다. “우리의 원칙은 분명하고 간단하다. 민주주의, 인권과 자유, 법치 및 도덕적 규범 지상주의다.” 1992년 유엔에서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 유럽과 공조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동양에 대해서는 이런 우호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사상 측면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다르지만, 우리는 이웃이고 협력해야 한다.”

1990년대 들어 상황은 틀어졌다. 러시아가 도입한 자본주의는 경기 하강과 올리가르히(oligarchs)[3]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러시아의 반대에도 나토(NATO)군이 세르비아 공습을 단행하면서 슬라브족의 자존심에도 금이 갔다. 하지만 옐친 대통령이 강조해 왔던 공통의 가치를 전혀 믿지 않는 푸틴 대통령이 세를 얻었을 때, 그는 여전히 서방을 러시아 현대화의 표본으로 간주했다. 서방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그는 발트 제국이 나토군에 합류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고, 2001년 9·11 테러 이후에도 적절한 반응을 보이며 제대로 대처했다.

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의 알렉산더 루킨(Alexander Lukin) 등 러시아의 서방 비평가들은 푸틴 대통령의 이런 정책이 얻은 것은 없이 도발만 불러왔다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과정에서 러시아의 영역을 침범당하고, 음모론에 휘말렸고, 인권 침해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루킨은 중·러 관계를 다룬 책에서 이렇게 썼다. “국제법에 입각해 새로운 세계 정치 시스템을 만든다는 아이디어를 망친 것은 서방이다. 일시적인 전능함을 이용해 강대국들이 무자비하게 착취하거나 국경을 파괴하고, ‘정당한 이유’를 들어 어떤 조약이든 위반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든 것도 서방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러시아가 중국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서방이 러시아를 포용하는 데에 실패한 결과다. 그리고 러시아는 중국과 가까워지면서 문명화된 세계에 동화되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1994년 러시아의 시장 개혁을 설계한 이고르 가이다르(Yegor Gaidar)는 러시아가 서방과 우호 관계로 돌아설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주장했다. 우선 국가 자원을 동원해서 서방과의 틀어진 과거를 회복할 수 있다. 표트르 1세가 집권기부터 1930년대까지 엄청난 인건비를 지불하고 취했던 방식이다. 기업가 정신을 촉진하거나 장기적 정상을 모색하는 일종의 기관을 만들어 ‘국가 길들이기(taming the state)’를 하는 것으로 진정한 서방 세계의 일원이 될 수도 있다.

가이다르는 만약 러시아가 두 가지 가운데 무엇도 택하지 않는다면, 대안으로 동방을 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이다르는 고대 중국 정치인 상앙(商鞅)의 경구를 요약하며 이렇게 말했다. “인민이 약할 때, 국가는 강하다.” 푸틴 대통령의 좌우명이 될 만한 말이다. ‘밀레니엄 선언’에서 푸틴 대통령은 국가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단도직입적으로 천명했다.

 

아시아 정치 모델


푸틴 대통령의 안보 체계를 이끄는 총독들, 이른바 실로빅(siloviki)[4]들은 민간 기업들을 불법으로 전용한다. 민간 기업들의 자산은 푸틴의 측근들에게 재분배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중국 투자의 수혜자가 된다. 카네기 센터의 가브예프 중국 연구원은 “중국에서 투자로 들어온 돈 가운데 알짜는 푸틴의 친구들에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서방에 러시아 석유를 팔아 134억 달러(약 15조 8000억 원)를 축적했지만 미국의 제재로 유럽에서 축출된 겐나디 팀첸코(Gennady Timchenko)는 현재 푸틴 행정부의 러·중 기업인 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다.

러시아의 지대 추구 사업자와 그들의 단기적인 이익은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싱크탱크인 러시아 국제 문제 연구소(RIAC)의 안드레이 코르투노프(Andrei Kortunov) 소장은 “가끔은 중국에 대한 러시아 정책이 크렘린궁 거물들이 흥미를 가지는 로비 활동에 따라 설계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반대로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중국의 민간 기업들은 러시아 투자를 꺼린다. 일부는 미국의 제재에 두려움을 느낀다. 일부는 재산 소유권과 명확한 규칙이 부재한 상황을 우려한다. 러시아에서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선 중국 사업가들이 ‘바오후산(保护伞)’이라고 부르는 보호막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실로빅들이 제공한다. 러시아처럼 작은 시장을 위해 왜 이런 수고를 해야 할까? 여기에 역설이 있다. 러시아 정권은 동양을 선택했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과 투자자들은 러시아가 서양의 일부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다. 투자자들은 연줄이 아니라 법규를 원한다. 관광객들은 투바 자치 공화국이 아니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보고 싶어 한다.

사업가들은 소련의 붕괴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을 수 있지만, 중국 공산당의 관료들은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보고 있었다. 공산주의 초강대국이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부 불만에 의해 붕괴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1989년 천안문 광장 민주화 시위대가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에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소련의 붕괴는 중국이 무슬림 거주 국경 지역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서방의 지배 구역이 캐나다 밴쿠버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확장될 가능성까지 있었다.

따라서 중국의 주요 임무는 안심한 러시아가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최대한 중국에 우호적으로, 최소한 중립적으로 완충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중국은 약한 이웃 국가는 원치 않는다. 그러나 너무 힘센 이웃 역시 원치 않는다. 중국은 투자했고, 이익을 취했으며, 석유와 무기를 사들였다.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미국과의 관계상 추가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러시아와 같은 편에서 투표하는 경향이 많았다. 예를 들어, 중국은 러시아가 크림반도와 합병할 때도 이를 비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대신 중국은 이익을 취했다.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침공은 가까운 장래에 있을지도 모를 러시아와 미국의 연대 가능성을 제거했다. 푸틴 대통령의 결정은 중국에 대한 서방의 관심을 러시아로 돌렸다. 동시에 러시아를 중국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 2014년 5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몇 주 후 푸틴 대통령과 기업가 수행단, 관료들은 새 동반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날아갔다. 합의안에는 극동 지역에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는 4000억 달러(약 470조 원)에 이르는 30년짜리 가스 공급 계약 ‘시베리아의 위력’ 프로젝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올해 말부터 가동된다. 러시아와 중국은 또 액화 천연가스(LNG) 시장 공략을 위해 북서 항로를 개척하는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중국이 석유 기업에 투자하는 경우 적용되었던 비공식적 규제들은 완화되었다. S-400 방공 미사일 시스템을 포함한 러시아의 비핵 무기 전반을 이제는 베이징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일대일로 관련 인프라/ 실선: 건설 완료/ 점선: 계획 또는 건설 중/ 적색: 철도/ 흑색: 송유관/ 청색: 가스관/ 출처: MERICS
이러한 의존성을 동맹 관계로 오해해선 안 된다. 러시아 선전 운동가들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중 간 무역 전쟁에서 갈등을 부채질하고, 러시아를 미국의 공세에 대한 동료 희생자로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동맹과 적국, 양쪽을 모두 회피하는 공식 입장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는 미국과의 관계다. 우리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실수를 되풀이하길 원치 않는다.” 펑위쥔(冯玉军) 푸단대 러시아·중앙아시아 연구 센터장은 “러시아는 중국이 러시아에 의존하는 것보다 더 많이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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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동맹을 원치 않는다면, 러시아의 의존성을 즐기는 현 상태의 지속을 원할 것이다. 러시아는 곧 서방으로 고개를 돌릴지도 모른다.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계승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크렘린궁 내부의 권력 변화로 전환이 일어날 수도 있다. 시베리아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중국에 대한 대중의 반발이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다. 한 서방 외교관은 “러시아 사회에서 중국이 갖는 의미의 심리적인 한계선을 침범하는 경우에는 러시아가 중국을 밀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가브예프 연구원은 중국이 이러한 역전 상황으로부터 러시아의 관심을 안전하게 돌리기 위해 러시아의 정치권에 강력한 친중국 로비 세력을 만들어 내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시에 러시아에서 벌어질 어떠한 정치적 변화에도 살아남을 구조적인, 하드웨어 차원의 의존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에너지 부문에서 중국은 러시아의 가장 귀중한 자산에 대한 접근권을 갖고 있다. 중국의 국영 에너지 기업은 팀첸코가 일부 소유하고 있는 에너지 회사 노바텍(Novatek)이 개발하는 북극 LNG 프로젝트의 지분 5분의 1을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 석유 회사들이 사용하는 시추 장비의 거의 절반은 중국에서 온다. 중국은 기업 인수 과정에서 도움을 주거나, 대규모로 석유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인 로즈네프트(Rosneft)를 지원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과 시 주석은 미국의 제재를 피할 목적으로 위안화와 루블화로 이뤄지는 양국 간 교역량을 늘리는 데 합의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의 위안화 규모는 전체 외환 보유액의 14퍼센트를 차지한다. 위안화는 다른 통화와 완전하게 호환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가브예프에 따르면 러시아의 위안화 보유 비중은 다른 나라 중앙은행에 비해 10배나 크다.

기술 분야에서도 러시아의 중국 의존도는 커지고 있다. 미국이 거래 제한 대상으로 지정한 중국의 화웨이는 러시아에서 5세대 이동 통신 장비를 출시했다. 중국 최대 전자 상거래 업체 알리바바는 러시아 최대의 소셜 미디어 네트워크를 보유한 Mali.ru와 조인트 벤처를 설립했다. 최근 의회에 제출된 ‘인터넷 주권’과 관련한 러시아의 매우 엄격한 법은 중국의 법안을 본떴는데, 러시아는 중국 기술을 적용해 법안을 실행하기를 원하고 있다. 다화 기술(Dahua Technology)은 러시아에 안면 인식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하이크비전(Hikvision) 카메라는 모스크바 시민들을 지켜보고 있다. 진보 성향 정치인인 그리고리 야브린스키(Grigory Yavlinsky)는 최근 기고문에서 이런 거래들이 러시아를 “중국의 위성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라며 “미국을 의식해 이러한 거래를 계속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근시안”이라고 비판했다.

러시아가 사용하는 중국 기술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언론인 레오니드 코바치치(Leonid Kovachich)는 러시아 관료들이 중국의 침투와 관련한 보안 위험을 인지하고 있고, 러시아산 소프트웨어와 알고리즘을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중국 하드웨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푸틴은 인공지능(AI) 시장을 점령하는 국가와 기업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러시아는 거의 모든 AI 기술을 중국에서 들여올 가능성이 크다.
거대한 도약/ 명목 GDP/ 1조 달러/ 구매력 평가 지수 기준/ 중국/ 러시아/ 출처: IMF/ 2019년은 전망치
관계의 비대칭성과 모순은 중앙아시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1990년대 말 설립된 상하이 협력 기구(SCO)를 생각해 보라. 중국은 상하이 협력 기구가 중앙아시아에서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넓히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상하이에 있는 이 기관은 타지키스탄 및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관료가 교육을 받는 곳이다. 러시아는 중국의 중앙아시아 확장 계획을 점검하는 수단으로 이 기관을 활용하고 있다. 러시아가 2년 전 인도와 파키스탄의 상하이 협력 기구 가입을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집단 안보 조약 기구(SCTO)를 설립하고 ‘유라시아 연합’을 구성하면서 상하이 협력 기구 안에서 자유 무역 지대를 지정하려는 중국의 시도를 저지하려고 했다. 한 인도 외교관은 이에 대해 러시아 시장에서 중국 상품들이 넘쳐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중국에 큰 적대감을 느끼지 않고 있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상하이 협력 기구를 러시아에 대항하는 안전 보장 조치의 하나로 간주했다.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에 보였던 적대감과는 대조적이다. 러시아에 대한 불안감은 중앙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부유하고 러시아와 가장 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카자흐스탄에서 두드러진다.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카자흐스탄은 1994년 미국, 영국, 러시아가 영토 보전과 통치권을 약속한 대가로 소련의 핵무기를 포기했다.

20년 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은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Budapest Memorandum)[5]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냈다. 합병 이후 수주 만에 카자흐스탄의 첫 번째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Nursultan Nazarbayev)는 시진핑 주석에게 카자흐스탄의 안보를 보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러시아를 달래기 위해 다소 규모를 줄인 형태의 유라시아 연합에 가입했다. 카자흐스탄의 협상가 중 한 명은 이에 대해 “러시아는 단일 통화와 단일 의회를 가진 정치적, 경제적인 연합체를 원했다. 우리는 간신히 이를 희석시켰다”고 말했다.

 

작은 용들


러시아와 중국이 중앙아시아에 접근하는 방식에는 두드러지는 차이가 있다. 러시아는 채찍을 휘두르는 반면 중국은 당근을 제공한다. 중국은 중앙아시아의 엘리트 조직을 장악하고, 강도를 더해 가는 중국 내 무슬림(위구르족뿐 아니라 카자흐인까지 포함한) 탄압을 상쇄하기 위해 상당히 지저분한 종류의 소프트파워 전략을 모두 동원하고 있다. 이 가운데 관대한 이웃처럼 가장하는 연기 전략은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이 유엔과 이슬람 협력 기구(OIS)에서 중국 내 무슬림 자치 지역에 대한 탄압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중앙아시아 정부를 찾았을 때, 어느 나라도 나서지 않았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활동가들이 신장 자치구의 재교육 수용소 경험을 폭로하려고 하자 이들을 구속하기도 했다.

카자흐스탄의 한 고위 관리는 “러시아는 여전히 우리를 제국의 일부로 보고 있으며, 우리의 신뢰를 얻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중국은 ‘동지들’에 대해서 얘기하는 반면 러시아는 제삼자와의 대립을 의미할 수 있는 ‘동맹’에 대해 얘기한다”고 말했다. 이런 우호 관계는 역사적인 역설을 잘 알고 있는 여러 국가의 엘리트들에게는 의미가 크다. 19세기 중앙아시아는 그대로 남길 원했지만, 러시아는 강제로 서구화를 요구했다. 오늘날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의 현상 유지를 바라지만, 중앙아시아 엘리트들은 서구화를 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과의 우정이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보고 있다.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정부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 연합과 집단 안보 조약 기구에서 뒷걸음질 치고 있지만, 중국이 2013년 카자흐스탄에서 발표한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경제 발전 기회와 안보 보장이라고 평가하며 포용하고 있다. 육지에 둘러싸인 카자흐스탄을 통과하는 실크로드 노선을 부활하자고 처음 제안한 것은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었다.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대륙의 한가운데에 있다. 바다로 가는 길도 막혀 있다. 그러나 (중국의) 한 사업가가 말했듯 중국은 우리의 대양이다.”

러시아와 달리, 중국은 말을 행동으로 보여 주고 있다. 2년 전 중국 원양 운수 집단은 카자흐스탄의 광대한 내륙 항만이자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핵심 지역인 접경 도시 호르고스(Khorgos)의 지분 49퍼센트를 취득했다. 그 후 몇 개월 만에 이 도시의 중국 쪽 접경 지대에는 쇼핑 센터, 관람차, 고층 주택과 위구르 식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국은 중앙아시아를 신장 자치구 안정화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중국의 외교 정책이 러시아를 규범적인 공간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 가늠하는 시험장이기도 하다.” 영국 런던 소재 싱크탱크인 왕립 합동 군사 연구소의 라파엘로 판투치(Raffaello Pantucci)의 분석이다. 과거 20년 동안 중국은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송유관 독점을 깨뜨려 왔다. 러시아의 송유관 업체인 트랜스네프트(Transneft)는 카자흐스탄의 석유 흐름을 통제해 왔지만, 지금 카자흐스탄은 2009년 건설된 새로운 송유관을 통해 중국으로 석유를 수출한다. 판투치는 “중국은 이 지역 전체를 재편했다. 과거 모든 노선은 모스크바로 향했다. 이제 모든 길은 베이징으로 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여전히 중앙아시아에서 문화적, 언어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이주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고, 언론과 정보 영역을 통제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정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한 서방 외교관은 “당신이 건물주라면 세입자가 누가 되든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균형추의 변화는 키르기스스탄 도시인 오시(osh) 중심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팔을 뻗고 있는 거대한 레닌 상 근처에는 중심 광장을 장악한 새로운 랜드 마크가 있다. 시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상하이시티 호텔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서른 한 살의 아지즈벡 카라바예프(Azizbek Karabaev) 매니저는 2000년대 초반 러시아에서 일했다가 2012년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중국에서 호텔 경영을 공부했다. 상하이시티 호텔은 중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언어 강습도 제공한다. 카라바예프는 “이곳에선 중국어 통역에 대한 엄청난 수요가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여섯 살 아들 아딜크한(Adilkhan)은 러시아어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지만 유창한 표준 중국어를 구사한다. 아딜크한은 중국어 이름도 갖고 있다. ‘왕샤오룽’. 작은 용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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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경제 #정책 #중국 #러시아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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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2]
스탈린의 권력 남용 등을 비판한 개혁주의 정치인
[3]
올리가르히(oligarch)는 고대 그리스에 존재한 소수자에 의한 정치 지배(과두 정치)를 뜻하는 ‘올리가키(oligarch)’의 러시아어다. 이들은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소련이 30가지 경공업 분야에서 개인 사업을 허용하면서 등장했다. 일종의 정치-경제-언론 융합 과두 세력이다.
〈올리가르히〉, 《네이버 지식백과》
[4]
정보 당국이나 군 출신의 러시아 정치인
[5]
우크라이나가 소련에서 독립할 때 미국, 영국, 러시아가 서명한 문서. 소련으로부터 물려받은 핵무기를 포기할 경우 주권과 영토 보전을 존중(respect)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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