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는 슬럼프로 만들어진다
11화

자기 결정성; 나 자신을 믿고 스스로 결정하라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한다.” 2006년 11월 16일 김포공항을 통해 11개월 만에 귀국한 이승엽의 한마디다. 당시 일본 프로 야구 리그에서 뛰고 있었던 이승엽은 메이저리그 진출 대신 요미우리 자이언츠 잔류를 선택한 소회를 털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바 롯데 소속으로 일본 무대에 데뷔한 이승엽은 2004년의 저조한 성적, 2005년의 절반의 성공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2006년, 일본 진출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메이저리그 진출은 힘들지 않겠냐는 질문에 그는 말했다. “상황에 따라 안 될 수도 있지만 절대 포기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바라는 팬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있다. 그러나 일본 선수들은 36~37세에도 꿈을 위해 빅 리그(메이저리그)에 도전한다. 나중이라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해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한다.”

자기 결정성은 개인의 의지를 사용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강점과 한계점을 수용하고 외부의 영향력을 인지하면서 스스로 욕구 충족 방식을 결정할 것을 요구하는 힘이다. 따라서 자기 결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1] 프로 야구 선수는 일반인에 비해 이른 시기에 진로를 결정하고 야구라는 한길을 20년 이상 걸어온 사람이다. 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중요한 결정에 대해 스스로 선택했고, 자신이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그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수용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인지적, 행동적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심리학적 용어가 자기 결정성이다. 자기 결정성이 높은 사람은 성찰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레전드들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스로가 찾는 것이고, 내가 잘만 하면 어떤 선수도 상대할 수 있으며,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주변 사람을 만나는 인복조차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자기 결정적 특성은 슬럼프를 극복하는 과정 전반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하고 문제 해결책을 도출하는 핵심적인 자원이 된다.

박정태는 데뷔 3년 차였던 1993년 5월, 경기 중 슬라이딩을 하다 발목뼈가 산산조각 나는 부상을 당했다. 한순간의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것만 해도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이대로라면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하다는 병원의 소견이었다. 모두가 박정태의 성공적 복귀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욕심이 앞서서 경기에서 신중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 그리고 시즌 초반의 좋은 성적을 끝까지 이어 나가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통감했다. 이처럼 자기 결정성이 높은 사람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따른다. 그리고 그 결정이 원치 않은 결과를 낳더라도 결코 상황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결정에 따르는 책임 또한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재활이 시작되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몸을 만든다는 건 프로 선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스트레칭부터 근력 강화 훈련, 유연성 훈련까지 단계별로 재활을 시작했다. 의지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극한의 고통에 직면했을 때도 박정태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재활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수술한 다리가 아프더라구요. 인생도 어느 정도 선까지 오면 그걸 극복을 해야 하거든요. 우리 운동선수들이 실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는 거는, 그 고통을 넘어서야 되거든요. 남들은 힘들게 보죠. 누가 봐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물러서지 않고 뛰어넘을 때. 혼자예요. 내가 해야 하죠.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어느 누구도 그 선까지는 와요. 그런데 그 선을 넘어서면 이기는 거고, 못 넘어서면 지는 거죠.
 
송진우는 힘든 상황에서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철학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은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형성되고 견고해지는 것임을 강조했다.
 
(Q: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하는 것도 중요한 것 아닐까요?) 그런데 뭐… 너무 많이 들어 버리면 자기 것이 없잖아요. 이쪽저쪽 얘기를 다 받아들이면.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철학은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거 없이 ‘이쪽에서 얘기하면 이쪽, 저쪽에서 얘기하면 저쪽, 그러면 그 또한 더 힘든 길로 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거든요. 물론 얘기를 듣고 취합을 해서 나한테 좋은 거다, 하면 괜찮긴 하지만… 속된 말로 귀가 얇으면 자기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거를 것은 거르고 해서, 결국 결정은 본인이 하는 거죠, 본인이.
 
송진우는 인터뷰 과정에서 자기 효능감이 드러나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자기 효능감이란 자신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다고 믿는 기대와 신념이다.[2] 자기 효능감은 성공 경험을 통해 증진될 수도 있지만 실패 경험으로 인해 약화될 수도 있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성공 경험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실패한 일을 더욱 크게 받아들이고 좌절하기도 한다. 송진우는 성공 경험을 통해 축적된 자기 효능감이 슬럼프를 극복하는 과정 전반에 걸쳐 두드러지게 나타난 경우다. 어린 시절부터 투구 폼에 대해 끊임없이 부정적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맞서 뛰어난 수행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것도 자기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송진우라고 해서 실패 경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KBO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개인 통산 200승을 넘긴 투수로 그를 기억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통산 153패로 리그 역사상 가장 많이 패배한 투수이기도 하다. 인터뷰 도중 네 번의 한국 시리즈에서 모두 준우승에 그쳤던, 자신과 한국 시리즈의 악연을 얘기할 때다. 과거의 그런 기억들이 큰 경기에 임할 때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승리에 대한 중압감을 떨쳐 버리는 것, 실패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도,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오는 것도 모두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일에 대한 긍정적 보상도 부정적 대가도 결국 다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드시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가 만든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긍정적 생각과 자기 결정적 태도는 그가 실제 수행의 향상을 이끌어 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21년간의 프로 선수 생활 동안 153번 패했지만, 동시에 210번을 이길 수 있었다.

송진우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경험이 없었다. 작은 부상은 조금씩 있었지만 시즌을 거른 적도 없고 매 시즌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유지했다. 1년의 절반은 원정 경기를 치르며 부상의 위험과 치열한 경쟁을 이겨 내고 생존해야 하는 프로 세계에서 21년이라는 세월을 한결같이 마운드에 섰다는 것은 보통 정신력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송진우는 부상 없이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관리 비결을 묻자, 오히려 “부상 같은 것은 신경 안 쓰고 막 운동했다”고 답했다. 그는 야구를 잘하기 위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고 내던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몸도 마음도 더욱 단단해지고 강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 결과와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라는 자기 결정적 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송진우는 다른 레전드보다 훨씬 자신만만하다는 느낌이었다. 상대방에게 비치는 자기 모습이나 평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가 던지는 질문을 그대로 수긍하기보다는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표현했다. 주변의 존경과 찬사를 당연히 받아들이지도, 우려와 비난에 위축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경기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송진우는 경기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홈런 한번 맞는다고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전날 패배하더라도 이것이 다음 날의 경기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이 세운 목표를 이뤄 낼 수 있는 원동력 역시 자기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결국은 “연습밖에는 없다”고 했다. 남들 한 시간 연습할 때 두 시간 연습해야 자신에 대한 믿음을 쌓을 수 있고 동시에 이길 수 있는 실력이 갖춰지며, 이를 경기에서 확인함으로써 그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 결정성을 근간으로 다져진 자기에 대한 믿음은 슬럼프로 인한 고통의 정도를 완화하고, 슬럼프 극복을 위한 목표 설정을 용이하게 하며, 슬럼프를 극복함으로써 더욱 강화된다.

김용수는 힘들어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면 일단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도전한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대로 가야 후회가 없다고 했다. 내 길은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슬럼프 상황에서 주변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자신의 유능성과 자율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전략을 생각해 내는 것이 중요했고, 그것은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자기 결정적 특성은 그가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식, 그리고 슬럼프 상황에 임하는 태도에 영향을 주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했다.
 
제가 가는 길은 제가 결정해요. 제가 가는 길은 다른 사람보다 제가 더 잘 아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시련을 당하더라도 저는 이렇게 가요, 혼자서. 가다 보면 길이 열리더라구요. 자기와의 싸움에서 문제 해결은 결국 자기가 하는 거예요. 의논하지 않고 혼자 고민하다 보면, 그래야 후회가 없어요. 그렇게 스스로가 혼자 파나가다 보니까 어느 순간 문제도 해결이 되더라고요. 아무래도 의지하게 되면, 이 생각, 저 생각… 더 힘들고 외로울지도 모르지만 혼자 해결을 해나가니까, 어찌 보면 오히려 시간도 단축이 되고, 곁눈질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생각해 낸 그거만 보니까요.
 
그동안 내가 만났던 프로 야구 선수 중에는 열심히 연습하고 훈련하는 자신의 모습을 봐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는 코치나 감독에 대해 서운함을 토로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그러나 김용수는 오히려 남이 안 볼 때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했다. 자기에 대한 믿음이 분명한 사람들은 그게 가능하다. 그는 힘이 들수록 스스로 더 채찍질을 한다고 했다. 누군가 그런 자신을 칭찬해도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그냥 스스로에게 박수 한번 쳐주면 그만이었다. 자신의 시련은 결국 본인이 감당할 몫인 것이다. 힘들다면 혼자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건 결국 핑계밖에는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힘든 순간에도 타인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혼자’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주변의 말에 귀를 닫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독선과 아집과는 다르다. 레전드는 개방적인 태도로 주변의 다양한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수렴하되, 결정은 본인이 내렸다. 여기에 대해 어떠한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보통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하소연을 하면 지지, 위로를 해주잖아요. 그게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얼마나 힘들겠냐’ 그러면 심적으로 위로를 받고. 저는 그래요. 그런 말, 위로해 주는 그런 말 자체를 듣기 싫어요. 왜냐하면, 알거든요. 위로의 말, 힘내, 잘하고 있어, 이렇게 하면 될 거야, 어떻게 보면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려고 그러는데. 전 그런 말을 안 해주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왜냐, 그런 말이라는 건 오히려 마음을 약하게 만들거든요. 저는 그래서 그런 말을 잘 안 들으려고 해요. 차라리 ‘나한테 관심 없어? 오케이! 나 혼자서 일어난다는 걸 보여 줄게!’ 결국 그렇게 된 거예요. 저는 지금도 그래요. 위로받으려고 생각하지도 않고, 위로를 받게 된다고 해도, 니가 나도 아니고, 내 자신을 너한테 온전히 다 보여 준 것도 아닌데,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막아 버려요. 그리고 제 생각대로 가요. 해보지도 않고 남의 말을 듣고 행동하면, 나중에는 더 후회가 된다고 생각해요.
 
자신에 대한 견고한 믿음, 누구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을 역경 상황에서조차 타인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하에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기 결정성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가? 야구 선수들은 남들보다 빨리 자신의 인생 방향을 야구로 결정지은 집단이다.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부모나 주변의 권유도 영향을 미쳤지만, 최종 결정은 모두가 본인의 의지로 내린 것이었다. 이들의 자기 결정성은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인생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또 이러한 인생의 방향을 위협하는 수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30년 동안 야구를 해오면서 축적된 값진 자원(asset)이다.
 
상대가 나를 바꾸려 할 때, 나도 바뀌려고 하는 것, 그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다.
스즈키 이치로
[1]
Deci, E.L.,〈The psychology of self-determination〉, 1980.
[2]
Bandura, A., 〈Self-efficacy: Toward a unifying theory of behavioral change〉, 《Psychological Review》, 84, 191-215.,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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