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는 슬럼프로 만들어진다
1화

프롤로그; 17타수 1안타 타자의 역전 스리런 홈런

1984년 10월 9일. 롯데 자이언츠와 삼성 라이온즈, 운명의 한국시리즈 7차전. 3대 4로 지고 있던 롯데의 8회 초 공격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주먹을 꼭 쥐고 중계 화면에 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1사 이후 김용희와 김용철이 연속 안타로 출루하면서 롯데가 1사 1, 3루라는 절호의 찬스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석에 5번 타자 유두열이 들어섰다. 6차전까지 17타수 1안타에 그치며 극도의 부진을 보인 그였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제발 1점만!’ 삼성 투수 김일융이 공을 던졌다. 원 스트라이크 원 볼, 그리고 3구.

“쳤습니다! 좌측! 높게 날아갑니다! 높게 갑니다! 넘어가느냐? 홈런이냐? 홈~런~! 유두열~! 홈런~! 유두열의 스리런 홈런~! 아! 극적인 스리런 홈런입니다!”

누구에게나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더 모먼트(the moment)’가 있다. 내게는 유두열의 스리런 홈런이 지금의 나를 만든 ‘바로 그 순간’이다.

부산이 고향인 아버지는 퇴근 후 늘 맥주 한 병을 앞에 놓고 야구를 보셨다. 야구의 룰도 모른 채 아버지 곁에서 야구를 보며 자란 나는 그렇게 롯데의 창단 후 첫 우승을 지켜보며 롯데 열혈팬이 되었다. 거의 모든 롯데 경기를 보고 비디오로 녹화하고 경기가 끝난 후에는 스포츠 뉴스로 하이라이트 장면을 시청했다. 롯데가 이긴 다음 날이면 스포츠 신문을 사서 흐뭇한 표정으로 경기를 회상하곤 했다.

나는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박사 과정을 시작하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 교수님께서 연구실에 오셔서 말씀하셨다. 야구 심리를 연구해 보면 어떻겠냐고. 그러면서 덧붙이셨다. “이제 우리도 좀 재미있는 걸 해야 하지 않아?” LG 트윈스 열혈팬이신 교수님께서 넌지시 던진 이 한마디에 나는 야구 심리학자가 되었다. 야구 심리학을 연구하면서, 나는 ‘야구’보다는 ‘야구 선수’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이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야구를 하고 슬럼프를 극복해 내는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야(It ain’t over till it’s over).”

뉴욕 양키즈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Yogi Berra)가 남긴 많은 명언 중 하나이다. 1973년 그가 감독을 맡았던 뉴욕 메츠는 내셔널리그 동부 지구 디비전 시리즈에서 초반에 끌려가다가 마지막에 역전 드라마를 썼다. 패색이 짙었던 순간, 요기 베라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의 명언은 “야구는 9회 말 투 아웃부터야”라는 말과도 유사하다. 마치 인생처럼, 야구는 희망이 있는 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분투해야 하는 드라마 같은 것이다. 9회 말, 투수가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기 전까지, 한국시리즈 우승컵의 주인이 정해지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변수와 사건이 야구라는 드라마를 만들어 간다.

이렇듯 끝까지 결과를 알 수 없는 스포츠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스포츠는 객관적 기록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이다. 이긴 것은 이긴 것이고 진 것은 진 것이다. 스포츠 시합의 결과는 모호함이 없다. 선수들이 고통을 견디며 재활을 하고, 전지훈련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시즌 중에도 밤마다 상대 팀 선수를 분석하는 노력과 과정은 모두 결과를 통해 평가받는다. 선수들의 삶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달라서, 마치 대학 입시를 40살까지 계속해서 치르는 것과 같다. 매일매일 경기를 치르고, 매 경기 매 타석 선수들에 관한 수없이 많은 데이터가 쏟아져 나온다. 그 기록들을 바탕으로 다음 시즌의 연봉이 책정되고 방출과 트레이드가 이루어진다.

문제는 선수들이 항상 최상의 결과를 보여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선수들은 항상 역경 상황과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으며 슬럼프에 빠질 위험 역시 늘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슬럼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이다.

LG 트윈스의 투수 ‘노송(老松)’ 김용수는 말했다. 야구하는 그 자체가 슬럼프, 즉 역경의 연속이라고. 역경은 늘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며 우리의 마음을 거꾸러뜨리고 싶어 한다. 야구는 실패의 운동이다. 열 번의 기회 중 세 번 이상만 안타를 쳐도 우수한 타자로 인정받는다. 성공에 대한 칭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이를 받아들이고 겪어 내는 방식이다. ‘이 실패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음에 내가 다시 이런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실패 역시 학습의 과정이다. 그리고 실패는 다음에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열쇠이기도 하다. 어쩌면 실패는 우리가 더 나은 존재로 탈바꿈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수학 문제가 안 풀려서 끙끙대고 있는 딸에게, 나는 동기 연구의 대가인 심리학자 캐롤 드웩(Carol Dweck)의 성장 마인드세트(growth mindset)[1] 개념을 슬쩍 적용해서 얘기해 본 적이 있다. “지운아, 생각한 것처럼 잘 풀리지 않아서 답답하지? 그런데 네가 몰라서 못 푸는 게 아니야. 지금 이렇게 고민하면서 너는 더 똑똑해지는 거야. 힘들어서 안 풀면 그런 기회를 놓치는 거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건 네가 모른다는 게 아니라 더 많이 똑똑해지고 있다는 증거야.” 이 얘기에 우리 딸은 영어 학원에서 배운 숙어가 떠올랐다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 네버 기브 업(never give up)! 나도 포기하지 않고 해볼래.” 이거다!

앞으로 등장하는 레전드의 사례들은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면 나오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성공담은 아니다. 이들이 야구의 슬럼프를, 그리고 인생의 슬럼프를 극복해 내고 레전드로 만들어지기까지의 치열했던 과정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속 깊은 이야기이다. 레전드들을 만나고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나는 마치 이들과 늦은 밤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눈 듯했다. 거듭된 실패로 절망에 빠져 찾아온 후배에게 자기 얘기를 들려주며 어깨를 다독여 주는 선배를 만난 느낌. 책 속의 사례들은 깊은 공감, 눈물, 탄성과 반성을 통해 얻은 그분들의 담담한 기록들이다.

‘이렇게만 하면 야구 레전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는 공식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중에 널린 ‘성공을 위한 ○○공식’을 그대로 따라 한다고 어디 우리가 다 성공하던가?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지금 현재의 내 모습과 미래의 내 모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부상 이후 끝이 보이지 않는 재활 속에서 방출의 악몽에 시달리는 2군 선수들이 왜 포기하지 않고 야구를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기를 바란다. 내가 그랬다.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하고 뒤돌아 후회하던 때, 레전드들과의 인터뷰는 나에게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늘 어린이집 종일반에 늦게까지 남아 있는 둘째에게 “엄마도 일찍 오면 좋겠어”라는 말을 들으며 죄책감에 눈물 흘릴 때, 레전드들과의 인터뷰는 내가 왜 일을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내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비단 야구를 알고, 야구를 하고,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사람들을 포함해,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지금 내 인생을 살아 내는 것도 너무 힘든 사람들, 슬럼프라는 인생의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책이다. 나는 인생의 슬럼프에 빠졌을 때마다 레전드들과의 인터뷰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열심히 살고 있는, 그리고 더 잘살기 위해 노력하는 자기 자신을 다독일 수 있기를 바란다.
[1]
성장 마인트세트(growth mindset)는 인간의 지능이나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고정된 특성이 아니라, 학습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개인의 신념이나 믿음을 의미한다. 성장 마인드세트를 가진 사람들은 실패를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학습하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는 기회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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