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 이끄는 변화, 생활민주화
완결

개인이 이끄는 변화, 생활민주화

개인이 이끄는 변화


개인이 중심이 되어 국가와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개인들은 성폭력, ‘갑질’, 비리 등 일상생활에서 겪는 부당함과 불합리함에 대해 직접 행동하고 변화를 주도한다. 기존의 사회적 변화가 주로 국가, 사회 기관 등에 의해 주도되어 온 것과는 달리, 개인이 국가나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민주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 민주화 이후의 생활민주화(everyday democratization)다.

이런 변화의 시대적 배경은 개인화(individualization)다. 개인화는 일반적으로 경제적 생존 기반의 변화와 함께 경쟁하는 사회로의 변화를 의미한다.[1] 가족 및 친족, 조직 등을 통해 전통적인 안전이 유지되었던 과거와는 달리, ‘모두 알아서 살아남아라. 생존은 너의 선택의 결과다.’라는 생각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2] 개인화 시대의 개인은 불확실성을 견디며 살아야 하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사회적 변화의 동력을 찾기도 한다.

‘개인이 바꾸는 세상’에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정치 민주화에서 생활민주화로의 패러다임 이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3] IT 혁명으로 가능해진 테크놀로지의 민주화, 지식의 민주화, 데이터 민주화, 정보의 민주화가 일상생활 속 깊이 들어오면서 생활민주화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요차이 벤클러(Yochai Benkler)[4]는 생활민주주의가 개인들의 온라인 네트워킹의 산물이라고 본다. 개인들 사이에서 ‘이기주의를 넘어선 협력’이 가능한 것은 네트워크화된 정보 경제가 개인의 실천적 역량을 개선해 일상생활에서의 민주주의의 진전에 기여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5] 비판적, 참여적, 자기반성적 역량을 갖게 된 개인들이 정보 경제의 ‘핵심적 사회 주도 세력’으로 제시된다.[6]

낸시 로젠블럼(Nancy Rosenblum)은 생활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사적 영역이자 개인적, 인간관계의 영역’으로 파악한다.[7] 조직화된 사회적, 정치적 생활이 통합성을 상실하고 의미를 잃었을 때 생활민주주의가 시민들의 민주주의 의지를 지탱한다. 생활민주주의는 정치 생활 밖의, 특정 제도에 구속되지 않는 사회성(sociability)의 경험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활민주주의는 정치 민주주의의 대안이나 정치적 재앙에 대한 보상은 아니다. 대신 공공 생활이 정의롭지 않고 이를 바꿀 영향력도 한계에 달하게 되었을 때, 또는 정부와 정치 그리고 동료 시민들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에 달하게 되었을 때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생활민주화의 성공은 상호성(reciprocity), 발언(speaking out), 사생활 존중(live and let live)에 있다고 로젠블럼은 설명한다. 즉 이웃이 서로 규범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생활민주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웃이 소란, 소음, 괴롭힘 등의 피해를 줄 때 발언하는 것도 생활민주주의의 필수 요소다. 국가의 공식적인 제도가 잘 시행되지 않거나 비효율적이고 효과가 없는 경우, 사회적 압력이 강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생활민주주의는 이웃들이 서로에 대해 ‘도덕적 경찰’ 노릇을 하지 않을 때 발전한다. 좋은 이웃 관계는 개인의 삶에 대한 존중을 토대로 타인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고 타인의 생활을 도덕화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의 이론적 시각을 정리해 보면, 생활민주화는 개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부당함, 부조리에 대항해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이나 개선을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서는 과정이다.

이러한 의미의 생활민주화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문제 제기의 주체가 개인 당사자나 이해관계자라는 것이다. 단체가 아닌 개인이 피해자 또는 고발자나 목격자로서 문제를 제기한다. 정부 기관이나 사회 기관 또는 시민 사회단체가 맡아온 ‘대리자’ 역할을 거부하고 개인이 직접 자신을 대표한다. 정치학자 조희정은 이를 ‘깃발 내려, 나는 내가 대표한다’라는 키워드로 설명한다.[8]

두 번째 특징은 개인이 일상에서 겪거나 목격한 부당함, 부조리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갑질이나 성폭력이 대표적이다. 세월호 참사, 채용 비리, 불법 촬영(몰카) 등도 절대 다수가 인지하고 동의하는 부당함에 해당된다. 개인들은 직접 당사자가 아니지만 간접 피해를 당하거나 ‘나와 내 가족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직접 행동에 참여한다.

셋째는 여러 사람들과의 소통과 공감 또는 집단 지성에 기반한 문제 제기와 공론화 방식이다. 타인과의 공감은 이전에는 친지나 동료 등에 국한되었지만, 이제 온라인에서 자신과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있다. 인터넷, 소셜 미디어 등을 매개로 하는 공감대 형성과 문제 제기가 핵심적인 공론화 방식이다.

네 번째는 직접 행동이다. 과거에는 직접 행동이 노동조합이나 시민 사회단체 등을 통한 조직적 참여 활동을 의미했다. 그런데 생활민주화의 시대에는 개인이 조직을 통하지 않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타인과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 소통하고 공감하며, 집단 지성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 직접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인터넷이나 언론을 통해 피해를 고발하는 행동뿐 아니라 가해자 처벌 등 문제 해결을 위한 법 제정이나 제도 마련을 압박하는 집회나 시위, 국민 청원 등도 일반화되고 있다. 사회학자 김현미는 미투 운동이 ‘성 평등과 문화적 다원주의를 포함한 직접 행동주의’로 새로운 민주주의를 제시했다고 해석한다.[9]

다섯 번째 특징은 인터넷 등 IT를 기반으로 하는 직접 행동이다. 갑질 추방, 미투 운동, 비리 폭로 거의 모두가 온라인에서 개인들의 직접 행동으로 시작되어 언론에 보도되고 사회 이슈가 되는 경로를 거쳤다. IT는 정보를 생산하는 방식과 사회의 지식 기반에 혁명을 일으킨 주역으로 평가받아 왔다. 정보와 뉴스, 지식과 문화, 컴퓨터를 매개로 한 사회적, 경제적 상호 작용이 모든 일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10] IT 등 테크놀로지의 민주화는 지식의 민주화, 정보의 민주화, 데이터 민주화를 가속시켜 지식인과 전문가가 독점하던 지식과 정보, 데이터를 시민들이 쉽고 빠르게 취득하고 공유하게 한다.

마지막은 자발적인 문제 해결 방식이다. 개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부당함에 대해 서로 대화와 소통을 하며 집단 지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생활민주화의 핵심이다. 개인들은 국가나 시민 사회가 정책이나 계획을 수립해 추진되는 대의제 방식을 신뢰하지 않고, 심지어 거부한다. 피해자나 고발자 대부분이 개인 단위로 문제 해결을 위한 직접 행동에 나서면서 정부나 시민 사회에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 특히 미투 운동을 비롯한 페미니즘 운동은 전문가나 국가 제도에 의존하거나 종속되는 것을 경계하며, 개인의 참여와 승인 없는 규정과 개입에 거부감을 갖는다.[11]

생활민주화가 최근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한 데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다. IT 혁명, 촛불 혁명, 직접 행동주의, 국력 신장, 가치관 변화 등이다.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요인들의 중심에 IT 혁명이 있다. 산업화 이후 민주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국력 신장을 통해 IT 혁명이 가능했고 또 IT 혁명으로 국력이 신장되고 있다. 국력 신장과 IT 혁명이 있었기에 생활민주화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IT 혁명이 이끄는 온라인에서 개인 주도로 성숙된 생활민주화가 오프라인 생활권으로 흘러나오는 일출 효과(spillover effect)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벤클러가 말하는 개인 역량 강화와 타인과의 소통 및 공감의 생활민주화, 로젠블럼이 말하는 상호성과 발언의 생활민주화가 온라인에서 시작되어 생활 세계로도 확산되는 흐름이다.

 

IT 혁명과 비판적인 시민의 성장


IT 혁명과 SNS 기술의 급성장은 생활민주화의 핵심 요인이다. IT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개인들을 촘촘히 연결시키고, 네티즌을 오프라인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게 만들었다. 절망과 분노의 기폭제, 증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개인의 집회 참여는 IT 혁명의 성장과 밀접히 관련된다. 개인은 인터넷, SNS 등 네트워크를 통해 필요한 정보를 입수해 공유하며 비판적 식견을 갖추고 국정과 사회 문제를 비평하는 시민으로 성장하고 있다.

촛불 집회가 시작된 2002년부터 시민들은 인터넷 등으로 정보를 접하고 광장에 나왔다. 2016년 말에는 시민 혁명이 절정을 이뤘다.[12] 역사상 최대인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촛불 혁명 기간의 인터넷 접속률은 99퍼센트, 스마트폰 보유율은 83퍼센트로 최고치에 달했다. 온라인에서 시작된 네티즌들의 자기 목소리와 표현이 거리와 광장으로 넘치며 직접 행동으로 확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촛불 집회를 통해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한 것이다. 또한 촛불 집회와 시위는 시민 주도의 준법, 평화 시위로 정착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노조나 시민 사회단체 주도 활동에 치우치지 않고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자발적 시민들이 각 이슈에서 ‘시민 전문가’로 나서는 새로운 시민 주도의 무대가 되었다.

촛불 혁명 이후에도 IT 기술은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다. 온라인 세상에서 누구도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동등한 목소리로 소통하고 집단 지성을 만들며 경험한 민주화가 오프라인 생활 세계로 번지며 나의 생활, 우리의 생활을 민주화하는 집단 지성과 직접 행동이 나타나고 있다.

IT 기술은 시민들에게는 지도층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자 무기다. 정치 지도층이 권력으로, 경제 지배 세력이 금권으로 지배하는 세상에 일반 시민들은 IT로 무장하게 된다. IT의 사회적 생산물인 인터넷은 비용이 거의 들지 않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공공재(public goods)와 같다. 인터넷은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이 말하는 ‘한계 비용 제로(zero marginal cost)’를 대표하고, 그 최대 수혜자는 시민 개인이다.[13]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공공재로서의 인터넷은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시민으로의 성장을 돕는다. 정치학자 로널드 잉글하트(Ronald Inglehart)는 물질적 풍요를 누린 대중들은 황금만능주의 사고나 권위에 대한 존중과 같은 전통적인 구습에서 벗어나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성장한다고 분석한다.[14]

갑질 추방 운동, 미투 운동 모두 온라인에서 개인들의 소통과 대화가 이뤄진 다음, 언론에 제보되거나 보도되고 사회 이슈가 되는 경로를 거쳤다. 온라인 뉴스 검색을 이용하는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사회에서 이런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직접 행동주의; 나는 내가 대표한다


개개인의 직접 행동 또한 생활민주화의 핵심 배경 요인으로 파악된다. 흩어져 있는 독자적인 개개인이 온라인 소통과 공감으로 연대해 직접 행동에 나서고 있다. 사회학자 앨버트 허시먼(Albert Herschman)은 조직, 국가 등이 퇴보할 때 구성원들이 선택하는 행동을 이탈(exit), 항의(voice), 충성(loyal)으로 분류했다. 사회에서 갑질이나 성폭력 등 피해를 당한 개인들 역시 상황에서 도피하거나(이탈), 세상에 알리는 목소리를 내거나(항의), 없었던 일처럼 상황에 머무는(충성) 등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이러한 선택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개인적 동기뿐 아니라 개인이 가진 자원,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이기도 하다.[15]

일반적으로 개인이 직접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동기(motivation), 역량(capabilities), 관계망(networks)이 필요하다. 동기는 행동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행동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행동에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역량은 학력 또는 소득 등, 행동에 필요한 개인적 역량을 갖춘 것을 말하며, 관계망은 행동에 필요한 조건을 부여하고 기회를 제공하는 관계다. 모임 등에서 행동 요청을 받으면 행동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동기, 역량, 관계망 모두 충분해도 직접 행동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요인들 외에 대규모 사회 변혁, 국가적인 경제 위기, 정치 혁명 등은 개인의 직접 행동을 촉발(trigger)한다. IMF 외환 위기, 촛불 혁명 등이 대표적인 촉발 요인이다.

직접 행동이 지속되려면 행동 이후 긍정적 경험, 즉 효능감(efficacy)과 주변의 충분한 자원(지지 등)이 필요하다. 반면 직접 행동이 중단되는 것은 부정적 경험(개인의 효능감 상실)이 생겼거나 주변의 지지 등 자원의 결여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규모 직접 행동이 이루어진 2016년 10월 말부터 2017년 3월까지의 촛불 집회 사례에서 참여자의 동기, 역량, 관계망의 상대적 중요성을 회귀 분석으로 살펴보면[16] 참여자의 역량, 즉 개인의 학력과 연령이 중요한 요인으로 나타난다. 고학력자와 20~40대의 참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세 이상 성인 가운데 8.8퍼센트(약 366만 명)가 한 번 이상 집회에 참여했는데,[17] 성별에 따른 차이는 적었지만 세대별로는 참여 비율 차이가 뚜렷했다. 20대가 18.2퍼센트, 30대 10.5퍼센트, 40대 12.7퍼센트인 데 반해 50대의 참여 비율은 3.6퍼센트, 60대는 2.7퍼센트로 뚝 떨어진다.

참여자들은 단체보다는 개인 자격으로 집회에 참석했다. 단체 소속 참여가 9.1퍼센트로 단체 무소속 참여율 8퍼센트보다 다소 높지만, 여기에서 단체 소속이란 향우회, 친목회 등 사교 단체까지 포함한 것으로 노조나 시민 사회단체 소속으로 참여한 것과는 다르다. 또한 단체 중에서도 ‘인터넷 카페와 커뮤니티 활동’에 속한 개인들이 가장 높은 참여율을 보였다. 일반 참여율(8.8퍼센트)보다 세 배 높고(26.4퍼센트), 통계적으로 가장 유의미한 상관성을 보여 준다. 온라인 소통과 공감이 오프라인 집회와 시위 참여로 이어지는 것이다. 인터넷, SNS 등으로 지식과 정보와 식견을 갖춘 개인들의 공감과 소통 등 자발적 참여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신속하게 움직였고, 시민들은 카페, 자조 모임, 학부모 모임 등 소규모 생활 공동체에서 지식과 정보를 공유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제는 나설 수 있다’는 효능감은 이후 일상에서도 개인들이 부당함에 목소리를 내는 동력이 되었다. 촛불 혁명을 계기로 정치 민주화에서 생활민주화로의 이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다. 정치 민주화가 완결되었다기보다는 사회적 이슈의 관심과 초점이 생활민주화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미투 운동이나 갑질 추방 운동이 촛불 혁명 이후에 본격화한 것도 촛불 혁명의 사회적 효능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온라인 소통과 공감을 통한 직접 행동은 지금의 특징이다. 그간의 생활민주화 집회와 시위는 온라인 소통과 집단 지성의 힘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직접 행동주의 원칙에 의거한 새로운 온라인 세대들은 디지털 세계에서 놀고, 학습하고, 관계를 맺는 일에 익숙하고,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의 공적 발현에 주저함이 없는 세대다. 김현미는 ‘온라인 페미니스트들은 스스로를 생활 페미니스트로 부른다’며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상호 학습과 의식화의 장을 연 점, 페미니즘을 접했건 접해 보지 않았건 진입 장벽을 느끼지 않고 참여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이들의 특성으로 설명한다.[18]

직접 행동은 이제 일상화되고 있다. 전통적인 집회와 시위 등도 중요한 의견 개진 방식이지만 IT 혁명의 영향으로 갑질 추방, 미투 운동, 비리 고발에 동참하는 온라인 발언이나 시위 등이 새로운 직접 행동의 양식이 되고 있다.

직접 행동이 일상화된 것은 우선 대의 민주제에 대한 강한 불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대의 제도에 대한 불신이 생활민주화를 바라는 시대적 요청이 되었다. 국회, 정부 등에 대한 불신이 늘어난 것도 개인들이 인터넷 등으로 많은 정보와 지식을 접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정부 기관에 계속 실망하다 보니 남이 나를 대변해 주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직접 나서 행동하고자 하는 ‘직접 행동주의’가 부상하게 된다.

개인은 이제 문제 해결을 직접 요구한다. 세월호 참사 같은 국가적 재난, 성폭력, 불법 촬영 등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켜 줄 안전한 곳도 공정한 중재자도 더 이상은 없다는 생각이 팽배한 것이다. 개인화 시대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다. 개인들은 자신이 직접 행동하지 않으면 나도 내 가족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 의식에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직접 행동에 나서며 문제 해결의 효능감을 높이고 있다.

집회와 시위, 불매 운동 역시 확산되고 있다. 한국 행정 연구원이 실시한 조사에서 집회와 시위, 불매 운동, 온라인 의견 제시에 참여했다고 답한 응답자의 비율은 2017년에 크게 상승했다. 2018년에는 2017년에 비해 참여 비율이 감소했다.[19] 촛불 혁명 시기까지 집회와 시위가 노조 등의 조직 동원이 아닌 자발적인 시민 참여의 폭증으로 상승하다 2018년부터 과잉에 따른 피로 현상 또는 정치 사회적 이슈의 강도 약화로 조정 국면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활발한 참여의 시기를 거치며 이루어진 직접 행동의 질적 진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당이나 단체가 아닌 개인들이 행동을 이끄는 것이다. 2019년 7월부터 일본의 수출 규제 압박에 대항해 진행된 불매 운동 역시 개인 주도 방식이었다. 일반 시민들의 참여와 제안으로 불매 운동의 방식이 만들어지고, 실행되었다.

 

국력 신장과 가치관 변화


국력 신장 또한 지금의 생활민주화에 직접,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배경 요인이다. 경제와 교육, 건강 수준 등 삶의 질과 관련된 요소들을 복합해 측정한 유엔의 ‘인간 개발 지수(HDI, Human Development Index)’를 보면 대한민국은 2017년 세계 22위로 이미 선진국의 수준을 갖추고 있다.[20] 이러한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에서 갑질이나 성폭력 문제가 국력 수준에 걸맞게 해결되어야 할 이슈로 제기되었다.

생활민주화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국력 신장의 역사적 사건들을 보자. 1987년 민주 항쟁을 비롯해, IMF 외환 위기를 극복한 금 모으기 운동 등이 국민의 참여 역량과 사회 효능감 축적에 기여했을 것이다. 88 올림픽과 2018년 평창 올림픽, 2002 월드컵 개최뿐 아니라, 영화, 드라마의 한류와 케이팝 등도 빠뜨릴 수 없는 국력의 자산이다. 또 위안부 할머니의 저항 정신도 생활민주화의 기반이다. 국내 미투 운동의 뿌리는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폭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력은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혜택을 누리는 공공재다. 그러나 국력 신장은 환경 오염, 미세 먼지 등 공공 악화(public bads)를 양산하기도 한다. 국력이 크게 신장하면서 나타난 양극화와 저성장, 4차 산업혁명으로의 산업 패러다임 변화 등이 개인의 일상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문제가 개개인의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도 일상에서 경험하는 부당함이나 부조리에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이유다.

생활 불안은 개인 생활 세계의 인간 안보에 관한 문제로, 국방 안보, 정치, 경제 등 거시적 문제와 구별되는 개인의 사적 생활 문제다. 생활 불안 문제가 국력 신장 후에 대두된 것은 그간 정치, 경제, 사회 거대 이슈에 가려져 생활 불안 이슈들이 뒷전으로 밀려난 탓도 있지만, 인터넷의 급진전으로 생활 불안에 관한 정보가 급속히 공유되는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또 실제로 생활 불안의 빈도와 강도가 높아진 부분도 있을 수 있다. 2008년 광우병 불안에 직면한 많은 개인들이 처음 촛불 집회에 참여한 이후 세월호 참사 등 대형 사회적 참사 때마다 촛불 집회가 이어졌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라돈 침대 파문이나 생리대 유해 물질 문제 등이 뒤를 이었다.

생활 불안은 ‘나도, 내 가족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을 일으켜 개개인이 생존권 사수나 보호 차원에서 목소리를 내게 만든다. 이는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이 아니라 합리적 이기주의에 해당한다. 또 미투와 갑질 추방 운동은 피해자 자신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위한, 미래 세대를 위한 시민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익 추구적이다. 이웃과 공동체의 웰빙, 삶의 질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생활민주화의 민주적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다.

특히 여성들은 생활 불안 의식이 매우 높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안전이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비율은 50.9퍼센트로, 남성보다 10.8퍼센트 높다.[21] 분야별로 살펴보면 범죄 발생이 73퍼센트로 가장 높고 이어 신종 질병 65퍼센트, 정보 보안 53퍼센트, 교통사고 52퍼센트 등이다.

이제 개개인의 관심은 폭력, 위협 등 생활 불안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자신이 경험한 문제뿐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는 문제들의 해결에 공감하며 직접 행동에 동참하는 것이다. IT 혁명의 영향으로 생활 전반에서 나타나는 불안, 위협, 위기에 대해 수시로 정보를 접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타인들과 공감하며 집단 지성을 모으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생활민주화는 가치관 변화의 영향을 받으며, 다시 새로운 가치관으로의 변화를 주도하는 운동이다. 잉글하트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이동함에 따라 전통과 권위의 가치는 합리적 가치로 바뀐다.[22] 전통적 가치는 권위, 종교, 가족, 가부장제 존중, 애국심, 민족주의 중시 등이다. 산업 사회가 후기 산업 사회로 넘어가면 생존 가치에서 자기표현 가치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경제적, 신체적 안정, 낮은 신뢰와 비관용의 생존 가치가 환경 보호, 양성 평등, 정치, 경제 의사결정 참여라는 자기표현 가치로 이동하는 것이다. 잉글하트와 웰젤(Christian Welzel)이 세계인의 가치관 의식을 조사해 작성한 세계 문화 지도[23]를 보면, 한국은 일본, 중국과 함께 권위적 가치관에서 합리적 가치관으로 이동하고 있다.

현재 생활민주화의 흐름이 주장하고 있는 성폭력, 갑질, 비리 등이 사라진 ‘새로운 상식’이 통하는 세상은 합리적이면서 자기표현 중심의 가치관이 정착된 사회다. 생활민주화는 이런 가치관 변화를 이끄는 민주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IT 혁명 이후 교육을 받은 청년층과 청소년은 기술과 지식, 정보의 민주화에 친숙한 세대다. 이들이 주도적인 의견 개진 방식을 학습하고 생활민주화에 익숙해지면서 변화는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생활민주화를 위한 새로운 사회화


생활민주화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습이다. 민주적이라는 것은 개인들이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서로 이해와 소통과 학습을 통해 제기된 문제에 대한 합리적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지속적인 인내의 과정을 의미한다. 자신의 공동체나 조직에 적합한 해결 방식을 탐구하는 집단 지성의 학습이 필요한 이유다. 공동체나 직장 등의 일상생활에서 구성원들 사이에 대화와 소통과 관계부터 민주적으로 무르익을 때 생활민주화는 지속 가능하다.

지속 가능한 생활민주화를 위해서는 개인들의 직접 행동과 연대뿐 아니라 제도와 정책이 필요하다. 생활민주화는 연결된 개인들이 앞장서는 역할을 하면서 시민 사회와 언론을 이끌고 국회와 정부가 법과 제도로 뒷받침할 때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생활민주화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일상생활 영역에서의 부당함이 사라지고, 합리적인 자기표현 중심 가치관이 정착된 사회다. 이와 같이 생활민주화의 결실로 나타나는 의식과 행태의 변화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그렇다고 정부가 나서거나 시민 사회가 시민 교육을 하는 방식으로 생활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화 시대의 개인들은 누가 나를 대표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며, 스스로 대표하고 스스로 학습한다. 아래로부터 시민들 스스로 자율적으로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는 임파워먼트(empowerment)를 중시한다.

임파워먼트를 기반으로 의식과 가치관에 근본적인 변화를 추진하는 사회 시스템 개혁이 뒷받침될 필요가 있다. 생활 민주주의는 가정부터 시작해 유치원과 학교에서 새로운 사회화(socialization)를 필요로 한다. 동시에 대학과 직장, 공공 기관과 사회 기관 모두가 폭력과 폭언, 몰카, 갑질 등을 추방하는 자율적인 교육과 학습을 해야 한다. 교육과 학습의 과정도 정부나 사회 기관 등의 중앙 집중적 하향식(top-down)이 아니라 생활민주화의 원리를 적용해 민주적 상향식(bottom-up)에 기초해야 할 것이다.
[1]
Ulrich Beck and Elisabeth Beck-Gernsheim, 《Individualization: Institutionalized Individualism and its Social and Political Consequences》, Sage, 2002.
이선미, 〈개인 권력 시대의 함께 사는 문제〉, 《SDF 2018 연구보고서》, 2018, 64쪽.
[2]
이선미, 〈개인 권력 시대의 함께 사는 문제〉, 《SDF 2018 연구보고서》, 2018, 65쪽.
[3]
저자는 2018년 11월 2일 SBS SDF 포럼에서 〈개인이 바꾸는 세상: 생활민주화〉라는 주제로 생활민주화로의 패러다임 변화에 대해 발표했다.
[4]
Yochai Benkler, 《The Wealth of Networks : How Social Production Transforms Markets and Freedom》, Yale University Press, 2006.
Yochai Benkler, 《The Penguin and the Leviathan: The Triumph of Cooperation Over Self-interest》, Crown Business, 2011.
[5]
Yochai Benkler, 《The Wealth of Networks : How Social Production Transforms Markets and Freedom》, Yale University Press, 2006, pp. 8-9.
[6]
Yochai Benkler, 《The Penguin and the Leviathan: The Triumph of Cooperation Over Self-interest》, Crown Business, 2011. p. 15.
[7]
Nancy Rosenblum, 《Good Neighbors : Democracy in Everyday Lif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6, p. 248.
[8]
조희정, 〈깃발 내려, 나는 내가 대표한다〉, 《SDF 2018 연구보고서》, 2018.
[9]
김현미, 〈직접 행동주의와 페미니즘 정치, 그 이후〉, 《SDF 전문가 포럼 발제문》, 2018. 10. 5.
[10]
Yochai Benkler, 《The Penguin and the Leviathan: The Triumph of Cooperation Over Self-interest》 , Crown Business, 2011. p. 23.
[11]
김현미, 〈직접 행동주의와 페미니즘 정치, 그 이후〉, 《SDF 전문가포럼 발제문》, 2018. 10. 5. p. 7.
[12]
주성수, 《한국 시민사회사: 민주화기(1987-2017)》, 학민사, 2017.
[13]
Jeremy Rifkin, 《Zero Marginal Cost Society》, St. Martins, 2015.
[14]
Ronald Inglehart, 《The Silent Revolu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7.
Ronald Inglehart, 〈Postmodernization Erodes Respect for Authority, but Increases Support for Democracy〉, Pippa Norris ed. 《Critical Citizens: Global Support for Democratic Government》,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5]
Sidney Verba, Kay L. Schlozman and Henry Brady, 《Voice and Equality: Civic Voluntarism in American Politic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 주성수, 〈세월호 참사 관련 시민참여와 자원봉사〉, 《시민사회와 NGO》 13(1), 5-31쪽에서 재인용.
[16]
주성수, 〈개인화 시대의 생활민주화: 촛불혁명 이후 미투운동과 갑질저항 사례〉, 《시민사회와 NGO》 17(1).
[17]
주성수, 《2017 전국 자원봉사활동 실태조사 및 활성화 방안 연구》, 행정안전부, 2017.
[18]
김현미, 〈직접 행동주의와 페미니즘 정치, 그 이후〉, 《SDF 전문가포럼 발제문》, 2018. 10. 5.
[19]
2011년에 집회와 시위에 참여했다고 답한 응답자는 2.9퍼센트, 불매 운동은 3.7퍼센트, 온라인 의견 제시는 4.1퍼센트였다. 2017년에는 집회와 시위 14.4퍼센트, 불매 운동 8.5퍼센트, 온라인 의견 제시 12.2퍼센트로 크게 증가했다. 2018년의 참여 비율은 집회와 시위 4.9퍼센트, 불매 운동 5.9퍼센트, 온라인 의견 제시 9.5퍼센트로 나타났다.
한국행정연구원, 《사회통합실태조사》, 2017.
[20]
UNDP, 《2018 Human Development Report》, 2018.
[21]
〈여성 2명 중 1명 “우리 사회 안전 불안하다”〉, 《연합뉴스TV》, 2018. 11. 3.
[22]
Ronald Inglehart, 《The Silent Revolu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7.
Ronald Inglehart, 〈Postmodernization Erodes Respect for Authority, but Increases Support for Democracy〉, Pippa Norris ed. 《Critical Citizens: Global Support for Democratic Government》,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23]
〈Findings and Insights〉, 《World Value Survey》,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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