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기소하기 어려운 범죄
2화

법정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사건들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진실

1월 6일이 되면, 한 재판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할리우드의 거물 하비 웨인스타인(Harvey Weinstein)은 성범죄와 관련한 다섯 가지의 혐의에 대해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수십 명의 여성들은 지위를 이용해 성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웨인스타인을 고발했다. 2017년, 이 여성들의 증언으로 미투(#MeToo) 운동이 시작되었다. 웨인스타인은 합의되지 않은 성관계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유죄가 확정되면 감옥에서 수십 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웨인스타인에 대한 고발이 그처럼 거센 폭풍을 일으킨 이유는 비슷한 경험을 한 여성들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외의 조건에서 보면, 이 사건은 많은 여성들의 경험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의 피고인은 유명인이 아니다. 수많은 영화배우들이 피해자도 아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대부분의 성폭행 사건은 신고되지 않고, 신고되어도 실제 법정으로 가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2019년 3월까지 직전 1년 동안의 성폭행 신고가 기소로 이어진 비율은 겨우 1.5퍼센트였다. 같은 기간 전체 범죄 기소율은 7.8퍼센트, 폭력 범죄 기소율은 8.3퍼센트였다.

성폭행은 기소하기 어려운 범죄다. 살인이 일어나면 시체가 존재한다. 반면 성폭행의 물리적인 증거는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성폭력 범죄의 유일한 증거가 피고가 단호하게 부인하는 피해자의 증언일 때도 많다. 고소인이 진실을 말하고 있으며 피고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합리적 의혹 수준을 뛰어넘어 명백하게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다. 일반 대중, 즉 배심원들이 성폭행 사건의 일반적인 특징과 설득력 있는 주장에 대해 상당히 오해하고 있는 경우에는 혐의를 입증하기가 더 어렵다.

이번 기사는 최신 연구뿐 아니라, 가상의 사례 연구를 통해 “남자와 여자의 서로 다른 주장”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코노미스트》 기자들은 수많은 실제 성폭력 피해자들을 인터뷰했지만, 각 개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공정하게 사건을 드러내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부터 살펴볼 “제인(Jane)”과 “조(Joe)” 사이의 일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하지만 법정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압도적으로 대다수인 사건들의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 주고자 노력했다.
 
제인은 24세의 사무 보조원이다. 그녀는 사무실 동료인 조에게 2년 전 성폭행당했다. 그들은 업무를 마친 후에 함께 술을 마셨는데, 그녀는 집에 가는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둘은 함께 조의 아파트로 갔다. 제인에 따르면 조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인을 억지로 눕히고 성폭행했다. 그녀가 “노(No)”라고 계속해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녀는 맞서 싸우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건이 있기 1년 전, 사무실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키스를 했었다.
 
조는 40세의 은행원이다. 문제의 그날 밤, 조는 제인과 키스를 했고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졌다고 말한다. 이튿날 아침, 그가 잠에서 깼을 때 그녀는 떠나고 없었다. 하지만 조는 제인과 다정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말한다. 그는 그날의 일이 전형적인 ‘원나잇 스탠드’였다고 했다. “그녀는 완전히 즐기고 있었어요.” 그는 그녀가 지금 “명백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두 진술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조의 말이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제인의 진술에 성폭행과 관련된 내용들이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가해자는 낯선 사람이어야 하고, 무기로 위협하거나 다치게 해야 하고, 외딴 장소여야 하고, 피해자는 사건 즉시 범죄를 신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오해다. “성범죄에 관한 대부분의 상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법의학 분야의 정신과 의사인 바버라 지브(Barbara Ziv)의 말이다. 그녀는 2018년에 가중 처벌이 적용되는 세 건의 성추행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미국 코미디언 빌 코스비(Bill Cosby)의 재판에 전문가 증인으로 출석해 증언한 바 있다.

2018년 미국에서 경찰에 신고된 성폭행 사건의 수는 12만 7000건이 넘는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2019년 6월까지 1년 동안 신고된 사건은 5만 8947건이다. 피해자의 압도적인 다수는 여성들이다. 많은 사건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신고된다. 2017년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신고된 성폭행의 4분의 1 이상은 발생한 지 1년이 넘은 사건들이었다. 신고된 성폭행 사건 가운데 약 80퍼센트의 가해자는 피해자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성폭력은 보통 무기나 눈에 띄는 부상과 관련이 없다. 〈2017 잉글랜드·웨일스 범죄 조사 연구〉에 따르면, 성폭력 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한 장소는 피해자의 집이었고(39퍼센트), 두 번째로 많이 발생한 장소는 가해자의 집이었다(24퍼센트). 공원이나 길거리와 같은 공공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은 10퍼센트에 불과했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약 3분의 1은 사건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절반 정도는 지인에게 말한다. 경찰에게 사실을 알린 비율은 다섯 명 중 한 명도 되지 않는다. 크리스틴 블레이시 포드(Christine Blasey Ford)가 미국 상원에서 당시 대법관 후보자였던 브렛 캐버노(Brett Kavanaugh)로부터 수십 년 전에 성추행을 당했다고 증언했을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라면 곧바로 경찰에 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추행과 성폭행은 폭력 범죄 중에서 가장 신고율이 낮다.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불쾌한 경험을 잘 신고하지 않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수치심 때문일 수도 있고, 신고해도 소용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업무 관계로 엮여 있어서 가해자와 계속 연락하며 지내야 하는 상황도 있다. 가해 남성에게 추파를 던지거나, 다시 성관계를 갖기도 한다. 이런 시도가 피해자-가해자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다.

배심원들이 이런 심리까지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피고 측 변호인들은 혼란을 이용한다. 웨인스타인에 대한 혐의가 제기된 직후, 뉴욕타임스는 당시 웨인스타인의 변호사였던 리사 블룸(Lisa Bloom)이 웨인스타인의 회사 임원들을 어떻게 안심시키려 했는지 보도했다. 블룸은 “그가 부적절한 행동을 한 다음 고소한 여성들과 매우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들이 곧 공개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소인 측이 지속적인 관계를 숨기려 했었다면, 그런 사진은 사건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관계가 지속되었다는 것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다.

무기가 사용되지 않았거나, 기억이 없거나 부정확한 기억을 하고 있거나, 뒤늦게 신고했거나, 가해자와 알고 있는 사이였거나, 가해자가 합의에 의한 관계라고 주장한다면 성폭행 신고는 수사 과정에서 묵살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 성폭행 사건에서는 이런 상황이 너무나 일반적인데도 말이다.

과거의 서양에서는, 그리고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곳에서는 여성의 말이 노골적으로 경시당했다. 20세기 중반의 미국 법학자인 모리스 플로스코(Morris Ploscowe)에 따르면 당시 법률은 피해자가 “즉시 거세게 반항해야” 한다고 보았고 “여성들은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진술을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대학교의 법학 교수인 데보라 투어크하이머(Deborah Tuerkheimer)는 미국의 사법 체계가 원고 측의 신뢰성을 시스템 차원에서 저평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원고 측의 평소 행실이나 성격에 대한 엄밀한 조사가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인을 알고 지내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제인의 진술이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웨인스타인 사건에서는 대중의 신뢰를 받는 유명한 여배우들이 고소했던 것이 크게 도움이 됐습니다.” 조사관이자 컨설턴트인 일레인 허스코위츠(Elaine Herskowitz)의 말이다. 브루클린 로스쿨의 교수인 베넷 케이퍼스(Bennett Capers)는 웨인스타인이 조지 클루니처럼 멋진 외모가 아닌 것도 도움이 된 측면이 있다고 덧붙인다. 만약 조가 멋진 외모의 남성이었다면 남자든 여자든 모두 그가 그런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형사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성폭행범과 피해자 사이에 권력의 격차가 더 클수록 가해 남성이 빠져나가기 쉽다고 주장한다. 피해 여성이 성매매 종사자이거나, 마약 중독자이거나, 청소년인 경우에는 배심원이 신뢰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일자리를 잃으면 생계에 위협을 받는 청소 담당 직원을 사장이 희롱했다면, 그녀는 신고하지 않을 것이다. 신고를 하더라도 배심원들은 사장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염두에 둘 것이고, 그래서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을 신뢰할 것이다. 부유했던 성범죄 가해자로 뉴욕의 감방에서 생을 마감한 제프리 엡스타인(Jeffrey Epstein)은 결손 가정의 10대 소녀들을 먹잇감으로 삼았다. 엡스타인이 처음 고소당했을 때, 그의 변호인들은 고소한 아이들을 믿을 수 없다며 수사관들을 설득하기 쉬웠을 것이다.
 
제인은 경찰서로 간다. 왜 다음날 바로 신고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은 그녀는 수치스러웠고, 신고해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그 일을 친구인 샐리에게만 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신고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미투 운동으로부터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정의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신고해 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피해자들의 생각에는 이유가 있다. 미국 국립 범죄 사법 자료 서비스(NCJRS)가 최근에 발간한 연구는 미국 내 6개의 사법 관할 구역에서 2008년부터 2012년 사이에 있었던 성폭행 및 성폭행 미수 사건 신고 추이를 분석했다. 가해자의 체포로 이어진 사건은 여성들이 신고한 2887건 가운데 5분의 1에 불과했다. 법정으로 간 사건은 겨우 1.6퍼센트였다. “경찰과 검찰은 배심원들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사건들만 기소합니다.” 이 연구의 저자로 참여한 린다 윌리엄스(Linda Williams)의 말이다.
기소율 하락세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8~2019년에 경찰에 접수된 성폭행 신고 건수는 2014년 이후로 거의 세 배 가까이 증가했지만, 기소된 사건의 수는 최근 10년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FBI 데이터에 따르면, 2018년에 경찰에서 종결(기각한 사건까지 포함)로 수사를 마무리 지은 성폭행 사건의 비율은 불과 33퍼센트였는데, 이는 1960년대 이후로 가장 저조한 “사건 해결 비율”이었다. 성폭행보다 해결 비율이 저조한 것은 강도 사건뿐이었다. 낮은 사건 해결 비율은 경찰이 복잡한 사건들을 좀 더 오래 수사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성폭행 사건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경찰은 조를 심문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제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겨서 그녀가 질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관심을 끌기 위해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다”고 그는 말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조의 이야기는 대중의 선입견에 들어맞는다. 남자들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신고하는 여성들의 대부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 말이다. 여론 조사 기관인 입소스 모리(Ipsos Mori)에 따르면, 미국인 남성의 57퍼센트와 여성의 48퍼센트는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가짜로 고소하는 일이 매우 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의 900명에 달하는 미국 경찰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는 절반 이상의 경찰관들이 성폭력을 당했다는 신고의 10~50퍼센트 정도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열 명 중 한 명의 경찰관은 50~100퍼센트 정도가 거짓말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코노미스트》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투 운동 이후, 사람들은 성추행이나 성폭행 거짓 신고가 늘어날 것에 대해 그전보다 더 많이 우려하고 있었다.

거짓 신고 비율이 정확히 얼마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매사추세츠대학교에서 퇴직한 데이비드 리삭(David Lisak)의 신뢰도 높은 연구에 따르면 거짓 신고 비율은 대략 2~8퍼센트 사이로 좁혀진다.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에게는 그 과정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가는 악몽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경찰이 고소인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면, 성폭행 피해자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성폭행범들은 처벌받지 않고 성폭행을 저지를 것이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양쪽의 증언을 모두 신중하게 다루는 시스템입니다. 이런 시스템은 양쪽의 말을 모두 기계적으로 사실이라고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존 스펜서(John Spencer)의 말이다.

거짓 신고는 실제 사건에 비해 일반인이 흔히 생각하는 성폭행의 형태와 비슷할 가능성이 크다. (폭력 행위, 가해자가 낯선 사람, 어두운 골목 등) 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다룬 2014년의 연구에서 연구원들은 성폭행 혐의를 받는 사건의 4.5퍼센트를 거짓이라고 판단했다. 거짓으로 판단한 사건의 4분의 3 이상이 무기를 사용하거나, 용의자가 여러 명이거나, 부상을 입는 등 사실일 경우 가중 처벌이 적용되는 사건이었다.
 
수사관들은 제인이 신고한 내용을 수사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몇 군데의 빈틈이 있었다. 그녀는 둘이서 조의 아파트까지 어떻게 이동했는지 기억하지 못했고, 언제 어떤 방법으로 집에 돌아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조의 집에 있는 소파에 대해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까지 포함해서 놀라울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실제로 조의 집에 있는 소파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웃들은 다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인은 다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녀는 자신이 굳어 있었다고 말한다.
 
물리적인 증거도 없다. 제인은 신체적으로 부상을 당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어떤 경우든 조는 둘의 성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휴대전화 기록을 살펴보니, 제인은 사건 다음 날 아침 친구인 샐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당장 얘기 좀 해 :( 전화할 거지?”
 
샐리의 수첩에서 제인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제인은 조를 처음 알게 된 후 몇 주 지나서 두 개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었다.
 
“심심해요. 뭐하세요?”

“여름 파티에 가실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조는 두 문자에 답장하지 않았다. 제인이 샐리에게 문자를 보냈던 날, 조는 친구에게 “그 여자랑 아주 정신없이 즐겼어”라는 문자를 보냈다.

진술 기록 이외의 양측에 대한 조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피해 여성의 기억, 여성의 신체, 여성의 디지털 기록.

사람이 기억하고 잊어버리는 방식의 특성으로 인해 성폭력 사건은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트라우마의 기억은 특정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아주 놀라울 정도로 자세하게 저장되는 반면, 다른 세부적인 사항들은 흐릿하거나 잊힐 수도 있다. “생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특성이 완벽하게 설명됩니다.” 하버드 의대의 짐 호퍼(Jim Hopper)의 말이다. “우리의 두뇌는 미래에 피해야 하는 것은 기억하지만, 건넌방에서 일어나는 일은 굳이 기억하지 않도록 진화했습니다.” 술이 개입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자신을 성폭행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3분의 1 이상은 사건을 당했을 때 술을 마신 상태였다고 말했다. 과음을 하면 사람은 의사를 표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의식을 잃게 된다. 술을 적당히 마셨더라도 주변적 상황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질 수 있다.

신체적으로도 사람들이 예상하는 그런 증거는 남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합의하지 않은 성관계였다고 해서 언제나 부상이나 신체적인 외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이유로는 “긴장성 무운동(tonic immobility)”을 들 수 있다. 이는 신체에서 힘이 빠지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스웨덴의 한 연구에 참여한 성폭행 사건 피해자의 3분의 2는 긴장성 무운동 증상을 겪었다고 대답했다. “여전히 피해자들은 성폭행 후 외음부에서 눈에 띌 정도의 파열이 발견되지 않으면 거짓말을 한다는 의심을 받는다.” 페미니스트 작가인 케이트 하딩(Kate Harding)은 자신의 저서 《그것을 요구한다(Asking for it)》에서 이렇게 썼다.

디지털 기록은 잠재적인 증거를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원천이다. 증인 진술이나 다른 증거들만으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면, 배심원들은 원고 측의 이야기나 피고 측의 이야기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배심원들의 의심을 키우기 위해 피고 측 변호사들은 종종 원고의 신뢰도를 깎아내리려는 시도를 한다.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사건 이전의 부정한 행실에 대한 자료를 긁어모으는 행위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폭행 사건이 일어난 관계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는 일은 여전히 허용되고 있다.

영국의 경찰과 검찰은 원고 측의 전화 기록을 조사해 피고 측에 공개하지 못해 많은 성폭행 사건에서 패소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통화, 이메일, 채팅 기록을 사생활 침해 수준으로 들여다본다면 결국 “디지털 알몸 수색”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고발인이 스태퍼드 진술서(Stafford statement)라는 문서에 서명을 하면 병원 진료 기록을 포함해서 광범위한 디지털 기록들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사생활 침해는 피해자들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수사가 끝나자, 검사는 이 사건의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서 법정으로 갈 수 없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제인의 이야기가 소셜 미디어에 등장한다. 그것을 본 또 다른 여성 한 명이 나타나서 조가 자신에게도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익명의 블로그 게시글 글쓴이는 20년 전에 조와 함께 인턴 사원으로 일했던 적이 있는데 그가 “정말로 소름 끼치는”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성기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했다”고 주장했다.
 
제인과 조가 일하는 은행의 인사 담당 부서는 대혼란을 겪게 된다. 많은 여성 직원들과 일부 남성 직원들이 조와 함께 있으면 불편함을 느낀다고 말을 한다. 조가 코치로 일하고 있었던 지역 소녀 축구 클럽은 사임을 요청한다. 여자 친구는 그를 떠난다.
 
석 달이 지나고 제인은 일을 그만둔다. 같은 직장에 있는 조의 친구들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인은 불안감으로 고통받고 있다. 조는 새로운 여자 친구가 생겼고, 같은 은행의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숫자가 중요하다


“30명의 여성이 더 나타나서 이런 일로 고소를 한다고 해도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레스는 우리의 리더이고, 그에 대한 저의 견해는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2018년 7월, 아놀드 코펠슨(Arnold Kopelson)은 CBS 방송국의 동료 임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시 이 회사의 CEO 레스 문베스(Les Moonves)는 성 추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단 한 건으로 시작되었던 고소 건수는 급격하게 늘었다. 하지만 코펠슨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점점 더 불어나는 숫자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 결국은 주주들까지 신경 쓰게 되었다. 문베스는 대표 자리에서 쫓겨났다. 만약 제기된 혐의들의 공소 시효가 만료되지 않았다면 그는 기소되었을 수도 있다. 문베스는 모든 혐의들을 부인하고 있다.
빌 코스비의 재심에서도 숫자가 가진 힘을 볼 수 있었다. 2017년 6월 그를 법정에 세웠던 첫 번째 재판은 심리 무효로 끝났다. 하지만 재심에서 판사는 다섯 명의 추가적인 피해자들이 증언하는 것을 승인했다. 비록 그 사건의 공식적인 원고는 한 명뿐이었지만 원고 측을 지지하는 증언이 많아지면서 배심원단이 유죄 평결을 내릴 수 있었다. 어떤 성폭행범들은 실제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여러 명의 여성들을 성폭행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성폭행에 대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 실제와 일치하는 흔치 않은 부분이다. 여러 명의 고소인들은 신뢰를 높인다. 특히 고소인 각자가 독립적으로 나섰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혐의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법적인 의미의 입증이 더 쉬운 것은 아니다.

사법 체계가 실패하면,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찾는다. 예전부터 여성들은 화장실 문에 위험한 남성들의 이름을 적어 놓거나, NSIT(not safe in taxis, 택시를 같이 타면 위험한 동료)의 명단을 공유하는 식으로 익명의 조기 경보 네트워크를 만들어 왔다. 현대로 와서는 뉴욕에서 “미디어 업계의 더러운 남자들(Shitty Media Men)”이라는 제목으로 공유된 명단이 있다. 영국 정가에서도 “웨스트민스터 성범죄자 명단(Westminster Sex list)”이라는 제목의 리스트가 디지털 파일 형태로 공유되었다.

이제는 이런 대응을 돕는 온라인 도구도 있다. 현재 많은 대학교는 칼리스토(Callisto)라는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칼리스토는 성범죄 신고를 꺼리는 이들에게 두 가지의 선택권을 준다. (미래에 제출하고 싶어질 때를 대비한) 신고서를 작성하되 당장 전송하지 않거나, “매칭(Matching)”이라는 페이지에 가해자의 이름을 입력하는 것이다. (대학 당국에서는 여러 명의 피해자로부터 동일한 이름이 입력될 때에만 신고 사실을 알 수 있다). 칼리스토를 운영하는 비영리 단체는 이 시스템을 이용하는 사용자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성범죄 피해 사실을 신고할 가능성이 여섯 배 높고, 훨씬 더 빨리 신고한다고 밝히고 있다.

제도권에서 성폭력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몇 십 년이 지났다. 그리고 미투 운동은 가해 사실을 퍼뜨릴 수 있는 소셜 미디어의 힘과 새로운 연대감을 보여 주었다. 혐의의 양 자체가 너무 많아서 여러 사건에 대한 새로운 수사나 재수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변화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혹은 가해자들을 저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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